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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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당신은 누구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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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화. 당신은 누구십니까?
2022.10.21.
난감한 일이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기만하게 되다니.
쿠엔티노는 자신을 스콜피온스라는 정보 길드 소속 해결사라고 소개했다.
스콜피온스? 어디서 들어 본 듯한 이름인데? 아! 아…….
이어진 쿠엔티노의 설명을 들으니 기억이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가 바로 프러너스의 의뢰로 플럼 하우스에 있던 나를 감시하던 이이자, 황제의 암살단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이 습격했을 때 나, 아니 나로 보이는 뷰글라스를 들쳐 안고 도피한 이였다.
그 소식을 접했을 당시에도 다들 참으로 이상하다 여겼다.
원래 존재를 드러내면 안 되는 감시책이 느닷없이 모습을 드러낸 것도 그렇고, 독단적으로 상황에 개입한 것도 그렇고.
개입도 웬만큼 한 것이 아니었다. 듣자 하니 암살자들을 눈 깜짝할 사이 제압하고, 추격자들을 피해 나, 아니 내 모양 뷰글라스를 안은 채 상당한 거리를 달아났다니.
대체 왜 그랬을까?
게다가 나를 찾아 머나먼 북부 왕국까지 왔다는 것 아닌가. 정보 길드의 해결사가 이동 마법을 썼을 리 만무하고, 열차나 말을 이용해 그 험한 길을 달려왔을 텐데.
아니, 그 이전에, 내가 북부 왕국으로 온 건 극비 사항인데 어떻게 알고 온 거지?
아니, 그 이전 이전에, 쿠엔티노가 찾아 헤맨 건 과연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나도 아니고, 뷰글라스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혀 내가 아닌 것도, 뷰글라스가 아닌 것도 아니고.
쿠엔티노는 과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찾아 이 머나먼 곳까지 온 것이란 말인가.
사실 그는 내게 생명의 은인이었다.
토버마리에서 암살자들의 습격을 받았을 때도, 이곳 북부 왕국에서 습격을 받았을 때도, 위험을 무릅쓰고 나와 뷰글라스를 구해 주었으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나나 뷰글라스는 꼼짝없이 변고를 당했을 것이다. 하마터면 앤까지 위험할 뻔했고. 우리를 습격한 자들은 그 세계 실력자들이었으니.
그가 베푼 호의와 도움에 관해선 평생 고마워해도 모자랄 것이다.
문제는 내가 과연 그런 은혜를 입어도 되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호의를 베풀고 누구를 도왔는지 알지 못하는데 말이다.
일부러 그를 속이려 한 건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호의를 배신한 셈이 된 것 같아 미안하고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었다.
사람의 진심을 이용하는 것만큼 나쁜 게 없는데. 그 끔찍함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잖아?
“정말 고마워요, 쿠엔티노. 혹시 내게 바라는 것이 있나요?”
조금이라도 부채감을 덜기 위해 물었더니.
“레이디의 호위 기사가 되게 해 주십시오.”
더 난감한 답이 돌아왔다.
“왜요? 대체 왜 내 기사가 되고 싶은 건데요? 게다가 난 기사를 둘 만한 지위도, 형편도 못 돼요.”
무엇보다 겨우 내 기사가 되기 위해 하던 일도 팽개치고 고생스럽게 여기까지 왔다고? 모른 척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과분한 호의였다.
쿠엔티노는 결연한 얼굴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윽고 입을 열었다.
“해결사가 아닌 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레이디께서 꾸게 하셨으니까요. 기사에겐 충성을 맹세할 주인이 필요합니다. 저를 기사로 만드셨으니, 제가 섬길 주인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쿠엔티노의 말과 태도가 너무 절절하고 진지해서 차마 내색할 수 없었지만…….
내가 한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하지만 또 완전히 선을 긋고 발을 빼기에는 양심에 걸리는 게 많은 상황이고. 아 정말, 어떻게 하지!
이제라도 그때 그 레이디는 내가 아니었다고 털어놓는 게 좋을까?
당신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각 주술로 위장한, 외모는 얼핏 사기꾼 같아 보이지만 속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한 뷰글라스였다고.
이런 경우, 과연 어느 쪽이 상처를 덜 받을까?
당신이 어마어마한 호의를 품고 있는 그 레이디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라고 알려 주는 편이? 아니면 그 실체는 영매사 뷰글라스였다고 알려 주는 편이?
두 가지 모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쪽이든 쿠엔티노는 크게 충격을 받겠지.
“저, 그게,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레이디께서 어떤 분이시든. 그저 레이디이시기만 하면 됩니다.”
대체 뷰글라스는 내 모습을 하고 뭘 어떻게 했기에 저 사람이 저렇게 홀딱 빠져든 거야?
뷰글라스야말로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구나.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 레이디께서는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불편하시지 않게 평소에는 그림자처럼 지내다 레이디께서 명하실 때나 제가 판단하기에 꼭 필요하다 싶을 때만 나서겠습니다.”
쿠엔티노는 해결사와 기사의 장점을 결합한 ‘그림자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하,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그에게 진실을 밝히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내가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거짓의 무게를 감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좋아요. 대신 석 달의 유예 기간을 두겠어요. 그사이에 언제든 마음을 바꾸어도 괜찮아요. 기사 서약은 석 달 후 정식으로 받도록 하죠.”
그 석 달 동안 최대한 추한 모습을 보여서 진저리가 난 쿠엔티노가 스스로 줄행랑을 치면 좋고.
그때까지 결심을 바꾸지 않는다면, 은인이기도 한 그에게 제대로 된 검 한 자루쯤은 선물하고 싶었다. 이곳 북부의 마도구 기술을 접목한 명검을.
“기사님, 우선은 이 자두 쿠키 좀 드셔 보시지요. 레이디 가문의 명물입니다. 귀한 거라 아무한테나 내드리지 않습니다.”
앤이 쿠엔티노에게 갓 구운 쿠키를 내밀었다.
* * *
“대체 레이디는 누구십니까?”
행정관 아이언스가 안 그래도 차가워 보이는 얼굴에 찬바람을 쌩쌩 날리며 물었다.
간밤에 암살자들이 찾아오고 왕실 기사단까지 출동했으니, 그가 달려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레이디에 대해 밤비에게 전해 들은 건 카를슈테인 공작부인이셨고, 최근 이혼하셨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국을 떠나고 싶으셨던 거라고. 그 이상의 비밀이 있다 해도 저희는 캐묻지 않는 편이긴 합니다.”
사실 북부 왕국엔 과거나 신분을 감추고 새 출발을 하기 위해 숨어든 사람이 적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자세한 사연을 묻지 않고 받아들여 준다고.
“아무리 그래도 이처럼 요란한 신고식은 없었습니다. 더욱이 암살자들의 수준으로 봐선…… 황후의 암살단 ‘퍼플 미스트’일 가능성이 매우 높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 물음은 내가 아니라 쿠엔티노를 향한 것이었다. 쿠엔티노가 아이언스에게 암살단의 습격을 예고했으니, 뭔가 알고 있으리라 여긴 듯했다.
“퍼플 미스트가 확실합니다.”
쿠엔티노가 주저 없이 단정했다.
“그들은 지금껏 본 적 없는 고수들이었습니다. 마법이나 마도구가 아니었다면 결코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 정도 수준의 암살단은 황후의 암살단밖에 없습니다.”
황제의 암살단도 그에 비하면 후지다는 소리를 들을 만큼, 고수 중의 고수가 황후의 암살단이라고.
“그들이 퍼플 미스트였다면 매우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질 뻔했습니다. 경이 재빨리 손쓰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냥 넘어가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아이언스가 더욱 냉정한 얼굴로 말했다.
어떡하지. 진과의 관계를 밝힐 수도 없고.
그나저나 까맣게 잊고 있던 황후의 등장이라니. 진이 황후의 실체를 이미 알고 있다는 걸 확인한 후로는, 황후의 존재를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다.
황후는 대체 언제부터 내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던 걸까. 혹시 황위 탈환 계획도 새어 나간 건 아닐까. 페가수스 쪽 상황도 걱정되기 시작했다.
제국의 황후까지 개입했으니 자칫 외교적인 문제로 번질 수도 있었다. 왕국 입장에서는 골칫거리를 떠안기 곤란하겠지.
“그래요, 내게는 말씀드리기 힘든 사연이 있어요.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이고요.”
나는 그중 일부만 밝히기로 했다.
“황제와 공작은 한편이면서도 서로 견제하는 사이예요. 나는 황제를 견제하기 위한 공작의 말이었다고 할까요. 내가 어렸을 때, 선대 공작은 흑마술로 황제의 약점을 내게 봉인해 놓고 가문의 후계와 정략혼을 시킨 겁니다.”
이제는 남의 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일들이라 아무렇지 않게 줄줄 늘어놓는데, 오히려 듣는 사람들에겐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아이언스와 쿠엔티노 그리고 앤까지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쨌든 이 정도면 대충 변명이 됐겠지? 적어도 극악한 범죄를 짓고 국외로 도피한 건 아니란 말씀.
불편한 정적이 흐른 후, 아이언스가 말문을 열었다.
“레이디의 신변 보호를 위해 급한 대로 저희 쪽에서 호위를 붙여드려야 하나 고민했는데, 그 문제는 해결된 것 같습니다.”
아이언스가 눈짓으로 쿠엔티노를 가리키고는, 다음 일을 안배했다.
“일전에 약속한 왕실 주치의와 함께 왔으니, 오늘은 우선 진료부터 받아 보시지요.”
“감사합니다. 이번 일을 상부에 보고할 건가요?”
“기사단까지 출동했으니 보고는 불가피합니다. 더욱이 기사단장이 워낙 입이 가벼운 위인이라.”
아, 그 기사단장. 시간의 틈새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에도 그가 쉴 새 없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아이언스에 대해 씹는 소리를 듣고 그 긴박한 와중에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지.
알고 보니 아이언스의 별명이 ‘행정부의 백상아리’였던 것. 순간 페가수스의 ‘버터 삼킨 백상아리’가 생각나 이를 악물어야 했다.
아이언스, 당신의 친구 밤비가 제국의 백상아리와 연애를 하게 된답니다. 아무래도 밤비는 백상아리들과 인연이 깊은 듯하다.
“행정관님, 지난번 쿠키 반응이 어땠습니까? 동거인께서 쿠키를 좋아하신다기에 이번에도 준비해 보았습니다.”
앤이 잽싸게 자두 쿠키를 뇌물로 들이밀었다. 아이언스는 심각한 논의를 펼치던 사람치고는 쿠키가 든 봉지를 의외로 넙죽 받아 챙겼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정말로 윙크와 찬사가 끝없이 나올 정도로 환상적인 맛이었다는군요.”
자두 쿠키가 베일에 싸인 그분의 입맛에 맞아 다행이었다. 역시 이곳에서 과자 가게로 크게 일어서는 거야.
“그럼, 왕실 주치의를 들라 하겠습니다.”
잠시 현관을 나섰던 아이언스가 곧 의사와 함께 돌아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이디. 왕실 주치의 브라운이라고 합니다. 몸 상태가 계속 좋지 못하셨다고요. 이동 마법 후유증도 있으셨고요.”
브라운은 온화한 인상의 중년 신사로, 지금까지 만난 북부인들 중 가장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니까 어린 환자도 겁먹지 않도록 잘 다룰 것 같은 분위기?
공작가 주치의는 표정이나 태도가 워낙 딱딱했기에 그의 온화한 분위기가 더욱 인상적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공작가의 주치의들은 프러너스의 통제 하에 나를 속여 왔겠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나한테 따뜻한 낯으로 대하긴 어려웠겠군.
이렇게 딴생각을 하고 있는데, 침실로 자리를 옮겨 진찰을 하던 브라운의 얼굴이 일순 긴장되는 걸 보았다.
그의 얼굴에 감돌던 편안한 미소가 흔들리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 정말로 죽을병에라도 걸린 걸까?’
브라운이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인정 많은 의사를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았다. 차라리 그가 메마르고 냉정한 의사인 쪽이 나았을까.
“레이디, 몸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끼지 않으셨습니까?”
“다른 점이요?”
“예를 들면 유난히 피곤하다거나 잠이 쏟아진다거나 속이 울렁거린다거나. 또 감정 기복이 심해진다거나 하는 증상 말입니다.”
“음, 신기하게도 전부 지금 겪고 있는 증상인데요? ……나, 아주 안 좋은가요?”
“레이디, 혹시 마지막 달거리가 언제셨습니까?”
“……!”
하지만 그럴 리는 없었다.
주술의 부작용 때문에, 그럴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