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7화. 이 남자는 외도 중 (107/110)


#107화. 이 남자는 외도 중
2022.12.09.



 


“올랜도도 버섯 램프 사업에 합류할래요? 쿠키 가게보다는 그쪽이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혹시 쿠키 쪽이 더 구미가 당겨요?”

“둘 다 됐습니다.”

측근인 올랜도에게 나름 특혜를 주려고 제안했더니, 고민하는 척도 하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잔소리를 콸콸 쏟아 냈다.


“각하, 지금 사업이 문제가 아닙니다. 황후 즉위가 더 시급하지요. 곁에 있는 제가 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데, 어쩌면 그렇게 속 편하게 지내실 수가 있으세요?”

“어? 무슨 일이 있어요?”

“다른 가문들에서 수를 쓰기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새파란 영애들이 황궁에 들락거리며 폐하께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고 있다고.”

아아, 그거. 얼마 전 올랜도가 잔뜩 흥분한 얼굴로 성토했던, 일명 ‘뻔뻔한 영애들의 육탄전’을 말하는 거구나.

나는 가볍게 웃으며 올랜도를 진정시켰다.


“그런 걸로 유혹이 되겠어요?”

내가 지난 생에 해 봐서 아는데, 진은 그런 거 안 통합디다.

내 여유로운 태도가 오히려 올랜도의 인내심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치미는 열불을 삭이며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건 각하가 사태를 아직 잘 모르셔서 하는 말씀입니다. 이러실 것 같아서 제가 명부를 작성해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올랜도는 깔끔하게 정리된 서류를 내게 내밀었다.

명부? 들여다본 서류에는 영애들의 것으로 추측되는 이름, 날짜, 시각, 황궁에서 한 일, 특징, 출신 가문의 정치 관계도 등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기재된 내용과는 별개로 감탄이 나오는 솜씨였다. 나도 모르게 찬사를 보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올랜도의 표정이 무시무시했으니까.

올랜도는 황제에게 접근하는 영애들을 나보다 더 싫어했다. 또한 무절제하고 음란한 요즘 세태에 치를 떨었다.

가문의 명으로 황궁을 들락거리며 기회를 노리는 그녀들을 창부 취급했으니까.

임자 있는 남자나 여자를 건드리는 파렴치한에 대한 올랜도의 증오는 깊었다.

만약 풍기 단속청장 같은 걸 올랜도에게 맡긴다면 불륜을 저지른 자들을 남김없이 잡아들여 씨를 말렸을 것이다. 철혈 재상 올랜도 같은 느낌이군.

어쨌든 올랜도가 건넨 명부를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황후 도전자가 많았다. 보통은 가문들끼리 협의가 돼서 한 가문을 밀어 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올랜도는 대체 이런 걸 언제 다 체크하고 있었지? 역시 대단해.


“물론 폐하는 그런 어설픈 수작에 넘어가실 분이 아니지요. 하지만 그 수작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면 장담할 수 없습니다. 원래 사내들이란 어리고 보얀 여자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꼬리를 치면 결국에는 넘어가게 되어 있는 종자거든요.”

“정말 다들 그럴까요?”

“사람 마음이란 게 순식간에 흔들리는 거랍니다. 사실 자기 좋다는 여자 마다할 이유가 뭐 있겠어요. 더욱이 다들 그렇게 싱싱하고 화사하기까지 한데.”

흠, 좋다고 매달려도 마다하는 사람 있던데. 싱싱하고 화사하지 못했던 탓인가.


“영애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전반적인 흐름이 매우 기분 나쁜 쪽으로 가고 있는 게 더 큰 문제라고 봅니다.”

“전반적인 흐름? 그런 것도 있어요?”

“외람된 표현이지만, 마치 챌린지처럼 퍼져 나간다고 할까요. 냉정하고 까칠한 황제 폐하 사로잡기 같은.”

진, 인기 많구나.


“요즘 폐하께서 별궁에는 얼마나 자주 오십니까?”

“응? 그러고 보니 요즘 통 못 뵈었네. 마지막으로 뵌 지 열흘이 넘었나? 정무가 많이 바쁘신가 봐요.”

내 말에 올랜도가 기가 찬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열흘씩이나 기별이 없었는데 지금 그런 말씀이 나오십니까! 어휴, 정말 어쩌면 좋아. 각하께선 황후가 될 마음이 있기는 하신 겁니까? 황자님들을 황태자로 만들 생각이 없으신 거예요? 아니면 따로 믿는 데라도 있으신 겁니까?”

올랜도가 그간 꾹 눌러 왔던 울화를 터뜨리며 따져 물었다.


“아니…… 바쁘면 그럴 수도 있지. 나도 그동안 바빴고. 그리고 우리는 떨어져 살았던 기간이 꽤 돼서 며칠 못 보는 건 익숙한데요?”

“제발 그런 말씀 마세요. 막말로 폐하께서 정무로 바쁘신지 다른 용무로 바쁘신지 어떻게 아나요.”

“올랜도도 잘 알겠지만, 솔직히 부부가 어느 정도 지나면 늘 붙어 다니고 그러지 않잖아요?”

“그런 말씀은 황후가 되신 이후에나 하세요.”

올랜도는 편두통이 왔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댔다. 그리고 뭐라고 혼잣말을 중얼중얼하더니 문득 내게 물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으신 거지요? 이 올랜도가 모르는. 그렇지요?”

“음, 사실 사업을 열심히 하려는 것도 황후가 되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아아!”

올랜도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올랜도, 성격이 많이 급해졌네? 감정 기복도 심해진 것 같고.

잠시 후 올랜도가 냉정을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날파리들에게 일일이 신경 쓸 필요는 없지요. 한 번 입궁한 이후로 얼씬도 않는 영애가 대부분인 걸 보면, 폐하께서 나름 처신을 잘하고 계신 듯하고요. 그런데 조금 거슬리는 건 바로…….”

올랜도는 아까 그 명부에서 몇몇 이름을 짚었다.


“이렇게 여러 차례 들락거리는 이들이 있다는 겁니다. 폐하께서 어떤 여지를 주셨으니까 이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랜도가 가리킨 곳을 보니 몇몇 이름 옆에 들락거린 횟수로 추정되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소름, 올랜도 당신이 더 소름이네.


“특히 이 영애, 에스더 베스티안. 벌써 다섯 차례나 입궁하지 않았습니까? 베스티안이라면 공신 가문 중 하나로, 현재 세력도 가장 막강합니다. 귀족파에서 황후 후보로 가장 밀 만한 영애죠.”

에스더 베스티안이란 이름 옆에 기입해 놓은 메모에는 열아홉 살에, 미모가 특별히 뛰어나다고 되어 있었다.


“제가 살짝 겁을 좀 줄까요?”

“응?”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만나서 매운맛을 좀…….”

“어휴, 제발 그러지 말아요. 그리고 올랜도가 오히려 당할지도 몰라요. 요즘 어린 영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최근 사교계에서 일어난 사건 몰라요?”

귀부인 몇 사람이 사교계 기강을 잡겠다며 갓 데뷔한 영애들에게 텃세를 부렸다가 도리어 봉변을 당한 사건 말이다.

‘무서운 것 없는 요즘 영애들’이란 제목으로 제국 신문에 기사도 실렸잖아.


“제가 그런 극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각하께서 조금만 더 신경을 써 주시면 좋죠. 폐하께선 바탕이 반듯한 분이니, 각하가 조금만 나서 주시면 외도하실 일은 없을 텐데요.”

“폐하가 외도하는 건 확정인가요?”

“조금 기다려 보시면 절로 알게 되실 거예요. 바람피우는 남자들이 흔히 보이는 특징이 있거든요.”

“바람피우는 남자들 특징?”

“갑자기 선물을 한다거나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한다거나 잘해 준다거나.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보이며 다정하게 구는 거죠. 켕기는 게 있으니 그러는 거겠죠?”

안 하던 짓을 하며 다정히 군다라.

하긴 진이 갑자기 그런 행동을 한다면 나라도 의심이 가긴 하겠네.

그나저나 까칠한 진이 영애들에게 그렇게 인기가 많다니. 황위 빨인가? 황제 정복 차림이 근사하긴 했지. 질투 나네.

* * *



“폐하, 언제까지 시위하실 겁니까?”

“뭐?”

플록스가 갑자기 귀신같은 소리를 해서 속으로 놀랐다. 눈치 없이 엉성하게 굴다가도 느닷없이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소리를 하곤 했다.


“……어떻게 알았지?”

“아무리 바빠도 저희 보좌관들을 따돌리고 몰래 별궁에 다녀오시던 분이 벌써 열흘 넘게 본궁에 틀어박혀 계신데 어떻게 모르겠습니까.”

“열심히 감시하고 있군.”

“그런데 레이디께선 폐하가 시위하시는 걸 알고나 있습니까?”

“…….”

플록스가 오만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솔직히 폐하께서 레이디한테 해 주신 게 뭐 있다고 시위씩이나 하십니까?”

“해 주고 싶어도 본인이 관심 없다는데 뭘 어떻게 해?”

“저러다 레이디가 또 훌쩍 떠나시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북부 왕국에서 어떻게 모시고 왔는지 잊으셨습니까?”

“지금 협박하는 건가?”

“충언을 드리는 거지요. 어서 선물이라도 준비해 더 늦기 전에 별궁으로 달려가시지요.”

“선물? 갑자기 선물이 어딨어?”

“꼭 값비싼 물건이 아니라도 마음을 전할 수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평소 레이디가 좋아하시던 걸 떠올려 보십시오.”

북부로 떠나기 전, 플로라리아 축제 때 꽃다발을 받고 좋아하긴 했는데…….


“플록스, 달의 온실에는 겨울에도 꽃이 있나?”

 

* * *


 
십여 일 만에 진이 별궁에 나타났다. 커다란 꽃다발을 손에 들고.

저게 바로 안 하던 짓인데. 본인도 어색한지, 매우 겸연쩍은 얼굴로 꽃다발을 내밀었다.

오늘이 무슨 날인가? 아무 날도 아닌 것 같은데. 어쨌든 꽃은 예쁘네.


“고마워. 겨울인데 꽃이 참 싱싱하고 예쁘네.”

“달의 온실이라고, 황후 전용 온실에서 빌려 왔지. 이제 당신이 돌보면 되겠네.”

“황후도 아닌걸. 그래도 온실엔 가 보고 싶다.”

“온실을 하나 더 지을까? 거기 당신 좋아하는 버섯을 종류별로 키우는 거야. 이름은 당신이 지어 줘.”

다정하다. 잘해 준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리고 언제 당신 좋아하는 연극 보러 갈까? 아니면 극단을 황궁으로 불러도 좋고.”

갑자기 함께 시간을 보내자고 한다. 그것도 내가 좋아하는 걸 하자면서.

진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각하, 그럴 땐 직설적으로 물어보는 것도 방법이에요. 찔리는 게 있을수록 반응이 격한 법이죠. 적반하장으로 되레 화를 내는 경우도 많고요.」

나는 올랜도의 말을 떠올리며 진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괜히 혼자 의심하고 오해를 키우는 것보다 이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름 다정한 말들을 해 놓고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진에게 나는 물었다.


“진, 다른 여자가 생긴 거야?”

진의 눈이 쟁반만 하게 커졌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말았다.

평소의 진이라면 무슨 헛소리냐는 듯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말았을 텐데. 진의 저 표정은 크게 동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뭐? 지금 뭐라고 했지?”

나직하지만 싸늘한 목소리로 묻는 진은 매우 화가 난 게 분명했다. 거칠어진 숨소리와 가파르게 좁아진 미간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적반하장으로 화를 내는 경우가 많다더니. 평소의 진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을 텐데. 어쨌든 저렇게 파르르 흥분할 정도의 질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진의 반응에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다른 여자라니, 무슨 뜻이지?”

“진…… 좋아하는 여자가 생긴 거야?”

“하!”

천장을 올려다보고 선 진의 목울대와 가슴이 거칠게 요동쳤다.


“누가 무슨 소릴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니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당신은 나를 그런 인간으로 봤군. 그러니까 열흘 넘게 안 보인 이유가 다른 여자랑 노닥이느라 그랬다?”

“아니야?”

“아니냐고? 내가 왜 해명해야 하지? 당신 멋대로,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

진은 문득 자신이 들고 온 꽃다발을 보더니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저 꽃다발도, 버섯 온실도, 연극을 보러 가자는 제안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겠군.”

진의 씁쓸해하는 얼굴을 보자 가슴이 아려 오며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아, 내가 뭘 하려고 했던 거지? 내가 진에게 정말로 바라는 게 뭐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냐고.

진이나 다른 사람을 핑계 대지 말고, 내가 하고 싶은 얘길 하라고.


“진…… 다른 여자 좋아하지 마. 후궁도 들이지 마.”

“하, 다른 여자가 누군데?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로제트……?”

실수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걸까. 나는 진 앞에서 오랜만에 너무 부끄러운 짓을 해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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