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검을 수집하다 (105/110)


#105화. 검을 수집하다
2022.12.02.



 


「충성스럽고 영리한 시녀를 몇 사람 뽑는 게 어떨까?」

진도 이렇게 조언했고 말이다. 앞으로 귀족들과 기 싸움을 벌이며 황궁에서 살아남으려면 조력자를 많이 확보해 두는 것이 좋을 거라며.

실제로 역대 황후나 고위 귀족 부인이 황궁이나 사교계를 휘어잡는 데는 시녀의 역할이 중요했다.

특히 사교계의 정보나 비밀을 캐고 여론을 형성하고 조작하는 방면에서 활약이 대단했다.

대개 귀족 출신이었던 그녀들은 다방면의 지식과 정보를 두루 습득하고 있었고, 모시는 분의 기분도 잘 맞춰야 했다.

나는 공작부인일 때도 권력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사교계와도 소원했기에 시녀가 필요한 일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사교계의 알짜 소식을 부지런히 전해 주고 세심하게 보필해 주던 이가 있었다. 물론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내게 접근했다는 점이 씁쓸하긴 하지만.

지난 생에 내 유일한 귀부인 친구였던 올랜도 웰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교계 흐름을 짚고 소문의 맥락과 진의를 파악하는 그녀의 탁월함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치도 빠르고 영민했다.

또 낯을 가리는 데다 까칠한 편이던 당시의 내 비위도 능숙하게 맞출 줄 알았고, 사람을 조종하는 데 능했다.

듣기로 그녀의 남편인 윌로우 웰츠 백작이 호텔 사업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부인인 올랜도의 수완 덕분이라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올랜도만큼 훌륭한 시녀 후보는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유감스러운 점은, 우리 사이에 윌로우라는 기분 나쁜 인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 하지만 혹시 또 모르잖아? 이번 생에는 윌로우가 조금은 현명한 선택을 했는지도.

이번 생엔 일부러 그들 부부를 철저히 멀리했던 나는,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했다. 지난 생과는 정치적인 상황이 많이 달라지기도 했고.

특히 아리스타타와 아젤리아의 선택을 전해 들으며 올랜도의 선택은 어떠했는지 무척 궁금했다. 시녀도 시녀지만, 그녀가 잘살고 있는지 안부를 묻고 싶었다.


“웰츠 호텔 그리치 지점을 부인이 직접 운영하고 있습니다. 윌로우 웰츠와 이혼하면서 그 호텔 소유권을 위자료로 요구했다고 합니다.”

쿠엔티노가 조사해 온 바를 보고했다.

두 사람, 이혼했구나.

웰츠 호텔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아름다운 호텔을 야무지게 거머쥐었구나, 역시!

지난 생에 그 호텔 객실에서 보았던 멋진 오션 뷰가 다시 눈앞에 파랗게 펼쳐졌다.

나를 생각하며 전망이 가장 아름다운 곳에 터를 잡고, 가장 좋은 것들로만 채워 호화롭게 지었다며, 윌로우가 소름 끼치는 주접을 떨었던 바로 그 호텔.

올랜도는 이제 레이디 마치가 되어 그리치에 있는 그 아름다운 호텔의 주인이 되어 있었다.

내가 올랜도라도 그곳을 떠나 시녀가 될 생각은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의 이야기가 몹시 듣고 싶어진 나는, 거절당할 각오로 서신을 보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 올랜도를 절실히 원하는 이유 등을 적었다.


‘당신을 원하는 내가 당신을 찾아가 부탁하는 것이 맞지만, 내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이처럼 무례한 서신을 보내게 되었군요. 내 친구 올랜도, 예전처럼 내게 친절을 베풀어 주지 않겠습니까?’

망설이고 망설이다 조심스레 ‘내 친구’라고 썼다.

이번 생에는 그들 부부가 내 이혼을 한쪽은 반대하고 한쪽은 환영하는 서커스를 벌이지 않았던 데다, 올랜도가 아직은 내 암살을 의뢰하지 않았으니까.

친구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참으로 궁금하긴 했다. 자신의 이혼은 물론이요, 남의 이혼에까지 강경한 입장을 취했던 올랜도가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이혼하게 된 걸까?

웰츠 호텔 체인 중에서도 최고 노른자를 차지한 걸 보면, 매우 냉정하고 침착하게 이혼을 준비한 듯한 느낌인데.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심경 변화가 있었는지는 잘 몰라도, 올랜도의 선택이 우선은 반갑고 기뻤다.

지난 생에 끝까지 결혼의 허울을 끌어안은 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올랜도 때문에 얼마나 속상했는지.

결코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 부부 관계가 어긋나는 원흉 노릇을 하게 된 나로서는 가슴에 올라가 있던 돌덩이가 사라진 듯 후련한 기분이었다.

올랜도도, 윌로우도 이번엔 좀 더 솔직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 * *

올랜도 마치가 왔다.

그리치에서 열차를 타고 제도까지 와서, 묵고 있던 숙소에서 내 서신에 답장을 보냈다. 입궁할 수 있도록 초대해 달라는 내용.

나는 잔뜩 흥분해서 올랜도의 숙소로 곧장 마차와 사람을 보냈다.


“레이디 앰브로시아!”

올랜도는 응접실 문 앞에서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한참을 울음을 삼키며 서 있었다.

어쨌든 이번 생에 처음으로 올랜도를 보자 나도 울컥하긴 했다. 그간의 우여곡절이야 어찌 됐든, 오랜만에 보니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반가움이었다.


“우린 당신이 죽은 줄만 알았어요.”

하긴 환각 버섯으로 내 모습을 했던 뷰글라스가 추격자들을 피해 달아나다 행방불명된 후, 흉흉한 소문이 여러 개 돌았으니까.

진짜 나 역시 전쟁 전엔 페가수스에 꽁꽁 숨어 있었고, 전쟁이 터졌을 땐 북부 왕국으로 가서 신분을 감추고 살았으니.

올랜도와 윌로우가 백방으로 내 행방을 알아봤어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이혼했다면서요?”

“말하자면 길어요, 레이디.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듣고 너무 놀라지 마세요.”

올랜도는 결연한 얼굴로 비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지난 생의 로제트가 들었다면 분명 깜짝 놀랐을 이야기이자, 지금의 나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들 부부의 이야기.

그녀의 남편 윌로우는 사실 어려서부터 나를 짝사랑했지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했고, 결국 조금의 애정도 없는 올랜도 자신과 결혼했다는 것.

그렇게 빈껍데기 같은 결혼 생활을 유지해 왔다는 것.

내가 프러너스와 이혼하고 행적을 감추자, 윌로우는 어김없이 자신에게도 기회가 왔다고 여기고 백방으로 나를 찾았다고 한다.

이번에도 올랜도는 그러한 윌로우를 포기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그러던 중에 들려온 비보, 내가 자객에게 살해당했다는 소식이었다고.

올랜도는 나를 향한 윌로우의 감정을 자신 역시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도, 그래서 내가 원망스러웠다는 것도 숨기지 않고 전부 말했다.

내가 올랜도를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한 대목이었다.


“미워하고 두려워하던 대상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좋아질 거라고 믿었어요. 당신만 없어지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올 거라고, 윌로우도 결국 내게 돌아올 거라고.”

올랜도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내가 더 이상 윌로우를 원하지 않게 됐어요. 정말 이상한 감정이었죠. 증오하던 대상이 사라지자 행복하기는커녕 삶의 의욕도 목표도 사라져 버렸어요. 이런 감정, 이해할 수 있으세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은 우리의 결혼을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허상에 불과한 우리 관계를 지탱해 온 오기였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죠. 당신이 사라진 후에.”

관계를 이어 줄 최후의 연결고리마저 사라진 그들은 더 이상 함께할 수 없었다고. 그것이 웰츠 백작 부부의 이혼 사유였다.


“레이디의 서신을 받고 다시 한번 추한 삶의 기회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하면, 제가 너무 변태스러워 보일까요?”

예, 당신이 아직도 조금 무섭습니다.


“저를 레이디, 아니 후작 각하의 시녀로 발탁해 주세요. 음험하고 욕심 사나운 귀족들을 치우고 각하가 황후로 간택되시도록 있는 재주 없는 재주 전부 보태겠습니다.”

올랜도는 잃어버린 증오의 대상을 되찾아 진심으로 기쁜 듯했다. 삶의 의욕이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거 좋아해야 하는 일인지 헷갈리네.


“호텔은 어쩌고요? 내 시녀가 되는 것보다는 호텔을 운영하는 게 더 즐겁지 않아요?”

“호텔은 직원들에게 맡기면 되죠. 유능한 지배인도 있으니까요.”

아, 거기 지배인이 윈터였지. 암살 길드의 실력자이자 페가수스의 첩자이면서 호텔 지배인도 겸하고 있는.

윈터는 쌍둥이 형제였는데, 동생인 서머는 그리치의 평민 거리에서 ‘꽃과 나무’라는 화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 화원의 비밀 방을 페가수스의 접선 장소로 몇 차례 이용한 인연으로 서머와 꽃에 대한 수다도 떨고 꽃꽂이 모임도 가졌지.

아, 윈터와 서머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두 사람의 안부도 궁금해졌다. 우리 쌍둥이 녀석들을 보면 깜짝 놀라겠지?

내가 호텔 이야기를 꺼내며 망설이는 듯하자, 부담 갖지 말라는 듯 올랜도가 더 과감하게 어필했다.


“제게는 각하를 꼭 황후 폐하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야 행여 윌로우가 딴마음을 품지 않죠. 각하가 살아 계시다는 걸 알고 주제도 모르고 나서면 어떡합니까. 설마 그 겁쟁이가 황제 폐하를 상대로 싸움을 걸진 않겠죠.”

세상에 윌로우라니. 어째 급히 재활용된 느낌이 농후한데. 나는 어울리지 않게 넉살을 떠는 올랜도의 모습에 겨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어차피 두 사람은 이미 이혼했잖아요. 신경 쓸 필요 없는 거 아닌가요?”

“아니죠, 각하. 내가 잘되는 것보다 상대방이 안 되는 꼴을 보고 더 기뻐하는 게 사람의 속된 심리랍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올랜도 특유의 진지한 얼굴로 그런 말을 늘어놓으니 더욱 매운맛이었다.

아, 눈물 나.

이렇게 나는 전남편 잘되는 꼴은 절대 못 본다는, 유능하고 든든한 시녀를 얻게 되었다.


 

* * *

다행히도 로제트가 생각보다 빨리 시녀를 뽑았다.

레이디 마치는 얼굴은 조금 우울해 보였지만, 영민하고 눈치도 빠른 듯했다.

필요하다면 은근슬쩍 술수도 부릴 수 있을 사람이었다. 침착하면서도 때로 과감해 보이는 면이 로제트를 잘 보필할 것 같았다.


“폐하, 요즘은 계속 정복을 입으십니다? 정복이 불편하다며 평소엔 입기를 꺼리셨잖습니까.”

누구와는 달리 눈치가 느린 나의 보좌관 플록스가 입방정을 떨었다. 반대로 촉이 너무 좋은 건가?


“적응이 되니 입을 만하군. 옷을 갖춰 입어야 위엄 있어 보이지 않겠어. 안 그래도 귀족들이 짐을 우습게 보는데 말이야.”

“누가 감히 폐하를. 명만 내리십시오. 바로 세금 조사 들어가겠습니다.”

“황후 간택에 관한 이야기는 더 나온 게 없나? 귀족들의 동태는 어떠하지?”

“아직은 서로 눈치를 보며 조심하는 듯합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군. 내가 싸워야 할 대상은 결국 그것인가.”

황제는 바뀌었어도 귀족들의 습성이나 관행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몇몇 귀족을 제외하고는 폐 황제의 무자비한 숙청이 두려워 나를 지지한 이가 대부분이니.

숨통이 트이고 살 만해지자 묵은 욕심이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것이다.

귀족들이 무슨 흉계를 꾸미고 있는 말든, 로제트는 로제트대로 계획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진, 내가 북부 왕국에서 귀중한 걸 배워 왔는데 말이야.”

로제트는 북부 왕국의 대현자, 대스승으로 불리는 이가 알려 준 것을 내게 들려주었다. 그녀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분은 원래 멀고 먼 동방에서 왔대. 빨간 말을 타고 세상을 떠돌다 암흑 사막을 건너 북부 왕국에 정착하셨대.”

“왜 고향을 떠난 거지?”

“응, 대스승이 살던 곳은 수백 개의 나라가 매일같이 전쟁을 벌이던 곳이래. 백성들은 오늘은 이 나라 병사, 내일은 저 나라 병사가 되어 전쟁터에 끌려 다녀야 했지. 누구를 위해 왜 싸워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숨 쉬는 게 고통이었겠군.”

“그랬을 테지. 그런데 진, 여기서부터가 진짜 중요해. 수많은 나라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그때, 살아남은 나라는 대체 어떤 나라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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