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8화. 황후를 황후라 부를 뿐 (108/110)


#108화. 황후를 황후라 부를 뿐
2022.12.12.



 


“진…… 다른 여자 좋아하지 마. 후궁도 들이지 마.”

이런 말을 하는 내 눈에서 말릴 틈도 없이 무언가 떨어졌다.

설마 내 눈에서 나오는 이 뜨뜻한 액체가 눈물? 청승맞게 눈물을 짜고 있는 이 화상이 내 눈?


“하, 다른 여자가 누군데? 당신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로제트……?”

내 난데없는 강요에 기가 차서 항의하려던 진은 더 난데없는 눈물에 표정이 완전히 굳었다.

다 잊었다고, 이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내 몸의 세포들은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프러너스가 남긴 쓰디쓴 배신의 감각을.

진은 시비를 가리는 것을 포기한 듯 아무 말 없이 내 팔을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를 안은 채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약속할게. 다른 여자를 좋아하는 일도, 후궁을 들이는 일도 없을 거야.”

본의 아니게, 진에게 얼렁뚱땅 목줄을 채워 버렸다.

나는 진의 품에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부끄러움을 아는 인간이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황후가 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나보다 더 좋은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큰소리치며 도망칠 계획까지 세울 때는 언제고.

다른 여자 좋아하지 마? 후궁 들이지 마?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그것도 비겁하게 울면서 하다니!

창피해. 자존심 상해.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한편으로는 안도가 됐다. 진이 나를 외면한다면, 내가 그동안 자신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조금도 견디지 못할 것임을 지금 이 순간 여실히 깨달았다.


“당신은 대체 나를 얼마나 나쁜 놈으로 만들 작정이야?”

진이 내 정수리를 자신의 턱으로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누가 보면 아내나 울리는 희대의 난봉꾼인 줄 알겠어. 내가 어디 가서 콧바람이라도 쐬고 와서 바람둥이 소리를 들으면 이렇게 억울하지는 않겠군.”

내가 좀 진정된 것 같자 진이 농담처럼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열흘 넘게 나 삐쳤소 하고 시위한 결과가 겨우 이거라니. 바람둥이라는 오명만 얻고. 그런데 내가 삐친 걸 알고는 있었나?”

나는 진의 가슴에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물었다.


“나한테 삐쳤어? 왜?”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자, 진이 허탈한 웃음을 튕겨 내며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삐친 것조차 몰랐군. 지난 열흘간 내가 뭘 한 거지?”

“뭐가 서운했던 건데? 말해 줘. 나도 당신한테 털어놨잖아. 나한테도 만회할 기회를 줘야지.”

내가 열의를 불태우자, 진은 도리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당신도 내게 약속해 줬으면 좋겠어. 나를 좀 더 남자로 사용해 준다고.”

“응?”

“황제가 아니라 당신의 남편으로 대해 줬으면 좋겠어.”

“그동안도 그랬던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되는데?”

“우선은, 이제부터 매일 밤 여기 와서 잘 거니까, 함께 차분히 얘기를 나눠 보지.”

“뭐?”

“그렇게 이상한 표정 짓지 마. 말 그대로 침소를 이곳으로 정할 거라는 뜻이니까. 아이들 얼굴도 자주 볼 수 있고, 그래야 외도한다는 오해도 안 살 테니.”

“잠만 잔다고…….”

“잠만 잔다고는 안 했는데? 잠도 자고, 다른 것도 해야겠지.”

흠흠, 서로 바쁘고 피곤해서 다른 거 할 시간은 없을 텐데요. 말은 저렇게 해도 진이 정무 때문에 자주 밤을 새운다는 얘길 플록스에게 전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그런 사람을 의심했네, 미안하게…….

물론 아무리 일이 바빠도 외도도 하고 사생아도 만들고, 할 건 다 하고 살긴 하더라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진의 입장에선 나와 함께한 시간이 짧고 미흡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에겐 그와 함께한 전생의 기억이 있지만, 그에겐 없으니까.

우리의 몸과 마음에 익은 시간이 다르다는 것을 자꾸만 깜빡 잊게 된다. 진에 대한 나의 배려가 모자랐다고 인정해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거라면 무슨……?”

“뭐겠어? 버섯 온실 짓는 것도 의논하고, 어느 극단의 무슨 연극을 봐야 재미있을지도 상의해야지.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하나하나 알아볼 참이야.”

“…….”

“혹시 기대한 답이 아닌가? 다른 걸 원하면 얼마든지 얘기해.”

저 사람 지금 나 놀리는 거지? 바람둥이로 몬 복수인가? 아니면 삐친 거 몰라 준 복수?


“그렇게 겁먹은 표정 짓지 말라고. 난 아주 순종적이고 조신한 남편이니까. 물론 로제트 외 여자 종신 금지령을 선고받은 신체 건강한 남자이기도 하지.”

진이 뒤끝이 좀 긴 스타일이었지. 괜히 엉뚱한 오해를 해서는. 올랜도 내일 나 좀 보자.


“일단 저 꽃다발에 대한 답례는 키스 정도로 만족할까? 그리고 함께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취하면서 내 아내를 오해하게 만든 내 불찰이 뭔지 차근차근 들어 봐야겠네.”

내가 그에게 목줄을 채운 게 아니었나?

* * *



“아름다워. 빛깔도 형태도. 내가 이런 표현에 서툰 거 알지? 진심으로 감탄 중이야.”

“고마워. 당신 눈에 다 드러나니까 걱정 마.”

드디어 버섯 램프의 첫 번째 모델이 완성됐다. 커다랗고 평평한 모양의 갓에 대가 굵직하고 나지막한 편이라 안정감 있는 디자인.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형태에 중점을 둔 램프였다.

앞으로 내가 출시할 버섯 램프에는 ‘황후의 버섯’이라는 상표를 붙이기로 했다. 이건 진의 아이디어였다. 나와 관련된 것에는 무조건 ‘황후’라는 말을 꼭 붙이라고 당부했다.


“폐하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이 첫 번째 램프에 ‘태양의 영광’이란 이름을 붙여도 될지요?”

“그야말로 영광이군.”

‘황후의 버섯’이지만, 첫 번째 램프의 이름만큼은 진에게 바치고 싶었다.


“나와 함께 샘플을 만드느라 모텝 왕자가 고생했어. 이제 올랜도가 선발한 부인들이 판매할 제품을 만들기 시작할 거야.”

첫 번째 모델은 귀족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우선은 고급 사치품으로 명성도 얻고 수익도 챙기기로.

두 번째 모델 역시 귀족들을 위한 명품으로 이름을 알릴 것이다.

어차피 고가의 광원인 마정석이나 페트룸을 써야 하는 장식용 램프 자체가 아무나 소유할 수 없는 물건이었다. 보석이나 예술품처럼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제국에는 빛의 차별이 존재했다. 지위가 높고 부유한 사람들은 밝게, 지위가 낮고 가난한 사람들은 어둡게 살아야 했다.

그러므로 램프라는 물건은 사치품 중의 사치품이었지만, 나는 세 번째, 네 번째 램프에 대해서는 좀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모텝 말이야, 자기 나라로는 안 돌아갈 건가? 승계 여행만 하고 정작 왕위는 물려받지 않을 셈인가?”

모텝 이야기가 나오자 진이 삐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말린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모텝의 행보가 걱정스러운 게 당연했지만, 그에 더해 모텝은 진을 약 올리는 데 재능이 있었다.

쌍둥이들과의 친밀함을 과시하는가 하면, 나와 오랜 시간 함께 작업하는 것을 가지고도 진의 속을 살살 긁어 댔다.

바빠서 아내나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할 수 없는 진의 초조함과 미안함을 잘도 공략하는 것이었다.

뭐, 나야 모텝 덕분에 진이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것이 나쁘지 않기에 모른 척하고는 있지만.


“모텝이 좀 주책맞기는 해도 공예 솜씨나 디자인 감각은 그만한 사람이 없어. 사업 파트너로서는 훌륭하지.”

이렇게 슬쩍 경쟁심을 부추기면서.

아무리 그래도 황후 후보를 자처하는 영애들과 그 출신 가문들에게 시달리는 나보다는 나을 것이다. 초연하려 해도 어찌나 지속적으로 조직적으로 속을 긁는지.

차라리 권력욕에 불타 덤벼드는 정략 유형은 나은 축이었다.

가장 골치 아픈 건 연모 유형. 황후 간택이고 정략결혼이고 다 필요 없고 정말로 폐하를 연모하게 되었다고 호소하는 부류였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미모가 돋보이는 공녀, 에스더 베스티안이었다. 솔직히 그 영애 때문에 골치가 아파 죽겠다.

진심으로 황제 폐하를 사랑하고 있으며, 자신을 돌아봐 주지 않는 냉담한 폐하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다나. 아, 쟤를 어쩌면 좋아.

아직 어린 데다 부족한 것 없는 환경에서 자라 그런지, 자신의 감정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불륜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하고. 딱히 그녀의 잘못이라고도, 진의 잘못이라고도 할 수 없는 상황.

더욱이 내게 전혀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무려 몇 생에 걸쳐 사랑한다고 매달리는 어리석고 무모한 짓을 되풀이한 나는, 누구한테 함부로 말할 처지가 못 됐다.

뭐 그런 뻔뻔하고 정신 나간 인간이 다 있느냐고 소리를 꽥꽥 지르며 에스더를 성토하는 건 올랜도의 몫이었다.

올랜도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황궁을 들락거리는 이들을 주시하며 명부를 작성하는 데 열의를 쏟고 있었다.

그래도 올랜도의 도움으로 램프 제작에 참여할 부인들을 순조롭게 모집할 수 있었다.

웰츠 호텔의 경영 실무를 뒤에서 오랫동안 맡아 온 올랜도였기에, 사업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처음 구상대로 버섯 램프를 제작하는 일은 미혼모와 전쟁미망인, 이혼한 부인들에게 맡겨, 그들이 자립할 수 기반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사교계와 사업계에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던 올랜도이기에 추천을 받아 편하게 사람을 모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일부러 제도와 제도 근교의 마을들에 직접 행차하거나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직원 모집 공고를 냈다.

그리고 공고에는 반드시 ‘황후 직속 사업’이라는 문구를 크게 넣었다.

여기저기 다니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후께서 구상하신’, ‘황후께서 직접 참여하신’, ‘황후께서 특히 관심을 두고’, ‘황후 폐하께서 여러분을 각별히 생각하여’ 등등 말끝마다 황후를 팔았다.

그 결과, 직원으로 선발되어 버섯 램프를 만들게 된 부인들은 물론, 이들의 가족, 이들이 사는 마을의 이웃들도 황후가 운영하는 일터에 다니며 황후가 주는 급료를 받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게 되었다.


“황후 폐하께서 우리 같은 사람들한테까지 마음을 써 주다니, 참으로 곱고 은혜로운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니까요. 제국의 달이라는 별호 그대로 은은한 달빛 같은 분이세요. 외롭고 어두운 곳도 고루 비춰 주시니 말입니다.”

“저, 그런데, 황후 폐하가 실은 황후 폐하가 아니라면서요?”

“그럼 누구신데요? 살다 살다 그런 헛소리는 처음 듣네요. 대체 누가 그런 소릴 합디까?”

“그 왜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관리 영감 있잖아요. 뭐, 원래는 황후라고 부르면 안 되는 거라나.”

“아니, 황후를 황후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부른대?”

“별 거지 같은 소릴 다 듣겠네. 황후를 황후라고 부르는데 웬 시비여. 그럼 황제라고 부를까?”

이처럼 어느 순간부터 나, 로제트 앰브로시아와 황후는 동의어가 되어 갔다. 혹여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기라도 하면 폭동이라도 일어날 듯한 기세였다.

귀족들이 인정을 하든 말든, 실제로 대관식을 치렀든 아니든, 제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나는 이미 황후였다.


 
이런 식의 대가를 바라고 벌인 일은 아니었는데. 진과 플록스, 올랜도, 그리고 제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문 〈엠파이어 스탠더드〉의 사주 겸 주필인 척 슈발럼의 합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바라건대, 그 살벌한 계략의 와중에 내 진심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전해졌다면 기쁘겠다.

그리고 고맙게도 기왕 이렇게 물살을 탔으니, 다음은 굳히기 아니겠는가.

세 번째와 네 번째 ‘황후의 버섯’을 선보일 때가 되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가 귀족들을 겨냥한 ‘태양의 영광’이었다면, 세 번째는 ‘달의 은총’, 네 번째는 ‘별의 노래’라고 이름 붙인 램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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