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백 개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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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백 개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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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백 개의 마음
2022.10.03.
하얗고 폭신폭신한…… 솜꽃?
외출했다 돌아와 보니 숙소에 솜꽃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달밤에 솜꽃을 보러 갔다가 솜꽃은 보지 못하고 파밭에서 파 냄새를 실컷 맡고 온 이후로 진을 통 만나지 못했다.
이제 긴급한 전략 회의가 열릴 일도 거의 없었고, 다들 맡은 일을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빴으니까.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살생부 얘기를 흘려서 불안감을 고조하는 것으로 지지 귀족을 늘리는 일은 계획대로 진척되었다.
귀족들이 양쪽에 다리를 걸친 채 여전히 간을 보고 있다 해도 그런대로 괜찮은 성과였다. 애초에 그들에게 바란 건 진심 어린 지원이 아니라 방관이었으니까.
물론 그중에는 진에게 충성된 맹세를 바친 가문도 있기는 했다. 그 한 줌의 가문들과 반란군을 이끌 진의 측근들이 새로운 제국의 공신이 되겠지.
게다가 지지 귀족을 늘리는 일은 전혀 생각지 못한 데서 동력을 얻었다. 슈발럼에게 맡긴 일과 묘하게 얽힌 결과였다.
마수 사육에 대한 사실을 귀족들과 제국민에게 널리 퍼뜨리는 작전은 미묘하게 어긋난 궤도를 그렸는데, 이제 보니 바뀐 방향도 썩 마음에 들었다.
처음 슈발럼에게 기대한 건 마수 사육의 실체를 폭로해서 제국민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이에 편승한 귀족들에게 황위 교체의 명분을 만들어 준다는 것이었는데.
그러자면 어쩔 수 없이 마수에 희생되는 마을과 주민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희생을 막을 수 있으면서 손 놓고 방관해도 되는 건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괴로워하던 차.
요 영악하고 비겁한 슈발럼이 뒷돈 값을 톡톡히 한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처음부터 황제까지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정도 폭로로 황위를 흔들 수 있다고 믿지 않은 것이다.
야생동물처럼 어디를 얼마만큼 건드려야 자신이 무사할 수 있는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한 슈발럼은, 프러너스만 공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사람들이 솔깃할 만한 괴담을 만들어 퍼뜨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심각한 정치색은 빼고 흥미를 자극하는 요소들 위주로 기사를 써서 관심을 모았다.
공격당하는 사람도 긴가민가하게 말이다. 그래서 프러너스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던 듯하다.
기사의 진의가 무엇이든, 그 기사 때문에 마수를 풀어 사람들을 공격하고 공포감을 조성한다는 계획에는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많은 이의 눈이 에인절스 딤플에 쏠려 있으니.
뒤늦게 마음이 급해진 프러너스가 부랴부랴 슈발럼을 겁박한 모양인데, 이 능구렁이는 그 시점부터 정치적인 의혹을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외압이 있었다는 걸 은근히 드러내며,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라도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선언도 했다.
그 낯 두꺼운 소리에 보기 드문 올곧음과 용기라며 그를 응원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방금 중간 점검을 위해 서머의 화원에서 접선한 슈발럼은 겉보기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소름 돋게도, 표정과 목소리, 태도와 말투마저 마치 정의로운 사람인 양 바뀌어 있는 게 아닌가!
내 앞에서 제대로 된 기자 행세를 하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나? 그래서 연기는 그만 하라고 했더니, 슈발럼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목소리를 착 가라앉히고 말했다.
「실례지만 뭐라고 하셨는지요, 레이디? 어떻게 하면 백성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을까 걱정하느라, 송구하게도 말씀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나는 서머가 내어 준 꽃차를 마시다가 하마터면 뿜을 뻔했다.
슈발럼의 가식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연극을 망칠 마음은 없었다.
자신의 신변을 지독하게 걱정해서 한 일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 덕분에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니까.
「이 마수 사업을 중단시키고 황제와 카를슈테인 공작을 반목하게 만드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하, 드물게 마음에 드는 계획이었다. 슈발럼의 입에서 저런 기특한 방안이 나오다니. 역시 뒷공작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이간책을 생각해 냈을 줄이야.
그렇게만 된다면 마수가 날뛸 일도 없어지고, 황제와 프러너스 둘이 알아서 서로를 할퀴고 물어뜯을 테니.
그러고 보면 프러너스는 굉장히 버거운 상대를 맞이한 셈이었다.
황제도, 슈발럼도 만만치 않으니. 하지만 프러너스 역시 몽펠리처럼 쉽게 무너질 위인은 아니었다.
정말이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흥미진진한 승부.
그런데 마수에 관한 비밀을 폭로하려던 계획이 그런 식으로 흘러가면 무고한 희생은 피할 수 있겠지만, 황위 탈환 계획에는 지장이 생기는 게 아닐까?
처음엔 그 점이 염려됐지만, 다시 생각하니 오히려 이쪽이 효과적일 것 같았다. 황제와 측근인 프러너스가 반목하면 그쪽의 전력은 크게 약화될 테니까.
거기다 슈발럼의 바람대로 이간책이 제대로 먹혀 황제가 몽펠리에 이어 자신의 오른팔인 프러너스마저 잘라 낸다면? 귀족들의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 모든 계략이 슈발럼의 머릿속에서 나왔으므로, 그의 뻔뻔하고 어이없는 변신도 참아야 하느니라.
그렇게 화원에서 잘 참은 것에 대한 보상인지, 숙소로 돌아와 보니 희고 몽글몽글한 솜꽃 한 다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꺾어 온 걸까? 설마, 다른 사람을 시킨 거겠지. 요즘 얼굴 보기도 힘들 만큼 바쁜 것 같은데.’
나는 솜꽃 다발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높이 들어 올려 햇빛에 비춰 보기도 했다.
‘달빛 아니라 햇빛 아래서 봐도 예쁘네. 그날 일이 미안했나? 바쁠 텐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쓰고……?’
나는 솜꽃을 감상하다 문득 감지한 인기척에 머리털이 쭈뼛 섰다. 지난 생에도 숙소에 곤란한 사람들이 무단 침입한 적이 몇 차례나 있었으니까.
‘고롱, 고로롱……? 이거 코 고는 소리 아니야?’
일단 급한 대로 근처에 있던 말 조각상을 손에 들었다. 소리를 따라 수상해 보이는 장의자로 살금살금 다가갔더니.
진이 팔짱을 낀 채 누워 있었다.
이 사람 정말, 좁은 데서 불편하게 자는 걸 좋아하네.
지난 생에 자객을 피해 열차 선반에서 잠을 청했던 일이 떠올라 웃음이 튀어나왔다.
나는 조각상을 내려놓고 잠든 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얼굴이 약간 수척해진 것 같네…….’
마음의 부담이 크겠지?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테고.
여기서 이렇게 잠들어 있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아, 나는 진을 깨우지 않기로 했다.
당신이 잠시라도 달콤한 도피를 할 수 있도록.
나에게도 그리운 얼굴을 실컷 눈에 담을 수 있는 기회였다. 이렇게 진의 축복받은 눈, 코, 입을 보고 있자니, 괜한 원망이 들었다.
그 혼전 순결만 고집하지 않았어도, 떠나기 전에 키스라도 한번 할 텐데.
안 돼. 아무리 진이라도 키스 하나로 유난을 떨진 않겠지만, 키스가 다른 스킨십이 되고, 하룻밤이 될 수 있는 거잖아.
물론 진이 아니라 나 자신을 못 믿겠다는 뜻이다.
그랬다간 진이 사라진 나를 찾으려고 온 세상을 다 뒤질지도 몰라.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번 생의 진은 지난 생의 진이 아니니 다를지도 모르잖아.
나에 대한 마음이 그만큼은 아닐 거야. 그래서 나를 안 찾는다고? 그건 그것대로 서운하네…….
혼자서 온갖 상상을 하며 설레발을 치고 있자니 조금 우습고 비참한 것 같았다.
얄미운 마음에 코라도 비틀고 싶지만, 자는 걸 건드렸다가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고.
아련한 눈빛을 보냈다가 인상을 썼다가, 혼자 그렇게 감상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가까스로 진에게 향하는 몸과 마음을 떼어 냈을 때였다.
“어어!”
내 몸을 끌어당기는 무언가에 이끌려 어딘가에 풀썩 떨어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눈앞에 진의 잿빛 눈이 있었다.
진이 나를 비좁은 장의자 위로 끌어당긴 모양이었다. 이번엔 왜? 진한테 손도 안 댔고 별짓 안 했는데? 구경만 좀 했을 뿐.
잠이 덜 깬 건가? 사람을 잡아당기고 보는 게 잠버릇인가? 진은 나와 이마를 맞댄 채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진이 내뱉는 삼나무 향 숨결이 내 윗입술을 간지럽혔다.
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내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조심스러운 그 손길은 점점 내 왼쪽 관자놀이로 향했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는 진도 나도 알고 있었다.
손바닥이 달아올랐다. 내 손바닥은 진의 가슴과 맞닿아 있었다. 뜨거운 것이 그의 가슴인지, 내 손바닥인지 알 수 없었다.
또한 알 수 없었다. 쿵쿵거리는 울림도 누구의 것인지.
“진, 또 히포의 매 발톱 마셨어요?”
안다. 최악의 대사라는 걸. 하지만 잠결에 사고를 치고 책임지겠다고 나오면 곤란하잖아.
진은 찬물을 들이켠 표정으로 헛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당신이 나한테 할 말이 많은 것 같던데?”
“……당연하죠. 남의 방에서 자고 있는데.”
내가 하는 짓을 보고 있었나? 눈이 다른 데도 달린 거야?
“로제트, 한 가지만 물어보지.”
진이 얼굴 사이의 거리를 조금 벌리더니 대뜸 물었다.
“전생의 나와 있었던 일을 모두 잊고 싶은 거야?”
“그건…… 아니에요.”
그럴 리가. 당신과 함께한 시간들이 내 전부인걸. 그것 말고는 내게 아무것도 없는걸.
“솔직히 당신 행동에는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좀 있어.”
“……그렇더라도, 그건 전부 다른 삶이잖아요! 전생에 나와 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그 일을 기억하고 싶은지 아닌지, 그건 이곳과 관계없는 일이잖아요.”
“얄미워서 그래.”
“……누가요?”
“당신이랑 친하고 잘 아는 그 인간. 전생의 진 시더우드.”
“……?”
“왠지 좋은 건 다 그 인간이 가져가고 나한테는 쭉정이만 남은 느낌이야.”
진의 볼멘소리가 당황스럽기도 하고 조금…… 귀엽기도 했다.
“무슨 말이에요? 당신은 무려 황위에 오를 사람이잖아요.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도 지켜 낼 거고요. 그보다 좋은 게 있어요?”
“흥, 황위야말로 쭉정이 중에서도 상 쭉정이지.”
“진, 아무래도 중압감이 큰가 봐요. 충분히 그럴 만하죠.”
“로제트, 하나 더 물어볼게. 전생의 그 인간도 엄살이 심했나? 겁이 많았어?”
“아…….”
진은 지금 두렵구나. 거사를 앞두고, 그 거사의 책임자로서 두려워하고 있구나. 누구에게도 온전히 털어놓을 수 없는 두려움 혹은 외로움의 무게.
진은 자신의 은밀한 두려움과 외로움을 드러낸 것이 부끄러웠는지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가장 안 좋은 건, 단순해질 수 없다는 거야. 몸과 마음이 따로 놀아 괴로운 게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이 두 개, 세 개, 네 개. 그런데 전부 진심이라는 게 사람 미치게 하지.”
무언가 고삐가 풀린 것처럼 진답지 않게 흥분해서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아요, 그런 마음. 누구보다 잘 알아요.
당신을 갖고 싶고, 당신을 놓고 싶고, 당신의 것이 되고 싶고, 당신에게서 달아나고 싶고, 당신이 나를 잊었으면 좋겠고, 잊지 않았으면 좋겠고, 당신이 나를 사랑했으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 모든 마음이 하나같이 진심이라서.
“그중에서도 당신.”
진이 나를 향해 미간을 찌푸렸다. 두 개의 잿빛 눈이 폭풍을 예고했다.
“로제트 당신을 향한 마음은 한 백 개쯤 될까. 전생의 그 자식 마음까지 합하면 이백 개도 넘을까?”
아아, 한계야. 더는 참을 수 없어. 내 눈가 맺힌 눈물이 점점이 진의 가슴 위로 떨어졌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괴로워야 하지? 서로를 위해? 서로를 위하려는 서로를 위해?
진이 내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훔치며 말했다.
“로제트, 부디 지금 이 순간은 내게 단순함을 허락해 줘.”
진이 내 왼쪽 관자놀이의 자주색 점에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