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9화. 바뀔 거야, 네가 온다면 (109/110)


#109화. 바뀔 거야, 네가 온다면
2022.12.16.


16711736281102.jpg

 

16711736281107.jpg

“양송이 모양이 좋겠어. 귀여우면서도 야무져 보이잖아?”

세 번째 황후의 버섯은 양송이로 결정됐다.

‘달의 은총’이라 이름 지을 세 번째 모델은 앞선 두 종의 램프보다 훨씬 더 튼튼하고 성능이 좋아야 했다. 연료비가 많이 들지 않아야 했고.

왜냐하면 이 양송이 모양 램프는 장식품이나 사치품이 아니라, 집집마다 가장 자주, 오래 쓰는 생필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양송이 램프는 귀족들이 아니라, 제국민들을 위한 것이었다. 우선 황실의 선물로 가정마다 하나씩 나눠 줄 계획이고, 추가로 살 때도 부담이 너무 크지 않도록 가격을 책정할 생각이다.

물론 첨단 기술이 들어간 램프인 만큼 아주 헐값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서너 달 허리띠를 졸라매면 살 수 있는 현실적인 가격을 고민했다.

보급품이라 해서 디자인에 공을 덜 들였을 거라 생각하면 섭섭하다. ‘황후의 버섯’이란 상표가 붙은 램프는 무조건 예뻐야 한다. 그건 디자이너인 내 자존심이 걸린 문제니까.

제국의 저녁 풍경이 이 램프로 인해 아름답고 아늑해지기를 바란다. 그 빛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 위안과 기쁨이 더 많이 피어나기를.

언젠가 이 램프가 제국민들의 애환이 담긴 친숙한 물건이 될 수도 있겠지. 그때쯤엔 이 램프를 누가 왜 만들었는지도 희미해질 것이다.

왜 하필 양송이 모양인지, 왜 이름이 ‘달의 은총’인지, 상표에 황후라는 말은 뜬금없이 왜 들어간 건지.

진 시더우드와 로제트 앰브로시아라는 사람이 잠시 황궁에 살며 제국을 다스렸다는 것도 몇몇 사람만 기억하는 일이 되겠지.

그런 건 다 잊혀도 이 양송이 램프만은 남아 백성들의 생활이나 풍속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결혼 선물이나 신혼살림 1순위여서 ‘그녀에게 양송이 램프를 사러 가자고 했다’가 청혼했다는 말이 되고, 개구쟁이들이 ‘너희 집에 양송이 몇 개 있어’라며 허세를 떨고, 부모가 장성한 자녀에게 개인 램프를 선물하며 ‘너도 이제 양송이 램프를 가질 나이가 되었구나’라고 말하는 모습.

잠자리에서 혼자 그런 상상을 하며 히죽히죽 웃어서, 진이 몇 번씩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그런 아름다운 공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물밑에선 치열한 협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양송이 램프를 세상에 내놓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할 문제가 연료였다.

모든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답은 하나. 램프에 마법식을 주입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마법식이 주입된 물건은 보통 고가이게 마련이라는 것.

추가 비용도, 자원 낭비도, 공해도 없는 데다, 마법식 기술 자체가 흔하지 않은 첨단 기술이었으니까.

하나의 양송이 램프를 밝히기 위해 마법식 강국인 북부 왕국과 돈독한 관계를 맺어 오지 않았는가.

파격적이고 매력적인 거래 제안, 인맥 동원과 친분 강조, 아부와 유혹, 동정심 자극 등.

그 지독, 아니 위대한 레이디 페를 상대로 갖가지 작전을 펼치고 공을 들인 끝에, 어렵게 마법식 기술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제공받게 되었다.

하, 그때 정말 사업 공부, 사람 공부, 세상 공부 많이 했지.

세 번째 램프인 ‘달의 은총’과 네 번째 램프인 ‘별의 노래’ 출시 사이에 성가신 일도 하나 있었다.

바로 나의 황후 즉위식.

후원의 연못가에 꽃이 필 때를 넘기지 않겠다던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지, 진은 봄에 접어들자마자 귀족들을 사납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나의 위상도 많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누구의 전처도, 어느 가문 출신 이혼녀도 아니었다. 나 자신이 한 가문이고 힘의 주인이었다.

또한 제국민들 사이에서 이미 황후였고, 황제의 유일한 반려자였다.

그러므로 귀족들도 함부로 나를 무시하거나 깎아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귀족 체면과 고집이 있어 쉽게 태도를 바꾸지는 않을 터.

이번엔 반대로 자신들이 무시당하거나 얕보이지 않도록 마지막까지 알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또 귀찮음을 무릅쓰고 귀족 회의에 나가 발언까지 하는 성의를 보이지 않았겠는가. 크게 두 가지 정도 말했다.

첫 번째는 굽히기.

16711736281107.jpg

“나는 백성들의 삶에 관심이 많아요. 원래도 황후의 역할은 음지를 돌보는 것이었죠. 여러분이 황제 폐하를 도와 양지에서 제국을 발전시키고 부강하게 만드는 동안, 나는 조용히 그런 일들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해 온 일들을 보면 내 관심이 어디 있는지 아실 겁니다.”

화려하고 멋지고 돈 되는 건 다 당신들이 꿰차고 하시오. 나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밥그릇 넘볼까 봐 무서워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짖지들 말란 말씀.

두 번째는 으르기.

16711736281107.jpg

“여러분이 보기에 내 자질이 영 미덥지 못하다면 꼭 황후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황후가 될 만한 미덕을 갖춘 분이 그 자리에 올라야겠지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진의 눈총이 내 얼굴을 뚫고 들어오는 줄 알았다. 잠깐만요, 흥분하지 말고 사람 말을 끝까지 좀 들으세요.

16711736281107.jpg

“나는 앰브로시아 영지로 돌아가 그곳을 발전시키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벌여 놓은 사업도 구상해 놓은 사업도 많아서 말이에요. 사업이라는 것도 의외로 재미가 있고 적성에 맞더라고요. 북부 왕국에서 전수받은 것도 적지 않고.”

내가 황후가 되는 게 당신들 이익에 위협이 될지, 앰브로시아 후작으로 돌아가는 게 위협이 될지, 잘 한번 생각해 보라고.

머리가 있다면 말이야. 너무 막강해져 아예 독립해 버린 북부 왕국을 보라고.

좋게 보자면 다 좋잖아? 탐스러운 먹잇감을 놓고 귀족들과 사사건건 부딪치며 그악스럽게 굴 것 같지도 않지. 황후의 후광을 업고 위세를 부릴 친인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렁하고 어설퍼 보이는 것이 조종하기 쉬울 것 같고.

어때, 나 완전 괜찮은 황후지?

이렇게 해서 며칠 후, 나는 복잡하고 지루한 대관식 겸 결혼식을 치렀다. 그리고 지금은 진과 둘이서 몰래 대연회장을 빠져나와 후원의 연못가에 앉아 있다.

무거운 관도 내려놓고 발 아픈 신발도 벗어 던졌다.

그날처럼 쨍하게 파란 연못 주변으로 예쁜 꽃들이 피어 있었다. 햇살도 바람도 내 마음 같은 날이었다.

결혼도, 황후 즉위도 내겐 특별한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보다는 지금 내 눈앞의 풍경과 화창한 날씨, 기분 좋은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삼나무 향기가 더 큰 감흥을 주었다.

우리의 결혼과 나의 황후 즉위에 가장 기뻐하며 감격한 것은 이번에도 플록스였다. 올랜도도 자신의 일처럼 뿌듯해했고.

아, 가장 신이 났던 건 쌍둥이들이었지. 얼음으로 만든 거대 조각상을 아작 내고 식장을 엉망으로 망가뜨릴 만큼.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형식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한바탕 연극일 뿐. 실제로 내 삶의 무엇도 증명해 주지 않았다.

옆에 있는 남자를 보았다. 그 여리고 아름답던 소년은, 언제 이렇게 더 멋있는 남자가 됐담.

어렸어도 내 안목은 훌륭했단 말이지. 어떻게 운명의 짝을 한눈에 알아봤는지.

16711736281107.jpg

“진, 이거 먹을래?”

나는 짓궂게 웃으며 진에게 자두 쿠키를 내밀었다. 이 순간을 위해 잊지 않고 자두 쿠키를 챙긴 나의 집요함.

진은 내민 쿠키를 멍하니 들여다보다 말했다.

1671173628113.jpg

“아니, 오늘은.”

우리 사랑의 수호신이자 운명의 연결고리인 자두 쿠키를 마다해? 사랑이 식은 거야?

기껏 준비한 장난, 아니 성의를 받아 주지 않아 무안해진 나는 팩 토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16711736281107.jpg

“어렸을 때는 쿠키 하나에 눈이 번쩍 뜨이더니! 변한 거야?”

1671173628113.jpg

“변했지. 당신을 만나고 내 인생이 완전히 바뀌었지.”

16711736281107.jpg

“갑자기…… 그렇게 나오면…….”

내가 너무 실없는 사람 같잖아!

1671173628113.jpg

“이 연못가에 앉아 있던 나는 늘 비참한 기분이었어. 앞으로의 내 삶도 다르지 않을 것 같았지. 영원한 어둠, 비참함. 그래, 그 나이에 이미 비참함이 무엇인지 알아 버렸지.”

나는 쿠키를 스르르 내려놓았다. 진에게 이곳은 마냥 행복하게 기억되는 장소가 아니구나.

1671173628113.jpg

“그랬던 내가 제국의 황제가 되어 이곳에 있다니.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로제트, 당신을 만나서. 당신이 내게 와 주어서.”

16711736281107.jpg

“진, 나도 당신이 없었으면 정말 불행했을 거야. 불행하다는 사실조차 몰랐을지도 모르지.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야.”

진이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며 내 한쪽 뺨에 크고 따뜻한 손을 가져왔다. 그 손의 온기를 더 가까이 느끼고 싶어 나는 고개를 살짝 기댔다.

1671173628113.jpg

“우리가 결국 여기까지 왔네.”

16711736281107.jpg

“그러게. 우리가 함께 여기까지 왔어.”

예식에서도, 대관식에서도, 연회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회가 이제야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쩌다가 우리가 함께 여기에.

16711736289156.png

 

1671173628113.jpg

“내 삶은 당신 때문에 완전히 변했어. 그러니 오늘은 쿠키가 아니라 다른 걸 먹어야겠지.”

16711736281107.jpg

“으응?”

1671173628113.jpg

“아, 쿠키를 다르게 먹는 것도 괜찮겠네.”

변했네, 변했어. 청순한 소년이 요망한 황제로.

그런데 어째 내 취향도 변한 것 같단 말이지.

딱 기다려, 진 시더우드.

다른 걸 먹든, 다르게 먹든. 삶이 또 한 번 뒤바뀔 테니까.

* * *

네 번째 램프인 ‘별의 노래’는 거리로 나갔다.

거리 중에서도 번화가가 아닌, 변두리나 후미진 곳에 있는 위험하고 황량한 거리에 주로 걸리기 시작했다.

제국에는 빛의 차별이 존재했는데, 그건 집이나 건물뿐만 아니라 동네나 거리도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나 그들이 다니는 거리는 밝고 휘황했고, 빈민가는 동네나 거리도 음침하고 어두웠다.

빈민가에서는 갖가지 범죄가 많이 일어났는데, 거리가 어두운 것도 높은 범죄율에 한몫했다고.

그래서 나는 상상하곤 했다. 어둡고 지저분하고 위험한 거리가 환해지고, 나아가 아름다워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거리가 밝고 아름다워지면 사람들의 기분도, 생각도, 생활도 분명 달라질 거라고 예상했다.

기왕이면 따뜻하고 아늑한 빛을 내는 램프들을 빈민가 곳곳에 설치했다. 사람들은 황후 즉위를 축하하는 축제라도 벌이나 했다고.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램프는 사라지지 않았고, 변함없이 거리를 밝혔다.

네 번째 버섯 램프가 가지고 온 변화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어둠은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었다. 어둡고 밝은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빈민가의 범죄율이 낮아지고, 동네 분위기가 바뀌고, 사람들의 표정이 달라지고. 그렇게 또 누군가의 삶이 변하고 있었다.

어둠도, 비참함도, 불행도 피해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삶을 오직 빛과 즐거움과 행복으로만 가득 채우는 것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그런 일을 겪지 않도록 빌거나 피하는 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 그 고통을 전가하는 일이 아니라, 어둠과 비참함을 함께 겪고 이겨 낼 사람을 찾는 것이리라.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다면,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준다면, 삶은 바뀔 것이다. 어둠도, 비참함도, 불행도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수차례 반복된 삶이 내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해답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내게 닥쳐온 현실을 부정하고 모든 걸 희생해서라도 원하는 것을 끝끝내 손에 넣으려 하기보다는, 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고 함께 견뎌 줄 사람, 그 사람을 나는 찾아나서야 했다.

진이 내게 선물한 진실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16711736281107.jpg

“거봐, 바뀔 거라고 했지.”

다른 걸 먹고, 다르게 먹은 그날. 경고했던 대로 우리에게 또 한 번 큰 변화가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