소설리스트

87화. 아무튼 소박하게 한 벌 (87/110)


#87화. 아무튼 소박하게 한 벌
2022.09.30.



 
밤비의 고향인 북부 왕국은 원래 제국의 영토에 속했다.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그곳은 설인족이 국경을 넘어 도발해 오는 일이 잦았다.

연중 250여 일 전투가 벌어졌고, 입김까지 얼어붙는 혹독한 겨울이 돼서야 100일간의 휴전에 들어갔다.

그런 사정만 들으면 전투에 동원되느라 피폐하고 고달픈 삶을 사는 영지민들의 모습이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곳엔 징병 제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가문의 기사단과 고용 병사만이 출정했는데, 그 숫자도 다른 영지에 비하면 현저히 적었다.


「아하, 그래서 밤비가 견디지 못하고 제도로 튀, 도망 온 건가요? 그렇게 전투가 잦은데 투입되는 병력은 적으니.」

말이 좋아 소수 정예지, 그 정도면 기사들이 전사하는 경우보다 과로사하는 경우가 더 많은 거 아니냐고.

언젠가 그런 생각으로 물은 말에 밤비가 지었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주군에 대해 레이디처럼 말하는 분은 처음이라. 부디 북부 근처에서는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밤비의 정색한 표정에 내가 더 겁먹은 기억이 있다. 지체 높은 귀족도, 심지어 제국의 황제마저도 우습게 여기던 밤비가 말이다.

알고 보니 그곳의 영주였던 메 공작은 대부분의 전투를 혼자 감당해 왔던 것이다.

공작은 소드 마스터에 위저드 마스터였기에 굳이 다른 사람이 전투에 나가 다치거나 목숨을 잃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다만 그러자면 공작 본인은 연중 250여 일을 전쟁터에 묶여 있어야 했다.

그뿐 아니라 공작은 적인 설인족도 결코 무력으로 진압하는 법이 없었다. 그들이 공격해 오면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게 적당히 떨어내는 정도에 그쳤다.

그야말로 인간 방패, 인간 성벽이었다고 할까.

오랫동안 관습처럼 굳어진 이 상황에 처음으로 이의를 제기한 이는 공작과 혼인해 북부로 가게 된 새 신부, 공작부인이었다.

결혼 후에도 공작부인이란 호칭보다는 ‘레이디 페’로 불렸던 그녀는 악녀로도, 성녀로도 평가되는 흥미로운 인물이다.

어떤 이는 그녀를 가리켜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천박한 장사꾼, 사기꾼이라 했고, 어떤 이는 그 누구보다 영민하고 인정 넘치는 군주라며 존경했다.

여하튼 공작의 비밀을 알게 된 레이디 페는 불같이 화를 내며 이렇게 선언했다고 한다.


‘여러 사람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한 사람이 희생하는 건 결코 옳지 않아요. 그 한 사람이 내 남편이라면 나는 더더욱 두고 볼 수 없고요. 한 사람의 삶을 대가로 바친 평화가 과연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있나요?’

수완 좋은 사업가였던 것만은 분명한 그녀는 이에 제국과도 설인족과도 통 큰 거래를 시도했다.

제국 최초의 마법식 열차와 철도를 놓아 주는 조건으로 북부를 독립시켜 달라고 요구한 것. 그 열차가 다름 아닌, 지난 생에 진과 내가 처음 만났던 바로 그 열차다.

그렇게 영지의 독립을 손에 넣은 그녀는 설인족까지 국민으로 받아들여 왕국을 건립하기에 이른다. 전쟁의 근원 자체를 뿌리 뽑은 셈이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지만, 내가 북부 왕국의 사례에 주목한 것은 마도구, 그중에서도 방어구 때문이었다.

레이디 페가 이룬 사업적, 정치적 성공의 중심에는 마도구가 있었다.

특히 한정된 자원인 마정석을 원료로 하는 것이 아닌, 마법식을 주입하는 마도구를 연구, 개발하는 데 어마어마한 투자를 했다.

그녀는 남편을 전장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전투용 마도구도 많이 만들었는데, 고지식한 공작의 뜻에 따라 살상 무기가 아니라 주로 방어용, 보호용, 착시용 마도구를 개발했다.

그러니까 나는 북부의 그 성능 좋은 방어구를 주문하고 싶은 것이다. 기왕이면 좋은 가격으로.


“레이디 페, 아니 북부 왕국의 공동 군주께서는 정말 대단하세요. 어쩌면 그렇게 현명하고 능력도 뛰어나고 대범하실 수 있나요.”

혹독한 기후와 척박한 자연환경,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 가식 없고 우직하기만 한 북부인의 기질 탓에 원래 그곳의 생활수준은 낙후된 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공작부인이 된 후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해, 왕국으로 독립한 지금은 ‘북부의 알부자’, ‘세계 은행’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나는 감탄하면서 한편으로 그녀의 능력과 스케일에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다. 늘 어설프고 부족한 나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경지였으니까.

나는 그런 대단한 일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밤비를 통해 북부의 명품 마도구를 손에 넣어서, 진이 다치지 않도록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벌 쫙 뽑아 주고 싶을 뿐.

그리고 페가수스 부하들이나 진을 지지하는 이들이 전투 중에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진이 죄책감으로 괴로워할 테니, 그 사람들도 다치지 않게 보호구 한 벌씩 해 입히려는 정도.

또 적군이든 아군이든 자신의 황위 탈환을 위해 애꿎은 사람들이 희생되는 광경을 보면 진이 마음 아플 테니, 착시 마도구로 겁을 줘 달아나게 하거나 투항하게 만들어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이기면 좋겠고.

이혼 위자료로 뜯어낸 돈과 보석, 토지, 광산 등을 어디에 쓰는 게 가장 보람 있을지도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역시 반란군에 투자하는 것만 한 게 없는 듯했다.

프러너스한테 받아 낸 돈으로 프러너스의 적들을 무장시키는 것. 프러너스가 반란군의 최대 후원자가 되게 하는 것.

흠, 마음에 쏙 든다.


“그러니 돈 걱정은 말고 마도구를 많이 확보할 수 있도록 다리를 좀 놔 줘요, 밤비.”

도움을 청하며 내 어설픈 계획들도 밤비에게 털어놓았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소박한 것들이에요. 밤비도 알잖아요, 나 구멍 많은 사람인 거. 그분과는 달리 스케일이 조막만 하지만, 이것도 내겐 버거우니 밤비가 꼭 좀 도와줬으면 해요.”

내 이야기에 줄곧 귀를 기울이던 밤비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대체 어디가 소박하고 어디가 조막만 하다는 거죠? 레이디 페 못지않게 악랄하신데?”

“과찬이에요. 나같이 미련한 사람을 어떻게 그런 분과.”

내 말에 밤비가 왠지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아, 레이디 페를 모셨던 때가 생각나네요.”

“밤비가 직접 그분을 모셨어요?”

“네, 그분의 호위 기사였어요. 공작부인이 되시기 전에 제도에 계실 때요. 호위를 두실 형편도 못 되어 당시 공작께서 북부에 있던 저를 그분께 보내셨죠.”

와, 밤비가 레이디 페의 측근이었다니. 그저 북부의 기사 출신이라기에 줄을 대 보려 한 것인데. 운이 좋았잖아?


“그거 아세요? 레이디 페는 모든 제국인이 경멸하던 여자였답니다.”

“네? 왜요?”

“몰락한 가문 출신이었거든요.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데뷔탕트조차 치르지 못했죠.”

“그게 경멸의 이유가 되나요?”

“사교계엔 늘 만만한 조롱거리가 필요하잖아요. 물론 레이디 페께서 제국의 귀족 여성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일만 골라서 하긴 하셨죠. 교양 없고 불쾌한 여자라는 평판이 따라다닐 수밖에요.”

“그랬군요. 하지만 능력을 숨기고 계셨던 거겠죠?”

“글쎄요, 레이디 페도 모든 걸 잘하시진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죠. 그분의 가장 큰 능력은 다른 사람의 재능을 알아보는 것이었으니까.”

“사람 보는 눈이 있으셨군요.”

나는 레이디 페에게 조금쯤 동질감을 느끼다가 다시 위축됐다. 사람 보는 눈이 없어 여러 생을 고생했으니까.


“신분이나 배경, 겉모습에 대한 편견 없이 오직 재능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셨죠. 본인도 모르는 재능을 찾아주시기도 했어요.”

“혹시 밤비에게 미용을 권한 이도?”

“맞습니다. 북부는 실용적인 학문과 기술은 발달했지만 예술이나 미적인 전통은 희미했거든요. 레이디 페는 제게 명령하셨죠. 제도에 가서 귀족들의 취향을 익혀 와. 귀족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야 많이 남으니까.”

“하하하.”

“하하, 실은 제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길 원하셨던 거지만요. 표현을 꼭 저렇게 하셨죠.”

한바탕 웃음이 가시자 밤비가 자세를 바꾸더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 드린 이유는, 레이디 앰브로시아, 아니 레이디 M께서 충분히 잘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예요.”

“밤비…….”

“일찍이 이 마담 밤비의 재능을 알아보고 머리를 맡겨 주셨고, 또 이렇게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저를 적절하게 이용하시잖아요? 레이디 페 못지않게 안목이 좋으시단 말이죠.”

“지금 원망하는 거 아니죠?”

“하하, 글쎄요. 무엇보다 황제를 바꾸는 일이에요. 보통 담력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내가 바꾸긴요. 그저 적합한 인물이 원래 자리를 찾도록 도우려는 거예요.”

밤비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알아요. 그런 일들을 감당하게 하는 동력은 능력도 담력도 아니란 걸. 철의 여왕, 레이디 페를 움직인 것도 실은 사랑이었답니다. 메 공작 전하를 향한.”

“흠흠, 티…… 나요?”

“지금껏 도와달라고 말씀하신 것들이, 전부 그런 거던데요?”

“눈치챘으니 도와줄 거죠?”

“사랑에 눈먼 레이디의 부탁은 피할 수가 없죠. 징글징글하게 겪어 봐서 압니다.”

“고마워요, 밤비. 그런데 사랑 얘기는 의외이긴 하네요.”

“제가 직접 해 보진 않았어도 구경은 남부럽지 않게 했거든요. 보통 제대로 된 사랑을 하는 이라면 상대가 합당한 대우를 받고 제자리를 찾아가기를 바라더라고요.”

밤비, 당신도 곧 하게 될 거예요. 버터 삼킨 백상아리와. 그가 당신만큼 좋은 사람이길 바라요.

여러 삶을 전전하고도 여태 사랑이 무언지 잘 모르는 나 역시도,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이 제대로 된 사랑이라면, 내 세계는 점점 넓어지게 되어 있다.

내 어설픈 오지랖의 범위가 점점 커지는 것처럼. 전에는 꿈조차 꾸지 못한 일들을 겁 없이 벌이는 것처럼.

그에 비해 프러너스를 사랑한다고 생각하던 시절, 내 세계는 점점 좁아지기만 했다.

좁아지고 좁아져서 시야가 바늘구멍만 해지고 나중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졌다.

그렇다면 지금의 사랑은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모양인데, 이번엔 그래서, 너무 그래서 문제였다.


 

* * *



‘로제트가 괴한의 습격을 받아 행방이 묘연하다?’

카를슈테인 공작은 로제트의 감시를 맡긴 정보 길드 두 곳에서 보내온 비슷비슷한 보고를 곱씹었다.

스콜피온스의 보고에는 없는 내용이 페가수스의 보고에는 몇 가지 있었다.

스콜피온스의 감시책이 무단으로 모습을 노출하고 레이디 앰브로시아를 구출하려 했다는 것.

레이디를 습격한 괴한들이 황제의 비밀 암살단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

카를슈테인 공작은 서늘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황제가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했다.

황제가 자신의 이혼에 유독 우호적이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제는 비어 있는 공작부인 자리를 하루빨리 채우라는 참견까지 하지 않았는가.

공작은 영 찜찜하고 불길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는 에인절스 딤플의 사육장에 똥파리가 꼬이기 시작했다는 보고도 올라왔다.


“어떤 겁 없는 놈이 감히 카를슈테인의 사유지에 얼씬거려? 얼마 후면 사냥을 나가야 하는데 성가시군.”

“어떻게 할까요?”

“몇 푼 쥐여 줘서 쫓아 보고, 그래도 말귀를 못 알아듣거든 사냥개들 먹이로 치워 버리든지.”

공작은 무표정한 얼굴로 지시했다.

로제트라는 낡은 패를 버리고 새로운 패를 선택한 것이었지만, 막상 로제트가 자기 손아귀에서 정말로 빠져나가 버리자 공작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위자료로 받은 재산을 사기꾼들에게 털리고 결국은 다시 자신의 주변을 서성거릴 것이라 기대했는지도.

로제트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탓에 공작은 허전한 것 같기도 하고 섭섭한 것 같기도 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황제라는 미치광이 견주와, 그의 사나운 애견 주위를 집적거리며 신경을 긁는 날파리 때문에. 그들이 행여 자신의 안위를 위협할까 걱정하느라.

공작은 로제트가 그래서 어떻게 됐는지, 걱정은 고사하고 궁금해할 여유조차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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