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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화. 북부의 맛 (92/110)


#92화. 북부의 맛
2022.10.17.


새로운 각오를 다지며 북부 왕국에 도착한 이후, 내가 지난 열흘 동안 한 일은 오로지.

시름시름 앓은 것이다.

긴장한 탓일까,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몸이 좋지 않았다. 현기증이 나고 속도 울렁거렸다.

처음엔 이동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난생처음 경험한 이동 마법에 나뿐 아니라 앤도 멀미 증세를 보였으니까.

앤은 몇 시간 지나자 금방 호전됐고, 나는 후유증이 며칠을 갔다는 것이 다르지만.

평소 마차 멀미가 심한 편도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마법이 체질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속이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두통에 근육통까지 왔다.

이동 마법 후유증이 가라앉은 후에도 계속 기운이 없고 몸이 좋지 않았다. 북부의 풍토가 나와 맞지 않는 것일까?

아직 여름인데, 이래서야 혹독하다는 북부의 겨울을 어떻게 날지.

내가 골골거리며 침대 신세를 지는 통에 고생은 고스란히 앤의 몫이었다. 입국 수속, 이민자 등록, 앞으로 지낼 거처를 구하는 일 등등.

얼른 털고 일어나고 싶어 시아가 만들어 준 포션을 악착같이 마셔 댔는데도 이상하게 몸이 자꾸만 가라앉았다.

잠은 또 얼마나 쏟아지는지, 고양이도 아닌데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곤 했다.

무엇보다 고역인 것은 내 속이 망가진 건지, 이곳 식재료가 입에 맞지 않는 건지, 아니면 무슨 병에라도 걸린 건지,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나마 바리바리 싸 가지고 온 윙크 자두 잼이 새콤달콤하니 입에 익숙해서, 잼을 범벅한 빵 조각으로 연명하다시피 했다. 음, 역시 고향의 맛이야.

거처는 앤이 입학할 것을 고려해 학교 근처 동네에 구했다. 정원이 딸린 자그마한 단층집이었다.

왕도와도 그리 멀지 않고, 세계 각지에서 온 유학생들이며 외국인이 많은 지역이라 분위기도 비교적 자유롭고 개방적인 편이라고.

북부는 기후나 지형이 험한 데다 오랫동안 외부와의 왕래가 많지 않았던 지역이라, 사람들의 기질이 무뚝뚝하고 직선적이라고 했다. 폐쇄적이고 텃세가 심하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겉모습이 그래 보일 뿐, 의외로 수줍음이 많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라는 게 밤비의 설명이었다.

가식이 없고 우직하며 정이 깊고, 한번 인연을 맺으면 끝까지 의리를 지킨다고.

아마 꼭 밤비 같은 사람들이겠지.


“레이디, 몸은 좀 어떠세요? 오늘은 자두 쿠키를 구워 보았는데 맛 좀 봐 주십시오. 그간 바빠서 통 손을 못 대다가 오늘에야 솜씨를 발휘해 보네요.”

앤은 축 늘어져 있는 나를 위해 일부러 명랑한 목소리로 분위기를 돋우며 갓 구운 쿠키를 내밀었다.

그냥 쿠키도 맛있지만, 오븐에서 갓 꺼낸 쿠키는 더더더 맛있지.

추억의 맛과 향이 듬뿍 담긴 자두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자 요상하게도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앤, 눈물이 날 만큼 맛있다.”

몸이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지는 걸까.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려는데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몸 때문에 속상하기도 했다.

혹시 이번 생의 결말은 지금까지와 다르게 병사하는 건가? 독살, 암살 등 타살이나 사고사는 겪어 봤어도 병사는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이렇게 허망하게 갈 줄 알았으면 그냥 진의 곁에 있을 걸 그랬나? 괜히 이것저것 골치 아프게 따지며 그를 일부러 밀어내지 않고, 온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원 없이 함께…….

낯선 곳에서 쓸쓸히 앓고 있자니 별별 우울한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점령했다.


 
그렇게 눈물의 쿠키를 삼키고 있는데, 누군가 현관문의 노커를 탕탕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다닥 현관으로 나갔던 앤이 낯선 남자와 함께 돌아왔다.


“레이디, 왕국 행정부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앤이 고하는 말이 끝나자, 키가 크고 체격이 호리호리한 남자가 인사했다.

설산을 닮은 은빛 머리칼, 기분을 파악할 수 없는 청회색 눈동자. 싸늘하고 시니컬한 느낌을 풍기는 남자는 쇠꼬챙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왕국 행정관 아이언스입니다.”

레이디 페의 지시와 밤비의 부탁을 받고 우리를 찾아온 것이라고 했다. 밤비와는 북부가 아직 제국의 공작령이었을 때, 성에서 함께 근무한 동료 사이라고.


“불편하신 점은 없는지, 도와드릴 점은 없는지 살피러 왔습니다.”

아마 왕실이나 아이언스는 나를 제국의 이혼한 귀부인 정도로만 알고 있을 터였다. 이곳 사람들은 가십과는 담을 쌓고 산다고 했으니, 나와 관련한 스캔들은 잘 모를 것이다.

그저 밤비와 친분이 있다니 특별히 신경 써 주는 것일 테지.


“감사합니다. 특별히 불편하거나 부족한 것은 아직 없어요. 나중에 이곳에서 장사나 사업을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때 조언을 좀 부탁드립니다.”

나는 나름 정신을 바짝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나중을 위한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렇습니까.”

아이언스는 짧게 대꾸한 뒤 집 안 곳곳을 꼼꼼히 살펴보는 듯했다.


“행정관님, 도움이 필요한 데가 있습니다!”

앤이 손까지 들어 올리며 불쑥 나섰다. 내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쳐다보는데도 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레이디께서 몸이 안 좋으십니다. 며칠째 식사도 잘 못 하시고, 기운도 없으시고. 혹시 무슨 병환이라도 나신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서요.”

“그러고 보니 안색이 안 좋으시군요.”

“의원을 좀 보내 주시겠습니까. 기왕이면 왕실 주치의처럼 믿을 만한 사람으로요. 의원이라는 이들 중에 돌팔이가 좀 많아야지요. 저희가 타지에서 왔다고 얕보고 속여 먹으려 들 수도 있고요.”

“참 당돌한 아가씨군요. 좋습니다. 주치의를 이곳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대신 하루 이틀 시간이 걸릴 수는 있습니다.”

나의 해결사 앤 덕분에 뜻하지 않게 왕실 주치의의 진료를 받게 되었다.

앤은 협상 결과가 흡족했는지, 차와 함께 자두 쿠키를 아이언스에게 대접했다.


“행정관님, 식복이 있으십니다. 이 쿠키는 레이디 가문의 명물인데, 마침 갓 구운 참입니다. 독특한 맛의 자두 잼을 넣어 새콤달콤합니다. 드셔 보십시오.”

하지만 아이언스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저는 단맛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신 것도 잘 먹지 못합니다.”

기껏 인심 썼는데 딱 잘라 거절하자 앤의 입이 댓 발 나왔다. 흥, 북부에서는 맛보기 힘든 귀한 거라고. 앤의 표정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이언스의 말은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좀 싸 주실 수 있습니까? 함께 사는 사람이 쿠키를 무척 좋아해서요.”

뭐야, 생긴 건 깐깐한 쇠꼬챙이인데, 알고 보니 사랑꾼?


“부인께서 쿠키를 좋아하시나 봐요?”

“부인은 아니고 연인입니다.”

“아…….”

뭐지? 갑자기 훅 개방적인 이 연애 문화는?


“그럼요, 얼마든지 싸 드릴 수 있죠. 저희야 또 구우면 되니까요. 앤, 전부 싸 드리도록.”

쇠꼬챙이 행정관이 보여 준 의외의 면모에 놀란 나머지 나는 쿠키를 몽땅 내주었다. 그래 뭐, 행정관이랑 친해 둬서 나쁠 건 없겠지. 의사도 보내 주기로 했고.

사실 아이언스가 쿠키를 챙길 때,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부럽던지. 몸이 안 좋으니 별게 다 부럽고 서럽고 그랬다.

주변이 낯설고 불안정해서 그런지 감정 기복이 심해진 것 같았다.

어찌 됐든 앤의 활약과 밤비의 호의 덕분에 이곳 생활에 비로소 의미 있는 한 발을 뗀 기분이 들었다.

어서 몸이 나아져서 나도 제대로 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었으면.

* * *

로제트가 북부 왕국에 온 이후 처음으로 편안한 마음으로 잠든 밤.

불길한 그림자가 정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세 명의 복면인은 공기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그 고요하고 절제된 몸놀림이 보통 훈련된 자들이 아님을 말해 주었다.


“로제트 앰브로시아가 맞습니다. 얼굴과 체형, 목소리, 걸음걸이 모두 확인했습니다. 환각 주술, 왜곡 주술 유무, 결계 유무 확인했습니다. 현재 무방비 상태입니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지금 처리해.”

탈라리아 메신저 반대편에 있는 목소리가 툭 던지듯 말했다.


“존명.”

복면인들은 연기처럼 집 안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순식간에 침실까지 당도한 그들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로제트의 침대에 검을 내리꽂았다. 퍽.

복면인들의 눈썹이 움찔 구겨졌다. 이 기대와는 다른 소리와 감각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셋 중 하나가 침대 위의 이불을 거칠게 걷어 냈다. 그 안에서 자고 있어야 할 로제트 앰브로시아가 없었다.


“멀리 가진 못했을 거다. 어서 찾아!”

복면인들은 집과 정원부터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로제트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집 밖으로 달아난 걸까?


“제길!”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그들은 최고 수준의 암살자들로, 자그마한 움직임이나 소리도 감지하도록 훈련된 자들이었다.

그들답지 않게 평정을 잃고 우왕좌왕하는데 갑자기 사방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환해졌다. 결계였다.


“왕실 기사단이다. 쓰레기 처리반이라고도 하지. 어차피 상대도 안 되니까 괜히 용쓰지 말고 항복하라. 하는 거 봐서 목숨은 살려 주지.”

왕실 기사단장이 하품을 하면서 건달처럼 말했다. 북부에서는 확실히 보기 힘든, 가벼운 부류였다.


“대체 어떻게 저런 날파리 같은 놈들이 감히 우리 북부에 들어온 거야? 아 놔, 자존심 상해.”

하지만 복면인들은 순순히 투항하지 않았다. 리더인 듯한 자가 나머지 둘을 제거하고 본인도 자결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저것들 결국. 아이언스 그 쇠꼬챙이 때문에 야밤에 시체 치우게 생겼잖아. 하여간 귀찮은 일은 잘도 물어 온단 말이야.”

기사단장은 투덜거리며 주변에 명했다.


“1조는 시체를 수습하고 2조는 레이디를 찾는다.”

로제트와 앤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실은 멀리 있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집 안에 있었다. 다만 다른 시간의 영역에 있었을 뿐.

‘시간의 틈새’라는 마도구를 사용하면 잠시 다른 차원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같은 공간에 있어도 각각 속한 시간 영역이 다르면 상대를 보거나 감지할 수 없다는 원리였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난 듯 갑자기 나타나 잠든 로제트와, 마침 로제트의 상태를 살피러 왔던 앤을 시간의 틈새로 다급히 밀어 넣은 이는.


“많이 놀라셨지요.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행정관이 일을 제대로 했다면 곧 왕실 기사단이 도착할 겁니다. 저는 레이디를 도와드리려는 것이니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이렇게 로제트를 안심시키더니 자신을 소개했다.


“실은 레이디와 저는 이미 만난 적이 있습니다. 매우 혼란한 틈에 잠깐 마주친 거라 레이디께선 아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저는 레이디를 잊지 못하지만요.”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진 로제트의 행방을 좇고 좇아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다들 레이디 앰브로시아가 죽었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믿지 않았다.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로제트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다.

마침내 머나먼 북부 왕국에서 그녀를 발견했을 때,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신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며칠간 행복에 들뜬 마음으로 집 주변을 맴돌았다. 멀리서 그녀를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했다. 그래, 이것이 자신의 자리였다.

그러다 그는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다. 매우 위험하고 고도로 훈련된 살기였다. 저 정도의 고수라면 설마?

그는 마음이 급해졌다. 다시는 그녀를 잃을 수 없었다. 마침 왕실 행정관이 그녀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걸 보고는, 그 뒤를 쫓아가 실수로 부딪힌 척하며 쪽지를 건넸다.

그리고 다행히 늦지 않게 로제트를 구해 낼 수 있었다. 북부로 오는 길에 국경 암시장에서 사 둔 마도구를 요긴하게 써먹었다.

마도구가 없었다면 아마 자신의 목숨을 바쳤을 것이다.

과연 로제트의 기억 속엔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사내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묘하게 절절해서, 그가 한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진이 걱정돼서 보낸 호위일까? 아니면 왕실에서 파견한 호위?’

그의 차림새나 분위기로 보았을 땐 유랑 기사나 용병, 아니면 해결사 같았다.


“당신 이름이 뭐죠?”

“쿠엔티노입니다, 레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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