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해돋이를 싫어했던
(90/110)
90화. 해돋이를 싫어했던
(90/110)
#90화. 해돋이를 싫어했던
2022.10.10.
꿈에서 진을 보았다.
어느 쪽 진인지 잠시 헷갈렸지만, 꿈에서 깬 지금은 오히려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숲을 거닐었다. 잔뜩 돋아난 버섯들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수런수런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아무래도 버섯들 사이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니, 그동안 나와 진이 나누었던 대화 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진이 멈춰 서더니 내게 무언가 말했다. 입술만 움직일 뿐 음성이 들리지 않았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의 입술이 다시 한번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들리지 않는 진의 목소리를 눈으로 읽기 위해 그 입 모양에 온통 집중했다.
보랏빛 나비 몇 마리가 춤추듯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진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눈부신 황금빛 미소, 햇살 같은 미소.
평소의 진과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미소였다. 그는 늘 달빛 같고 산 그림자 같았던 사람인데.
아름답고 결연하면서도 가여운 사람.
그가 건네는 눈부신 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이상하게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가슴이 아렸다.
그것은 작별 인사였다.
* * *
“로제트?”
귓가에 나직하게 내려앉는 익숙한 음성.
진이 내 목덜미에 방금 나를 불렀던 입술을 묻으며 내 몸을 가둔 팔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가녀린 빛을 보니 아직 이른 새벽이었다. 이 시간에 나를 이토록 유혹적인 목소리로 부른다는 것은.
간밤에 꾼 꿈 때문에 진작 깨어 있었지만, 나는 잠든 척했다.
지금은 도저히 당신의 욕망에 응할 마음의 준비가……. 그러니까 간밤에 그런 꿈을 꾸고서는 도저히……. 나는 방금 남편을 잃었단 말이에요!
내가 꿈쩍 않고 누워 있자, 진이 내 뒤통수를 다정하게 쓰다듬더니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로제트, 깨어 있는 거 알고 있어.”
살짝 웃은 듯도?
“으……으응…….”
“민망하면 방금 깬 걸로 해 줄게.”
나는 결국 팔꿈치로 진의 배를 가격할 수밖에 없었다.
“윽, 새벽부터 기운이 넘치는데? 최근에 포션을 많이 먹었다더니. 그렇다면 오늘이 바로 그날이군. 같이…….”
“안 돼. 그럴 기분 아니야.”
“왜? 어디 아파? 아니면 이른 시간에 움직이는 걸 안 좋아하나?”
“그럼, 안 아프겠어?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 마음이 아프다고. 취향 문제가 아니라.”
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말을 곱씹는 듯하더니 물었다.
“해돋이 보는 게 영 취향에 안 맞는다는 말은 아니지? 다만 지금 마음이 아파서 뭔가를 할 기분이 안 난다는 뜻?”
“……해돋이?”
“오늘 바다 날씨가 괜찮을 거라고 해서, 같이 해돋이 보러 가고 싶었는데. 동부 해변이라 해돋이가 볼만하거든.”
“…….”
이런 착각, 꼭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해명해 두고 싶다. 진이 그동안 나를 새벽마다 괴롭혔기 때문에, 나는 생각이 그쪽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그런데 마음이 왜 아픈 거야?”
“모르겠어…… 좋아도, 안 좋아도 마음이 아파.”
행복도, 불행도 모두 내 것이 아닌 것 같다고 할까. 뿌리 없이 떠도는 이방인이 된 느낌. 가슴 한쪽이 뻥 뚫린 느낌.
진이 나를 끌어당겨 안아 주었다. 삼나무 향이 뻥 뚫린 구멍에 스르르 깃들었다.
“마음이 안 좋을수록 햇볕을 쬐는 게 좋다던데?”
진의 집요한 제안에 나는 피식 웃었다.
“실은 나도 해돋이 같은 거 안 좋아해. 보고 싶지도 않았고, 일부러 보러 간 적도 없지. 황금빛 찬란한 미래라니, 정말 부담스럽잖아.”
“그런데 왜 갑자기 보고 싶어진 거야?”
“당신과 함께라면 좀 다를 거 같아서.”
아아, 진. 왜 자꾸 이러는 거야? 마치 내가 당신에게서 달아나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절대로 사라지지 말라는 듯이.
“솔직히 당신은 태양이 어울려. 그 밀밭 같은 머리칼도, 올리브색 눈동자도. 환한 햇살 아래서 더욱 찬란해지지.”
“좋아하지 않으면서, 나 때문에 가는 거야?”
“모르지, 이제부터 좋아질지도. 해돋이도, 황금빛 미래도.”
“보러 가자, 해돋이.”
그렇게 해서 우리는 진이 미리 봐 둔, 전망 좋은 해안가 언덕에 다다랐다.
하늘과 바다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낮과 밤의 경계에 서 있는 등대의 불빛이 아직도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배들이 정박된 항구는 벌써부터 분주해 보였다.
슬금슬금 애를 태우던 불덩이가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아름답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진은 나를 위해 해돋이를 보러 왔다지만, 실은 나도 해돋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진의 말처럼 그 황금빛 찬란한 자태가 부담스러웠고, 감히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진과 함께 보니 괜찮은 것 같았다.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찬란함이지만, 둘이서 마주하니 그 빛과 열기가 온화하게 느껴졌다. 진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인 걸까?
“로제트, 당신은 알고 있지? 나한테 처음은 곧 마지막이라는 거.”
이런, 방심하고 있었는데, 설마 해돋이 청혼인 거야?
로제트 앰브로시아, 이 눈치 없는 것! 너 정말 도망칠 마음이 있긴 한 거니?
“지금은 내가 영원히 당신 것이 됐다는 말밖에는 못 하겠어. 물론 반품 불가야. 그 이상의 약속은 당신한테 족쇄가 될까 봐. 황위 탈환에 실패할지도 모르고.”
“안 돼, 실패 불가야. 무조건 황제가 돼. 안 그럼 다시는 안 볼 거야.”
물론 거짓말이지만. 황제가 되면 더더욱 안 볼 거지만.
내 말에 진이 픽 웃었다.
“그래, 황제가 못 되면 어차피 다시는 당신을 못 보겠지. 그러니까 당신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성공할게. 그때, 해돋이에 어울리는 사람이 됐을 때, 당신에게 청혼하겠어. 기다려 줘.”
* * *
반란군은 마지막 출전 준비를, 나는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진은 내가 하말린으로 가기를 바랐지만, 나는 다른 곳을 고집했다.
물론 기후도 좋고 자연도 아름답고 사람들도 따뜻한 하말린으로 가고 싶은 마음도 컸다.
내가 좋아하는 버섯도 가득하고, 호탕한 모얌 왕녀를 다시 만나고 싶기도 하고. 외롭지 않게 지낼 수 있을 테지.
무엇보다 진과 나의 추억이 가득한 곳이기도 하고.
하지만 나는 여러 고민 끝에 북부 왕국으로 가기로 했다.
하말린으로 가면 무엇보다 진의 정보망을 피해 달아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모얌 왕녀의 오지랖 스케일을 생각했을 때, 이번 생에 처음 만난 나에게도 성심을 다하겠지. 그 외에도 그곳엔 진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또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것도 큰 장애 요소였다. 다른 곳으로 감쪽같이 사라지기가 매우 힘든 환경이었다.
거기에 가능하면 하말린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지난 생에 진이 자신을 환대하는 하말린에 정착하지 못했던 것과 같은 이유로.
이제 그곳은 그저 정령의 축복을 받은, 신비롭고 풍요로운 땅이 아니었다. 내가 아끼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특별하고 소중한 곳이었다.
그렇기에 하말린이 또다시 제국의 탐욕과 폭력에 휩쓸리지 않기를 바랐다.
반면 북부 왕국은 제국 귀족들도 쥐락펴락하는 무시무시한 악녀 레이디 페가 공동 군주로 있는 곳이었다.
군사력도 막강하고 마정석 매장량도 풍부하며, 마법식을 다루는 기술도 독보적이라 제국도 감히 건드리지 못한다니, 피해를 끼치지 않고 몸을 숨기기에 든든해 보였다.
대륙으로 연결된 곳이니 여차하면 이쪽저쪽으로 달아나기 좋았고, 자연환경이 험준하고 척박해서 깊은 산속은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렵다고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노리는 바가 있었다. 레이디 페는 영민한 사업가이기도 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한 레이디 페의 사업 노하우를 현지에서 배우고 싶었다.
지난번 북부 왕국 출신인 밤비를 통해 마도구를 구입하면서, 뜻하지 않게 레이디 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때 그녀를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내 가슴속에 싹튼 것 같다.
레이디 페는 다른 사람이 가진 가치를 찾아내는 눈이 있다는데, 혹시 내 쓸모도 찾아 주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도 생겼고.
이렇게 나름 여러 방면으로 득실을 따져서 피신처를 북부 왕국으로 정한 것이다.
“오늘도 포션을 열심히 드시네요? 선물용 반, 시식용 반이었습니다.”
포션 작업 마지막 날, 강심장 포션과 근력 강화 포션을 부지런히 들이켜는 내게 뷰글라스가 말했다.
행선지를 북부 왕국으로 결정한 후로 포션을 더 열심히 챙겨 먹었다.
그곳 기후나 환경이 매우 혹독하다고 들었기에 낯선 곳에서 골골대지 않으려면 몸을 좀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게다가 잇달아 마셨더니 중독이라도 된 건지, 마치 내 안에 포션 마시는 하마가 들어 있는 것처럼 자꾸만 포션이 당겼다.
시아 말로는 중독성은 없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시아에게 포션 만드는 법을 배워서, 북부에 가서도 몸이 으슬으슬할 때 달여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저, 레이디, 제가 들은 이야기가 있는데요.”
플록스가 뜬금없이 심각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저기 저쪽 멀리에 앙갈 왕국이라고 있잖습니까.”
“그런 데가 있어요?”
“예, 있었습니다. 그런데 없어졌습니다.”
“뭐예요? 요즘 유행하는 우스갯소리인가요? 플록스 경도 참, 굉장히 썰렁하네요. 어휴 추워, 포션 좀 더 줘 봐요.”
내 반응에 플록스는 정색을 하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우스갯소리가 아닙니다! 실화입니다, 실화.”
“아, 알았어요. 있었는데 사라진 앙갈 왕국.”
“왜 사라졌는지 아십니까? 그곳 왕이 스스로 멸망을 자초한 겁니다.”
“아니, 왜요?”
“왕이 사랑했던 여인이 어느 날 사라져 버렸거든요. 사실 그녀는 정적의 협박을 받았던 것이고요. 왕의 안위를 위해 마음이 식은 것처럼 서신을 남기고 여인은 떠났습니다.”
나 대신 뷰글라스가 격한 반응을 보이며 추임새를 넣었다.
“아이구, 저런, 딱하네. 몹쓸 것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왕은 그때부터 정사도 팽개친 채 그 여인을 찾는 데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깊은 사랑이 깊은 증오가 되어 그녀를 찾아내 죽이겠다면서요.”
“아이구, 그 양반,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극단적이다.”
“결국 그 여인은 왕의 검에 목숨을 잃게 됩니다. 왕은 여인이 죽은 후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지요. 그녀가 자신을 위해 울면서 떠났다는 것을요. 완전히 미쳐 버린 왕은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왕국을 피바다로 만듭니다.”
이야기를 마친 플록스는 결연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뭐가 그렇습니까? 이 이야기를, 이토록 진지하게 하는 이유는 대체…….
“뜬금없이 별로 재미도 없고 유쾌하지도 않은 얘길 왜 하시는 겁니까? 게다가 어디서 들어 본 옛날이야기 같아서 신선한 맛도 없고.”
잠자코 듣던 시아가 내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글쎄요, 갑자기 이 이야기가 생각나더라고요. 재미있어하실 줄 알았는데. 하하, 하하하.”
플록스가 어색하게 웃어 젖혔다.
플록스…… 누구보다 진심이지만 조금 어설픈 플록스. 좋은 사람.
이번 생에도 진을 잘 부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