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화. 몸이 말을 안 들어 (89/110)


#89화. 몸이 말을 안 들어
2022.10.07.



 


“아가씨?”

“……으응?”

“몸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이건 저희한테 맡기고 쉬세요.”

시아가 버섯을 삶다 말고 내 안색을 살피더니 말했다.


“예예, 그러십시오. 얼굴이 수척하신데, 어디 아프신 건 아닙니까?”

버섯을 물에 헹군 뒤 탈탈 털어 물기를 제거하고 있던 뷰글라스도 걱정스런 목소리로 거들었다.


“정말 안 좋으시긴 한 것 같습니다. 오늘같이 더운 날, 그렇게 목에 스카프까지 두르신 걸 보면요. 으슬으슬 한기가 드십니까?”

작은 병들을 세척하고 있던 플록스도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이곳은 포션을 만드는 현장.

나와 시아, 뷰글라스, 플록스 네 사람은 페가수스의 주방을 점령하고 버섯으로 포션을 만드는 중이었다.

내가 계획한 황위 쟁탈전의 물밑 작업도 얼추 마무리됐고, 떠나기 전에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싶었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 지난 생에 하말린에서 본 ‘정령수’를 떠올린 나는, 내 대역도 끝나 한가해진 뷰글라스와 시아를 며칠 전 불러들였다.

하말린의 나비 계곡에 살던 정령사, 심령사, 치료사들은 ‘정령수’라는 걸 만들어 팔았다.

정령수는 각종 식물에서 얻은 영험한 수액으로, 원기 충전, 피로 회복, 피부 미용, 노화 방지 등, 안 통하는 데가 없는 영약이었다.

지난 생에 함께 하말린에 간 페가수스 직원들에게 여러 병 사서 나눠 주고 실컷 생색을 낸 일이 떠오른 것이다.

문제는 하말린에서 자라는 식물들 중 다수가 이곳에서는 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제국은 정령이 즐겨 찾는 땅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결국 버섯 헌터인 시아가 버섯만으로 포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버섯은 그 자체로도 다양한 이능이 있는 데다, 정령이나 마기, 주술 등 외부의 힘이 잘 깃들고 증폭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무나 버섯을 캐다 아무렇게나 포션을 만들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 우리에겐 최고의 버섯 전문가와 심령사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다량의 포션을 한 번에 제조하기 위해, 그리고 좀 더 진국을 만들기 위해 버섯을 솥에 넣고 끓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무래도 전투를 앞둔 병사들에게 나눠 줄 것이니 기분 전환이나 영양 보충 이상의 효과를 보게 하고 싶었다. 전투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말이다.

첫 번째로 약간의 독성을 지닌 뚠뚠 버섯을 끓여 면역력 강화 포션을 만들었다. 자잘한 질병으로 사기나 전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이 포션에는 해독 효과도 있었다.

다음으로 턱받이에 기분을 고조시키는 성분이 있는 술잔 버섯을 끓여 활력 강화 포션을 만드는 중이었는데.

내가 영 퀭한 몰골이자 함께 작업하던 이들이 보다 못해 쉴 것을 권한 것이다.


“그럴 순 없죠. 내가 벌여 놓은 일인데.”

기껏 부지런을 떨어 재료도 채취하고 도구와 장소도 마련하고, 이렇게 사람들까지 불러 모았는데.

전날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지는 바람에 기력이 딸리고 머리가 멍해 일에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요새 무리를 해서 그런가? 면역력이 좀 떨어졌나 봐요. 거기 포션 한 병 줘 봐요.”

“무리를 하셨군요.”

선물하려고 만들어 둔 포션을 가리키자, 플록스가 병을 건네며 내 상태를 주의 깊게 살피는 듯했다.

찔린다. 걱정해 주는 이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아아, 정말 어떡하지!’

내가 이렇게 맥을 못 추는 이유는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혀 계획에 없던.

서머의 화원에서 소영웅이 된 슈발럼과 울렁거리는 접선을 하고 숙소로 돌아왔더니, 지난 축제 때 아깝게 보지 못한 솜꽃이 한 다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솜꽃 다발을 숙소까지 가지고 온 남자도 무방비하고 매우 유혹적인 자태로 놓여 있었다.


「로제트, 부디 지금 이 순간은 내게 단순함을 허락해 줘.」

그 남자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그 순간, 그 말이 주문이 되어 우리는 백치가 된 듯했다. 모든 것을 하얗게 잊은 두 사람의 가슴속에 딱 하나 남은 마음이 얄궂게도 같았다.


‘지금 너를 갖고 평생 후회하겠어.’

우리는 배고픈 아기가 기를 쓰고 젖무덤을 파고드는 것처럼, 심연에 빠진 이가 가까스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밀고 게걸스럽게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오로지 한 가지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로제트.」

「진.」

「로제트.」

「진.」

서로의 이름만 백 번쯤 부른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로를 가진 후였다.

그러고도 동이 틀 때까지 정신을 못 차렸지만.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꼭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아름답고 좋아서.

그리고 이제야, 평생 후회하겠다던 그 결심의 첫발을 뗀 것 같다.

내가 지금 제대로 된 몰골이 아닌 건, 육체적으로 피곤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 혼란스러운 탓이 더 컸다.

아니, 철벽을 치며 혼전 순결을 고집하던 사람이 뭐 그렇게 쉽게 정조를 내어 준담?

진은 그렇다 치고, 분위기에 휩쓸려 간단히 넘어가 버린 나는 또 뭐람? 이래서 욕구를 너무 참으면 더 큰 사고를 부르게 되는 걸까.

어쨌든…… 어떡하지!


“시아, 그거 다 됐으면 한번 줘 봐요. 맛 좀 보게.”

나는 일단 살고 봐야겠다는 생각에 방금 막 완성한 활력 강화 포션에 눈독을 들였다.

이런 말 하긴 좀 민망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 보니 이 진이 그 진이라는 걸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나에 대한 기억이 없을 뿐, 다른 건 기가 막힐 정도로 일치했으니까.

작고 은밀한 버릇 하나까지도 같아서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기분이 됐다.

밤새 사람 잠을 안 재우는 것도 똑같아서, 온몸이 으스러질 것 같고.

이제는 나에 대한 기억이 없다고 말하기도 부적절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 같기도 하고.

아, 정말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떡하긴 뭘 어떡해. 이렇게 된 이상, 더 완벽하게 감쪽같이 사라져야지. 진과 나 사이에 미련을 가질 만한 것들이 더 생겨 버렸으니.


“그 면역력이랑 활력 포션 한 병씩 더 줘 봐요. 방금 만들기 시작한 건 근력 강화 포션이라고 했나요?”

나는 포션들을 향해 탐욕스럽게 손을 뻗쳤다.

아는 이 없는 황량한 곳에서 모든 인연을 끊고,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살아가려면 이렇게 나약해서는 안 된다.

좋다는 건 다 먹고 튼튼해져야지. 몸도, 마음도 꿋꿋하고 강인해지도록. 몸이 비실비실하면 마음도 약해지는 법.

게다가 오랫동안 흑마술에 당해서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겠지. 불임이 될 정도면 다른 데라고 성하겠어? 혼자 앓다 보면 마음이 약해질지도 몰라.


“저, 레이디,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드시면 좋지 않습니다. 차라리 하루 한 병씩 꾸준히 드시는 게 좋지요.”

“기력이 많이 달리시나요? 그렇다면 아가씨께 맞는 포션을 따로 준비해 보겠습니다.”

뷰글라스와 시아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앞에 줄을 선 포션의 흔적이. 언제 이렇게나 마신 거지?


“아, 이런 미안해요. 선물한다고 해 놓고 내가 다 마셨네.”

정신 차려, 로제트. 동침 한 번으로 벌써부터 이렇게 결심이 흔들리다니. 안 돼, 독해져야 해.


 


“저기 말이죠, 사랑하니까 떠난다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조금 뜬금없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감해 주는 말을 들으면 용기가 날 것 같아서 물었다. 용기 포션이 필요하다고 할까.


“헛소리라고 생각합니다.”

플록스가 숨도 쉬지 않고 곧장 대답하더니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십니까?”

“그냥…… 연인 간의 속사정이란 다양하지 않나 해서…….”

“사정이 있어도 다른 사람 눈만 속이면 되지요. 가명이나 가짜 신분을 쓰거나 연인이나 부부가 아닌 척 연기하거나.”

“음, 그렇긴 하지만, 상대방이 더 잘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그럴 수도…….”

“상대방을 생각하면 더욱 그럴 수는 없지요. 피 말려 죽이려는 거 아닙니까. 절대, 절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아, 알았어요.”

술도 안 마셨는데 플록스가 평소와 다르게 무섭게 나오는 통에 용기를 얻기는커녕 마음이 더 뒤숭숭해졌다.

내가 사라지면 진은 많이 괴로워할까. 아무 일도 없는 사이일 때보다는 조금은 더 괴롭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진도 결국 삶이 결심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받아들이게 될 테지.

처음 가졌던 결심을 바꾸고, 의지를 꺾고, 가치가 퇴색되는 걸 목격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것. 그런 게 인생이겠지.

갑자기 요란하게 울린 탈라리아 메신저의 신호음 덕분에 나는 화들짝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플록스가 탈라리아 메신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방금까지 약간 긴장해 있던 그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좋은 소식일까?


“드디어 황제와 공작이 갈라섰군요.”

슈발럼의 이간책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플록스가 전한 소식은 이러했다.

마수와 관련한 제국민들의 원성이 높아지고, 슈발럼의 기사가 귀족들의 부패에 대해 들쑤시자 황제도 더는 모른 척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황실 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착수한 결과, 카를슈테인 공작이 애견 사업을 추진하다 실책을 저지른 정황이 파악됐다는 것.

좀 더 우수한 견종을 만들기 위해 무리하게 불법적인 실험을 자행했고, 그 과정에서 괴생명체가 태어났다는 해명이었다.

이 일은 카를슈테인 공작이 독단적으로 강행한 일로, 황제는 전혀 알지 못한 사실이라고.

공작은 업무상 과실로 징계 처분을 받았고, 직접 귀족 회의와 관료 회의에서 사과문을 발표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는 내용이었다.

징계의 내용이 엄하진 않았지만, 자존심 강하고 대외적인 이미지를 중시하는 프러너스에겐 매우 굴욕적인 일일 것이다. 그는 결코 이 일을 그냥 넘길 사람이 아니었다.

물론 황제와 프러너스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오갔겠지만, 균열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가 꼬리 자르기를 내색한 순간, 프러너스는 황제의 배신에 철저한 대비책을 세우기 시작했을 테니.

어쨌든 마지막으로 기다리던 소식이 당도한 셈이었다.

귀족들 사이에 불안감과 황제에 대한 공포심을 키워 진을 지지하는 가문을 늘리는 것.

마수 육성 음모를 제국민에게 폭로해 황제와 프러너스의 황권 강화 계략을 무산시키고, 둘을 반목하게 만드는 것.

북부 왕국의 마도구, 보호구를 들여와 황위 쟁탈전에 참전하는 이들의 희생을 최대한 막는 것.

내가 하려던 일이 모두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이제 내게 남은 일은, 아프지만 아름다운 마무리. 그리고 참전한 이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일이다.

.
.
.



“로제트, 당신은 참 신기해.”

마무리를 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또 진과 한 침대에…….

분명 한 번만 단순함을 허락해 달라고 한 것 같은데. 진은 그냥 앞으로도 죽 단순해지기로 한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침대 안으로 끌어당겼으니.


“당신은 참 신기해. 내가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것과 전부 달라. 감촉도, 향기도.”

진이 손으로 내 뺨을 감싸며 눈을 맞춰 왔다.

상상을 어떻게 한 것인지. 나는 당신이 내가 알던 사람과 한 치의 다름도 없어서 놀라는 중인데.


“진, 이제 곧 거사가 시작될 텐데…….”

“그러니까 당신을 하루라도 더 안고 싶어. 곧 아무도 모를 곳에 꽁꽁 숨겨 놔야 할 테니. 적어도 헤어져 있기 전에 당신에게 익숙해져야지.”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진은 나를 안은 팔에 힘을 실었다.


“걱정 마. 금방 끝낼 테니. 당신을 위해서라도.”

“다치지 마, 진.”

“로제트,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뭔데?”

“당신은 이것 하나만 약속해. 절대 나를 두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늘 거기 있어 주겠다고.”

아아, 당신은 왜.

나를 또 이렇게 울게 만드는 건데.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어째서 내게 바라는 건 지난 생이나 이번 생이나 한결같은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