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또 만나
(110/110)
110화. 또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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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화. 또 만나
2022.12.19.
가운 사이로 보이는 저 근육들은 아무래도 적응이 안 된다. 볼 때마다 화들짝 놀라게 하는 비인간적인 흉부, 복부, 대퇴부 그리고 그 너머…….
대체 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어떻게 하면 학대받아 코스모스처럼 가녀렸던 소년이 저렇게 될 수 있는 거냐고.
황제의 몸이 저렇다는 건 제국의 일급비밀이어야 한다. 누설되는 날엔 큰일이 날 테니. 저렇게 위험하고 치명적인 건 황후인 내가 죽을 때까지 혼자 끌어안고 가야지.
후원에서 연회장으로 돌아가 예의상 몇 시간 자리를 지키다 본궁에 새로이 꾸민 침소로 갔더니, 생각지 못한 광경이 나와 진을 맞이했다.
그 요란하게 꾸며 놓은 모양새를 보고야 나는 오늘이 우리의 초야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초야라니 참으로 새삼스럽지만, 어쨌든 오늘 정식으로 예식을 올렸으니 이 밤이 공식적인 황제와 황후의 초야인 것.
저 화사한 장식과 야릇한 조명이 매우 민망하군. 진도 미처 생각지 못한 사태겠지? 플록스의 작품일까? 옆에 선 진을 흘끔 곁눈질하니 기분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지금.
저렇게 가운을 입은 것도 아니고 벗은 것도 아닌 요망한 자태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황제 폐하.
“줄 게 있어.”
마침내 내 앞에 우뚝 선 진이 왠지 쑥스러운 기색을 띠며 말했다. 줄 거? 그런데 눈은 왜 그렇게 이상하게 뜨고 있지? 눈빛이 쓸데없이 요염한데?
설마설마, 준다는 게 혹시…….
“뭔데?”
“유치한 거.”
유치한 거? 정말로 그런 거야? 하긴, 진은 원래 생긴 거랑은 다르게 애교가 넘치는 사랑꾼이었지.
‘나를 네게 줄게’라고 말한 진은 가운을 엉성하게 여민 끈을 잡아당겼다. 얇은 가운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런 아찔한 애교는 어떻게 받아 줘야 하는 거지! 난 모르겠어!
하지만 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상자 하나를 새침한 얼굴로 내밀었다.
내 설레발과는 다른 전개에 나는 상자를 받아 든 채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을 쳐다보았다. 설마 결혼 예물을 준비한 거야?
난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는데.
“당신이 유치하다고 질색을 해서 평생 묻어 둘까 했는데.”
내가 질색을 했다고? 언제, 뭘?
“오늘은 세상에서 가장 유치한 사내가 될 생각이야. 당신이 아무리 비웃어도.”
대체 이 안에 뭐가 들어 있기에…….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상자를 얼른 열어 보았다.
이건!
“그래, 난 내 마음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꺼내 놔야 안심이 되는 유치한 인간이야. 웃어, 맘껏.”
상자에서 나온 건 북부 왕국의 수정 화원에서 박제해 온 진의 고백이었다. 투명한 얼음 결정이 된 진의 마음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랑해, 로제트.’
이것 때문이었구나. 그때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으로 주저했던 이유가.
사방이 새하얀 눈과 반짝이는 얼음으로 뒤덮인 수정 화원에서 진이 잿빛 눈을 일렁이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저렇게 생겨서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나는 진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기뻐, 너무나 기뻐, 진.”
“유치해서 싫지 않고?”
“이제 보니 나 유치한 거 좋아하나 봐.”
귓가에 내려앉는 진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았다.
“그럼, 아까 후원에서 말한 대로 쿠키 말고 다른 걸 양껏 먹을 자격이 충분한 건가?”
진이 마치 착한 일을 하고 상을 바라는 아이처럼 물었다.
으음? 그동안 어디 갇혀서 쿠키만 먹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고요. 매일 거르지 않고 균형 있는 식단을 골고루 야무지게 섭취해 놓고는!
사실 힘은 진이 쓰는데 내가 왜 고단한지는 모르겠지만, 남몰래 코피도 몇 번이나 쏟았는데.
나의 억울함엔 아랑곳없이 진이 내 허리를 으스러질 듯이 끌어안으며 말했다.
“솔직히 그동안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황후 책봉도 늦어져 내가 얼마나 면목이 없고 미안했는지 몰라. 그래서 당신을 내 마음만큼 안지 못했지.”
뭐라고요? 이거 입장 차이가 상당한데? 그럼, 마음껏 안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올랜도도, 시아도 요즘 내 볼이 눈에 띄게 홀쭉해졌다며 걱정했는데. 가만히 있다가는 진의 기억이 어디까지 조작될지 알 수 없었다.
진이 나중에 딴소리하지 못하도록, 다시는 미흡하다는 불평을 입 밖에 내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 줘야겠어. 다시는 음식 투정 따위 하지 못하도록!
나는 빙글 돌아 진의 팔 사이에서 몸을 빼낸 다음, 있는 힘을 다해 진을 침대 위로 밀어 넘어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진은 저항 한번 하지 못하고 맥없이 털썩 쓰러진 채 당황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진 시더우드, 이제 와서 놀란 사슴마냥 눈을 동그랗게 떠도 소용없어.
“진, 실은 나도 당신한테 미안해서, 그동안 내 마음을 다 표현하지 못한 것 같아. 우린 이제 제국이 다 아는 부부니까, 여한 없는 밤을 보내도록 해요…… 여보!”
오늘은 기억에 길이 남을 특식입니다, 진 시더우드 폐하!
* * *
“밤새 평안하셨습니까, 폐하.”
“그건 왜 물어?”
“예? 신하로서 드리는 의례적인 인사였습니다.”
황제는 보좌관의 인사에 왠지 예민하게 반응했다.
‘간밤에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가? 초야에 파국을 맞는 부부가 그렇게 많다던데. 그러게 좀 잘하시지.’
플록스는 진의 눈치를 살피며 사태를 파악하려 애썼다. 정말이지 손이 많이 가는 부부다.
“쓸데없는 짓 말고 일전에 명한 것이나 어떻게 됐는지 보고하도록.”
플록스의 눈이 어지러이 굴러가는 걸 눈치챈 진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 예. 마침 쿠엔티노 경의 첩보가 도착한 참입니다. 역시 폐하께서 예상하신 대로, 제 버릇 남 못 주고 추잡한 짓을 꾸미고 있었더군요.”
얼마 전 진은 로제트의 호위 기사인 쿠엔티노에게 은밀한 임무를 지시했다. 프러너스 카를슈테인의 행적을 파악하는 특무.
진은 카를슈테인을 너무 쉽게 놓아주었다고 후회했다. 그날 로제트의 눈물을 보고서.
로제트가 복수를 원하지 않았기에, 그에 대한 일은 그저 그렇게 묻어 두는 것이 나은 줄 알았다.
하지만 작은 오해에도 불안에 떨며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보고 자신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깨달았다.
카를슈테인은 로제트에게 지울 수 없는 배신의 상처를 남겼다. 로제트는 마치 과거사에 초탈한 듯 굴었지만, 사실 그녀 안의 아이는 전혀 치유되지 못했다.
피해자는 평생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데, 가해자는 아무런 반성도, 자각도 없이 활개 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최악의 경우, 로제트와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길 수도 있는 일.
과연 쿠엔티노가 보내온 소식은 우려했던 사태가 이미 현실로 벌어지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카밀의 왕을 구워삶은 모양입니다. 외교 사절로 다니던 시절부터 관계가 무척 돈독했다고요. 그곳 왕녀를 유혹해 부마 자리까지 꿰찰 모양이랍니다. 나 원, 종마도 아니고.”
그저 카밀 왕가를 제 손아귀에 넣는 데 그친 것이 아니었다. 한번 정령의 돌과 흑마술의 위력을 맛본 카를슈테인은 그것으로 세상을 제 발아래 두겠다는 헛된 욕망을 버리지 못했다.
그는 다양한 자원이 풍부한 반면, 군사력은 약한 하말린을 치자고 카밀 왕을 충동질했다. 하말린을 장악한다면 제국도 충분히 넘볼 수 있을 거라고.
카밀 왕은 제국까지 넘볼 정도로 야심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나라나 눈독을 들이고 있는 하말린 정도는 공략해 봐도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을 터.
무엇보다 딸아이가 제국 출신 공작에게 홀딱 빠져 있으니. 카를슈테인의 말에 적당히 장단을 맞춰 줘야 하리라.
“그렇지만 직접 관여하기에는 시기도, 모양새도 좋지 않습니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제국 황제의 행보를 크고 작은 나라들이 주시하고 있을 테니까요. 잘못하면 타국에 대한 간섭으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플록스의 지적을 곰곰이 곱씹던 진이 물었다.
“카밀 왕은 어떤 인물이지?”
“성군도 폭군도 아닌, 전형적인 세습 군주입니다. 어느 정도의 인정도, 야비함도 갖추고 있다는 평판입니다.”
“왕과 왕녀의 관계는 어떤가?”
“부녀 관계가 꽤 각별한 모양입니다. 왕의 편애 탓에 왕녀가 좀 제멋대로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흠…… 서신을 써야겠군.”
“예? 폐하께서 직접 나서시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그저 사적인 서신일 뿐이야.”
그게…… 더 이상합니다만. 플록스는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켰다. 어차피 지금 황제의 관심은 국가의 반역자를 처단하는 일보다는 말 그대로, 사적인 응징에 기울어져 있으니.
황제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짐에게는 매우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일어난 가슴 아픈 일에 대해 들려주려 하오. 카밀의 왕인 그대에게 굳이 이런 서신을 쓰는 것은, 그대에게도 목숨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이가 있다고 들었기 때문이오.’
그리고 이런 내용으로 끝을 맺었다.
‘그대의 결정과 선택을 존중하겠소. 하지만 만일 짐의 조언이나 지원이 필요하다면,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분노한 남편으로서 손을 더럽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테니 편히 얘기해 주면 좋겠소.’
숨통을 끊어 놓지는 않을 것이다. 그건 그자에게 너무 큰 자비를 베푸는 것일 테니.
* * *
특별한 음식은 특별한 결과를 불러왔다. 독인 듯 약인 듯, 마치 버섯과 같은.
특히 진과 나의 관계에 극심한 변화가 찾아왔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사랑하겠다던, 영롱하게 빛나던 진의 고백은 땡볕 아래 덧없이 녹아내린 눈사람처럼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황녀님이십니다.”
이 한마디 점괘를 시작으로.
이때부터 진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과 사랑에 빠진 나머지, 머릿속이 온통 그 아이로 가득 차고 말았으니.
쌍둥이 황자, 아이온과 트리톤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모습이었다. 이름부터 고대 괴물에서 따온 황자들과 달리, 황녀를 위해서는 여신의 이름을 준비해 두었다.
생각해 보니 진에게는 이것이 처음 경험하는 회임이었다. 쌍둥이 때는 임신과 출산 과정을 전혀 알지도, 함께하지도 못했기에 실감이 없었을 것이다.
임신 기간 동안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었다. 〈황제 태교〉라는 책을 직접 집필할 정도였다. 진은 그간 자신을 약 올려 온 모텝 왕자 앞에서 아주 기고만장해졌다.
하루는 잠을 자다 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힌 걸 보고 기겁을 했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어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진, 무슨 일이에요?”
“모르겠어. 플로라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 저 순백의 여린 아이가 험하고 잔인한 세상을 어떻게 견뎌 낼지.”
그러면서 세상을 확 뜯어고쳐야겠다는 둥 악인들을 박멸해야겠다는 둥 중얼거리는데,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는 불치병이었다.
그렇게 아이들이 태어나고 커 가면서 우리의 삶엔 새로운 이야기들이 추가되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의 형태도, 범위도, 정의도 조금씩 변해 갔다.
나는 예감했다. 내 삶이 더 이상 반복되지 않을 것임을. 새로운 이야기는 이제 이 아이들이 써 나갈 것임을. 삶은 그들을 통해 이어질 것임을.
그렇지만 모르는 척, 이런 마지막 순간을 꿈꿔 본다.
‘진, 이번 생에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웠어요.’
‘또 만나, 로제트.’
‘당신, 다음 생에도 다른 여자 만나는 건 꿈도 꾸지 말아요.’
‘내가 꾸는 꿈은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나? 과자가게 주인도, 황제도 아니고…… 당신의 남편이 되는 것.’
다음 생이 있다면 우리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남편의 첫사랑이 이혼했다.
남편, 진 시더우드의 첫사랑인 나, 로제트 앰브로시아는 이제 막 비겁한 양아치와 이혼했다.
자, 이제 진짜 내 남편 만나러 가 볼까.
-The end…… and see you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