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1화. 오지 않을 날 (91/110)


#91화. 오지 않을 날
2022.10.14.



‘한스, 자두 쿠키 만드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 주면 고맙겠어요. 창고에 있는 자두 잼도 넉넉히 보내 주고요. 나는 잘 지내니 다들 걱정 말라고 전해 줘요.’

나는 토버마리의 플럼 하우스로 은밀하게 서신을 보냈다.

북부 왕국으로 가기 전, 토버마리로 돌아가 정든 이들에게 인사도 하고 자두 쿠키 만드는 법도 직접 배워 오고 싶지만.

나, 레이디 앰브로시아는 행방이 묘연한 상태이니.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황제의 암살단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됐다고도 하고, 카를슈테인 공작의 애견 실험에 희생됐다고도 하고, 당시 습격을 피해 도망가다 숲에서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고도 하고, 시체가 계곡을 타고 떠내려가 한참 먼 마을에서 발견되었다고도…….

그러므로 플럼 하우스 주변엔 얼씬도 할 수 없는 상황.


“그럼 부탁해, 앤.”

“저만 믿으세요, 레이디. 쿠키 만드는 법도 요리사님께 직접 전수받아 오겠습니다. 레이디는 요리를 못하시잖아요?”

서신을 전하는 일과 레시피와 잼을 받아 오는 일은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는 앤에게 부탁했다.

앤은 토버마리 소작농의 딸로, 매우 영특하고 일솜씨가 야무진 아가씨였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당차고 생활력도 강했다.

지난 생에 평민인 앤을 칼리지에 입학시키느라 버섯 부인이란 남사스런 별호까지 얻어 가며 한바탕 난리를 치렀던지라, 이번 생엔 되돌아오자마자 이혼 준비를 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앤의 입학을 위해 손을 써 두었다.

아직 공작부인일 때, 그 지위를 이용해서 말이다.

덕분에 앤은 무리 없이 제도에 있는 칼리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번에도 밤비에게 후견 대리인을 부탁했더니, 앤은 수업을 듣는 틈틈이 살롱에서 잔심부름까지 했다고 한다. 물론 수고비를 받고.

밤비가 마도구 구입 때문에 그리치에 와 있었던 데다, 앤도 마침 방학을 맞아 고향 집으로 가는 길이었기에 인사차 들른 참이었다.

내가 뜬금없이 자두 쿠키 타령을 하는 덴 이유가 있었다.

북부 왕국으로 가기 전 밤비에게 그곳 사정을 듣고 이것저것 도움말을 구하던 중,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그곳의 공동 군주인 레이디 페가 맛있는 음식, 그중에서도 빵, 과자, 케이크 같은 달콤한 디저트에 약하다는 사실.

냉혹한 악녀로 알려진 레이디 페가 아이처럼 단 군것질거리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언뜻 믿기지 않았지만.

여하튼 맛있는 음식을 향한 그녀의 애정은 진심이어서, 솜씨는 좋으나 지나치게 수줍고 과묵한 탓에 무명이었던 파티시에를 발탁해 일약 유명인사로 만든 일화는 꽤 알려진 것이라고.

물론 레이디 페는 사업의 귀재답게, 음식에 대한 애정도 개인적인 애호에 그치지 않고 식품 사업으로 승화시켰다고 한다.


“연중 녹지 않는 북부의 설빙에다 농가마다 내려오는 비법 시럽 31개를 골라 얹어 먹는 ‘얼음 여왕의 궁전’, 빵 반죽을 천 번 치대서 천상의 쫄깃함을 선사하는 ‘천타빵’, 북부 기사들이 행운의 부적으로 몸에 지니고 다니는 말편자 모양의 빵 ‘럭키추 말편자’까지, 대박이 난 상품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밤비가 숨도 안 쉬고 늘어놓는 자랑을 들어 보니, 과연 나도 먹어 본 적이 있는 유명한 음식들이었다.


“상품뿐만이 아닙니다. 레이디 페는 상품과 연관된 문화를 함께 만들어 유행시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죠. ‘하루에 딱 백 개만 파는 한정판’이라든가 ‘줄 서서 먹는 가게’ 같은 식문화도 레이디 페가 원조입니다.”

아무튼 레이디 페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레이디 페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방법이 달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거 아닌가.

더욱이 북부는 요리나 미용, 예술 등 향락과 관련된 문화를 원래 등한시했다고 한다.

레이디 페가 북부로 가면서 분위기가 꽤 바뀌었다지만, 사치와 향락에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제국을 어찌 따라가겠는가.


‘새콤달콤한 디저트 하면 우리 가문의 자랑, 자두 쿠키가 있잖아?’

생각해 보니 혈혈단신으로 낯선 나라에 가면서 믿을 만한 무기 하나쯤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문제는 나도 먹을 줄만 알았지, 만들어 본 적은 없다는 것.

자두 쿠키뿐 아니라 요리라곤 차 우리는 것밖에 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요리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지난 생에 하말린에서 결혼식 때 내놓으려고 자두 쿠키 만들기에 도전한 적이 있지만, 그때도 사실 페가수스 시동생들이 거의 다 해 준 셈이었고.

눈치 빠른 앤이 만드는 법을 직접 배워 온다니, 열심히 연습하면 아무리 요리에 젬병인 나라도 쿠키 하나쯤은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여차하면 사용할 비장의 무기를 마련한다는 의미 외에도, 내가 자두 쿠키 만드는 법을 익히고 싶은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진의 꿈은 원래 과자 가게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지난 생에 처음 기차에서 만났을 때 해결사가 되는 게 어릴 적 꿈이었냐고 내가 비꼬자, 진이 저런 대답을 해서 나를 무안하게 만들었지.

이제 진은 황제가 되어야 해서, 그 꿈은 이룰 수 없게 되었다.

낯선 땅,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쿠키를 구워 팔며 내가 대신 그의 꿈을 이뤄 주고 싶은 마음.

멀리서 그를 그리워하며 그렇게 그가 꿈꾸던 삶을 살아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쩌면 몰랐던 소질을 발견할지도 모르고.

레이디 페를 흉내 내 쿠키 이름을 ‘윙크 자두 쿠키’라고 그럴듯하게 짓고, 먹으면 누구라도 윙크가 절로 나오는 신기한 쿠키라고 홍보도 하는 거야.

쿠키를 먹고도 윙크를 참을 수 있는 사람에겐 쿠키 값을 받지 않는다는, 도전 이벤트도 하는 거지.

그러다 입소문이 나 레이디 페와도 친해지고, 함께 사업 구상도 주고받고…….


 

.
.
.

참, 이상하네.

베이킹은 재료, 계량, 순서만 정확히 지키면 실패할 수가 없다고, 그래서 다른 요리보다 비교적 손쉽다고, 솜씨나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도 그런대로 맛을 낼 수 있다고 들었는데.


‘내가 만든 건 왜 이런데?’

나는 내가 만든 쿠키와 앤이 만든 쿠키를 번갈아 보며 생각했다.


“레이디, 제가 못 본 사이에 뭔가를 하셨나요? 이상한 걸 집어넣으셨다거나.”

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역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무것도.”

“와, 참, 이건 뭐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굳이 말 안 해도 알고 있어.”

“외람되지만 저희 사이에선 이런 걸 ‘똥손’이라고 하는데 말이지요. 이런 경우 가만히 있는 게 돕는 거라고도 하지요.”

“…….”

연습, 수없이 연습하면 똥손도 나아지지 않을까?


“참고로 음식 맛이 어설플 시, 레이디 페의 불호령을 들을 각오를 하셔야 합니다. 감옥 가실 수도 있어요. 그만큼 맛에 까다롭고 진심이시거든요.”

밤비가 곁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작은 희망마저 꺾어 버렸다.

그렇다고 요리사 한스를 북부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떡한다?


“저, 레이디…….”

자두 쿠키 패를 포기해야 하나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북부에 계신 동안, 제가 레이디를 모시면 안 될까요?”

“응? 무슨 소리야? 칼리지는 어쩌고? 북부에 얼마나 오래 있게 될지 알 수 없어.”

앤의 갑작스런 청원에 나는 놀라서 물었다.


“평민이 가기 힘든 곳이라는 생각에 칼리지에 지나친 환상을 품었나 봐요. 주제도 모르고 허영심에 들떴는지도 모르죠.”

“막상 들어 보니 수업 내용이 기대에 못 미쳤니? 하긴 칼리지나 아카데미는 사람을 사귀고 인맥을 만들기 위해 간다고도 하지.”

후미진 시골 평민 출신인 앤과 친분을 맺으려는, 보석을 알아볼 줄 아는 이가 그곳에 그리 많지는 않으리라.


“죄송합니다, 레이디. 입학할 수 있게 애써 주시고 후원도 해 주셨는데.”

맞아. 지난 생에 내가 너 입학시키느라 별별 고초를 다 겪으며 생고생을 했는데 말이야.


“마담 밤비께 들으니 북부 왕국에선 신분이나 출신을 차별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대접해 준다고 합니다. 또 레이디 페의 유모였던 마사 부인이 세운 학교는 어떠한 자격 제한 없이 학생을 받아 주는데, 수업 내용도 훌륭하다고 해요.”

앤은 그곳에서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사업 노하우도 배우고 싶다고 했다.

내가 생각해도 앤이라면 잘해 낼 것 같았다. 어쩌면 나보다 훨씬 더 그곳에 어울리는 사람인지도.

당장 쿠키를 구우려면 앤이 필요하기도 하고.

사실 몇몇 사람이 함께 갈 뜻을 비치기도 했지만, 나는 누구와도 함께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페가수스의 길드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밤비나 뷰글라스, 시아 부부도 나보다는 진에게 더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지닌 능력은 진이 황위를 탈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게 분명했다.

또 감쪽같이 몸을 숨기려면 혼자인 게 편했다. 행여 죄 없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문책을 당하면 곤란하니까.

그랬는데, 앤이 함께 가 준다면 든든할 것 같긴 했다. 아직 어린 아가씨이니 내가 사라지더라도 책임을 추궁당하진 않을 듯하고.

생각해 보니 황위 쟁탈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제도의 학교들은 임시 휴교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기도 했다.


“앤, 너 지금 엄청난 골칫거리를 떠안은 거야.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없다? 웃을 일이 아니라니까.”

 

* * *

플럼 하우스에서 가지고 온 윙크 자두 잼 수십 병, 시아가 만들어 준 포션, 버섯 도감과 화구 그리고 앤.

나와 함께 북부 왕국으로 떠날 아이들이다.


“열차는 사람들 눈에 쉽게 띌 테니 개인 마차로 가나요? 북부 끝까지 가려면 한참 걸리겠네요.”

내 말에 밤비가 웃으며 말했다.


“북부 왕국은 마정석 보유량도 상당하고 마법식 연구도 발달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나요? 이동 마법을 이용해서 갈 겁니다. 자국민에겐 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수 있는 티켓을 주거든요.”

와, 부국 스케일!

밤비는 나와 앤을 북부 왕국으로 보내는 데 자기 몫의 티켓을 쾌척했다. 아무리 자국민이라 해도 티켓을 무한정 제공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이동 마법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 제국에선 중요한 원정을 나갈 때가 아니면 황제도 쉽게 쓰지 못했다.

나와 앤은 밤비의 배웅을 받으며 조용히 떠났다.

우선 마차를 타고 울퉁불퉁한 바위들에 가려진 인적 없는 해변으로 이동했다. 이동 마법진을 사용할 때 주변의 시공간이 잘못 뒤틀릴 수도 있어 안전한 장소를 물색한 것이다.

작별 인사는 전날 모두 해 두었다.

플록스가 또 어디서 주워들었다는, 도망친 황태자비와 미쳐서 살인귀가 된 황태자 이야기를 다급히 꺼내려고 하기에, 아주 오랜만에 하말린 전통 호신술을 써 보았다.

실력이 녹슬지 않아 다행이었다.

시아는 그런 실력을 여태 숨기고 있었느냐며, 뜻하게 않게 재회한 모국의 전통 무예에 몹시 반가워했다.

간밤엔 진의 얼굴을 밤새 구석구석 내 눈에 담았다. 보고 또 봐도 물리지 않고, 볼 때마다 새로웠다.

너무 오래 함께해서, 서로의 얼굴에 무감해지는 그런 날이 우리에게는 오지 않겠지.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더 이상 특별해 보이지 않고, 그 눈빛에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고, 그가 미남은커녕 평범한 남자로도 보이지 않는 그런 날이.

과거만 많고 미래는 없는 관계.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애달프고 아름답게 기억되는 관계.

보통은 그걸 첫사랑이라 부르는데…….

진은 헤어지기 전 내 등에 얼굴을 묻고 말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게.」

마침내 밤비가 티켓을 찢자 이동 마법진이 생겨났다. 말을 떼어 낸 마차가 나와 앤을 태운 채, 마법진 안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안녕, 진.

안녕, 나에게 기쁨과 슬픔을 주었던 땅이여.

안녕, 로제트 앰브로시아, 부끄럽고 안쓰러운 나의 과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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