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냉탕 온탕 잡탕
(106/110)
106화. 냉탕 온탕 잡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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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냉탕 온탕 잡탕
2022.12.05.
수많은 나라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던 극한의 혼란기.
오늘은 이 나라의 백성으로 착취당하고 내일은 저 나라의 백성으로 전쟁터에 끌려가던 이들에게 누가 왕위를 차지하는지는 조금도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살아서 오늘 저녁밥을 먹을 수 있을지가 더 큰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에 금세 사라지지 않고, 아니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힘이 커져 주변의 나라들까지 흡수해 대국이 된 나라가 있었다.
북부 왕국의 대스승이 오래전 떠나온 고향, 동방의 이야기였다.
「그 나라는 대체 어떤 점이 그리도 특별했을까요?」
대스승이 내게 물었다.
내가 북부 왕국에서 접한 제도들을 신기해하자 레이디 페가 대스승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북부 왕국의 특별한 제도들은 대부분 대스승의 지도를 받아 만들어진 것이라고.
혹시 진이 제국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냉큼 약속을 잡았다.
좋은 것만 주고 싶은, 그런 마음? 그렇게 극성맞은 엄마가 된 기분으로 쫓아가 통치에 대한 가르침을 구한 내게 대스승이 물었던 것이다.
그 나라가 수많은 나라를 제치고 동방의 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군사력이 강한 나라? 토양이 비옥하고 천연자원이 풍부해 양식 걱정 없는 나라? 상업과 무역이 발달해 부를 많이 축적한 나라? 머리 좋은 참모와 인재가 많은 나라?
이미 망해 버린 나라의 유민이었던 대스승도 그 이유가 너무나 궁금해 몇 달간 그곳에 직접 머무르기까지 했다고 한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강대국이 된 배경을 두고 소문도 무성했는데, 그중 대스승의 흥미를 끄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고아들을 키워 강한 군대를 만든다고 합니다.’
소문엔 진실과 거짓이 교묘히 섞여 있는 경우가 많은 법. 전혀 근거 없는 소리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 대스승은 그 소문에서부터 진실을 캐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나라에는 듣도 보도 못한 낯선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그 어디서도 이런 정책은 들어 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 정책을 담은 왕의 칙령 또한 너무나 세세하고 구체적이었다고 한다. 이런 식의 내용이었다고.
‘출산을 하려는 이가 관청에 알리면 나라에서 파견한 의사가 분만을 돕는다.’
‘아들을 낳으면 술 두 병에 염소 한 마리, 딸을 낳으면 술 두 병에 돼지 한 마리를 준다. 쌍둥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양식을 대주고, 세쌍둥이를 낳으면 나라에서 보모를 붙여 준다.’
‘큰아들이 죽으면 3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나머지 아들이 죽으면 3개월간 세금을 면제한다.’
주로 아이와 산모를 나라에서 책임지고 보살피겠다는 내용이었다. 아마 ‘고아를 키워 군대를 만든다’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이리라 짐작이 갔다.
대스승이 보기에도 그 나라의 정책은 매우 파격적이고 신선한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저렇게 백성들, 그중에서도 가장 힘없는 이들에게까지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면 나라 전체에 쓸데없는 낭비가 없어야 하고 놀고먹는 사람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레이디가 보시기에, 과연 제국에서 이런 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대스승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물었다.
제국에서 가능할까? 조금 자존심이 상하지만, 솔직히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제국에는 쓸데없는 낭비를 일삼고 전문적으로 놀고먹는 막강한 집단이 있지 않은가. 바로 제국의 귀족 말이다.
아마도 귀족들은 오히려 이러한 제도를 낭비라고 주장할 것이다. 아까운 수고와 국고를 왜 그런 쓸데없는 곳에 쏟아 버리느냐고.
「북부 왕국의 두 군주께선 제국의 공작과 공작부인이던 시절부터 이미 절약과 금욕을 솔선수범해 오고 계셨지요. 일찍이 영지민들과 함께 나눈다는 생각을 가지고 계셨고요. 그래서 지금과 같은 제도를 시행하는 게 가능했던 겁니다.」
내가 부러워한 북부 왕국의 국선 유모 제도라든가, 미혼모와 이혼한 여성을 위한 직업학교라든가, 고아를 위한 후원제도 등 많은 제도가 대스승을 통해 동방의 대국에서 전해진 것이었다.
대스승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물론 동방의 대국도 순수한 마음만으로 백성들을 돌본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정말로 고아를 키워 전쟁에서 이기고자 했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노력이 낭비였습니까? 우리 북부 왕국의 제도들이 낭비로 보이십니까?」
그렇지. 레이디 페만 봐도 결코 이득이 없는 일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곳의 제도들은 결국 왕국의 이익으로 되돌아왔다.
물론 레이디 페가 추구하는 이득이란 세상에서 수군거리는 것처럼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힘, 왕국에 힘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내가 북부 왕국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진에게 전부 이야기해 주었다.
“귀족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당장 비웃거나 눈을 부라리겠지?”
“자신들의 권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얘기는 아닐 테니.”
“그래서 더욱, 우리는 백성들과 한편이 돼야 한단 말이지.”
그래, 나 역시 순수한 의도로만 꺼낸 얘기는 아니었다. 황제가 된 진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잇속을 챙기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조금쯤은 기대하게 된다.
“내 아픔을, 내 억울함을 알아주는 이가 있구나, 하는 느낌 말이야. 그런 느낌을 제국민들이 받을 수 있다면 좋겠어.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더라고.”
진과 나는 각각 황족과 귀족으로 태어났지만, 운 좋게도 비참함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같이 비참함을 맛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비참함을 아는 것이 다행인 순간이 오다니.
* * *
“레이디 페의 조언을 듣고 버섯 램프를 만들기 시작했단 말이지. 내 디자인에 북부 왕국의 마법식을 결합하니까 꽤 쓸 만한 결과물이 나왔어. 레이디 페가 탐이 날 만큼 사업성이 있다고 했고.”
한참 동안 북부 왕국에서 만난 대스승의 가르침을 열렬히 전수하던 로제트는, 이번엔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계획을 펼쳐 놓기 시작했다.
“우리 가문의 명물이자 우리 사랑의 수호신인 자두 쿠키도 북부에서 반응이 무척 좋았고. 앤이 운영하는 가게는 언제나 손님으로 북적였다고.”
흥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로제트의 눈은 꿈을 꾸고 있었다.
“나, 버섯 램프 사업은 미혼모나 전쟁미망인들과 함께 해 볼까 해. 과자 가게는 보육원에서 막 독립한 소년 소녀들에게 맡겨 보면 어떨까 하고.”
누가 이 여인에게 황후 자격이 없다고 했는가. 그녀는 이미 황후였다. 아니, 황제인지도.
로제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모두 훌륭했다. 그녀의 계획은 눈부셨고.
하지만 밀린 서류를 보다 잠깐이나마 로제트의 얼굴을 보기 위해 보좌관들 몰래 빠져나온 나는, 솔직히 그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될지 몰랐다.
처음 나를 보고 너무나 환하게 웃던 로제트의 모습에 감동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들어줄 희생양, 아니 청중을 반기는 웃음이었구나.
저토록 열정적이고 훌륭한 포부와 정견을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쓰레기 같고, 과연 황제의 자격이 있나 싶지만.
솔직히 나는 서운했다.
나는 제국의 황후도, 앰브로시아 후작도 아닌, 로제트를 보기 위해 달려왔지만, 그녀는 조금도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아니, 그건 내 오해일 수도 있었다. 로제트가 하는 말들은 대부분 나를 위한, 황제인 내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었으니.
어쩌면 그녀가 하는 말들은 오로지 나를 생각하고 걱정한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걸 모르지 않으면서도, 나는 서운함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의 인연은 하필 시끄러운 시기에 시작되었기에, 지금껏 로제트와 제대로 된 연애조차 해 보지 못했다. 신혼의 설렘은 아예 모르고 지나갔다.
로제트와 아직 아무것도 해 보지 못했는데, 아이들이 생겼고 각자의 일에 파묻히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연인, 아내를 영영 잃게 되는 걸까.
나는 여전히 내 연인이 그립고 아내가 아쉬웠다. 아니, 점점 더 그녀가 고팠다. 나는 내 욕망을 한참 더 채워야 했다.
더 열 받는 건 나만 이 상황이 불만족스러운 것 같다는 점이다. 로제트는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인데.
나는 그녀가 처음인데. 내 모든 처음이 그녀인데.
이러려고 황제가 됐나. 이렇게 홀아비 노릇이나 하려고?
여하튼 나는 당분간 삐친 남편이 되기로 했다.
* * *
“꺄악!”
로제트를 만나고 다시 집무실로 돌아가는 길. 걸음을 서두르던 진은 본궁 정원 어딘가에서 작은 비명 소리가 나는 걸 들었다. 젊은 여자목소리 같았다.
소리를 쫓아 상록 관목에 가려진 곳으로 들어서니 웬 영애 하나가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옆에는 간식 바구니 같은 것이 뒹굴고 있었다.
“괜찮나?”
진은 쓰러진 영애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 나타난 진을 보고 당황한 듯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이제 막 열여덟이나 되었을까, 한참 어린 영애 같았다. 홍조를 띤 희고 보드라운 뺨이 마치 장미 꽃잎 같았다. 눈에 띌 만한 미모였다.
“발목을 삐었나 봐요.”
“내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겠나?”
“한번 해 볼게요.”
진의 손에 의지해 수줍게 일어서던 그녀는 이내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리다 아슬아슬하게 진의 품에 매달렸다.
“이런 실례가. 너무 아파서 순간적으로 그만.”
미간을 좁히고 있는 진에게 그녀는 달아오른 얼굴과 당황한 목소리로 급히 사과했지만, 어째 몸의 거리를 벌리려는 노력은 소홀한 것 같았다.
“걷기는 힘들어 보이는군. 사람을 불러다 주지.”
“아무래도 그게 낫겠어요. 감사합니다. 어두워서 발을 헛디뎠지 뭐예요.”
“…….”
“그러니까…… 왜 이런 곳에서 다쳤냐면요, 황궁의 고양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있었거든요. 제가 동물들을 좋아해서.”
“…….”
“저, 존함을 여쭤봐도 될지요? 사례를 하고 싶어서요. 도와주시지 않았으면 굉장히 위험할 뻔했어요. 겨울이라 밤공기도 차고…….”
그녀는 가녀린 어깨를 바르르 떨었다.
“별로. 도움 준 건 없는데?”
“제 이름은 에스더예요. 베스티안 가문의…….”
“척스! 여기 이 레이디를 모셔다드리게.”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근위대원 몇을 발견한 진이 소리쳤다.
진은 자신의 등에 꽂히는 시선을 무시하며 태연히 자리를 떴다.
에스더 베스티안. 베스티안이라면 새롭게 귀족파의 구심점으로 부상한 가문이었다.
그저 동물을 사랑하는 어린 아가씨가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 처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만약 귀족들이 준비한 첫 이벤트라면. 앞으로 굉장히 피곤해질 거라는 얘긴데.
이번 것은 꽤나 담백한 편이었고 어설픔이 깜찍할 정도였지만, 계속 이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겠지.
진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집무실에 들어섰다. 서로 다른 두 세계를 오간 것처럼,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가벼운 현기증이 일었다.
두 세상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어떤 무정한 여인은 외롭고 어려운 이들을 위로할 생각에 남편은 안중에도 없는데.
어떤 졸렬한 무리는 자신들의 알량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직 어린 영애에게 어설픈 연기나 사주하다니.
분개하던 진은 문득 떠올렸다.
‘그 와중에 황제인 나는…… 삐친 남편 설정이었지,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