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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돈 많고 명 짧은 남편 (1/110)

1화. 돈 많고 명 짧은 남편2021.12.03.

16548862885697.jpg“아까 서지안 봤지? 옷, 가방, 구두 전부 다 명품이더라.”

16548862885697.jpg“난 처음에 걘 줄 못 알아봤잖아, 완전 환골탈태 수준이라서.”

대리석으로 뒤덮인 호텔 화장실에서 두 여자가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16548862885697.jpg“아무리 돈에 눈이 멀어도 그렇지, 어떻게 식물인간이랑 결혼하냐?”

16548862885697.jpg“내 말이! 돈 많고 명 짧은 남자가 이상형인가.”

16548862885697.jpg“할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라서 독기가 보통이 아니라니까.”

립스틱을 닫은 여자가 파우치를 열다 말고 허벅지를 쳤다.

16548862885697.jpg“설마, 계획적으로 접근한 건 아니겠지?”

16548862885697.jpg“그게 무슨 소리야?”

16548862885697.jpg“그 재벌 집에 입주 간병인으로 들어간 거 말이야.”

16548862885697.jpg“그게 왜?”

16548862885697.jpg“생각해봐. 결혼도 안 한 재벌 후계자가 죽어가는데, 지켜보는 가족들 마음이 얼마나 안 좋았겠어. 죽기 전에 아무라도 데려다가 결혼시켜주고 싶었겠지.”

친구의 음모론을 듣던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듯.

16548862885697.jpg“그럼 서지안은 오르지도 못할 나무가 식물인간 되니까 이때다, 하고 오른 거네?”

16548862885697.jpg“그래! 케이원 그룹 후계자면 유산도 엄청날 거 아냐.”

16548862885697.jpg“그러게. 그럼 지금쯤 남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겠다!”

16548862885697.jpg“어휴, 소름 끼쳐. 무섭다 정말.”

쾅. 두 여자의 뒤편에 있던 화장실 칸 문이 홱 열렸다. 전면 거울로 두 여자를 비딱하게 응시하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비쳤다. 희고 창백한 안면 위로 들어찬 오목조목한 이목구비. 여성스러움이 느껴지는 인상이었지만 마냥 유약한 느낌은 아니었다. 굳게 다문 입술 끝에 강인함이 스며있는 여자의 이름은 서지안. 지안은 동상처럼 굳은 동창들의 얼굴을 잠시 응시하다, 세면대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갔다. 지안이 다가오자, 두 여자는 약속이라도 한 듯 양쪽 벽에 붙어 자리를 비켰다. 지안은 말없이 수전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쏴아아. 흐르는 물에 손을 씻던 지안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거울 속 두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1654886291411.jpg“너희, 간병해 본 적 있니?”

지안의 말에 음모론을 늘어놓던 여자의 눈이 마구 흔들렸다.

16548862885697.jpg“……어?”

1654886291411.jpg“아픈 사람 돌봐본 적 있냐고.”

16548862885697.jpg“아, 아니.”

뒷담화를 할 때와 달리,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지안의 눈빛이 사뭇 서늘해졌다.

1654886291411.jpg“숨소리, 맥박 변화 하나에도 심장이 떨어졌다가 다시 안도하고. 함께 아팠다가 괜찮아졌다가…… 하루에도 그렇게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하지.”

16548862885697.jpg“…….”

1654886291411.jpg“그렇게 3년, 자그마치 3년을 옆에서 함께한 사람이 빨리 죽길 바란다고?”

지안의 준열한 눈빛을 피해 여자가 소용없는 변명을 뱉었다.

16548862885697.jpg“지안아…… 오해야. 우리 얘긴 그게 아니고.”

1654886291411.jpg“사람보다 돈이 중요한 사람은 애초에 간병 같은 거 못해. 그런 약아빠진 마음으로 버티기엔 언제 끝난다는 기약조차 없는 일이라서.”

지안은 거울 속 두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다 밖으로 나갔다. 후우. 화장실을 나온 그녀의 입술 사이로 길고 무거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두 달 전, 조용하게 치러진 그녀와 의식불명 재벌 후계자의 병상 결혼식이 여기까지 퍼져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되도록 외출을 자제했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죽마고우 소진의 결혼식이었으니까. 지안은 무거운 걸음을 떼어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로맨틱한 꽃장식 사이, 발그레한 설렘으로 물든 신부의 얼굴이 보였다.

16548862885697.jpg“지안아!”

백색의 눈부신 드레스를 입은 소진이 지안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그런 소진의 모습에 지안은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1654886291411.jpg“천사 같네. 우리 소진이.”

평소 과장하는 법이 없는 지안의 후한 칭찬에 소진의 입꼬리가 높이 올라갔다.

16548862885697.jpg“못 오는 줄 알았는데, 어떻게 왔어!”

1654886291411.jpg“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진이 네 결혼식인데 내가 어떻게 안 와.”

16548862885697.jpg“……고마워, 서지안. 역시 너밖에 없다니까.”

1654886291411.jpg“밥은 못 먹고 갈 것 같아. 자리를 오래 비울 수가 없어서.”

16548862885697.jpg“……밥이 뭐가 중요해. 이렇게 와준 것만으로도 감동인데.”

지안은 신랑 신부의 떨리는 목소리로 울려 퍼진 혼인서약을 듣고는 식장을 빠져나왔다. 그녀가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최 기사가 차에서 내려 문을 열어주었다.

16548862885697.jpg“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사모님.”

차에 오르자 내내 불안했던 마음이 조금은 진정되었다. 권도하. 3년째 그녀가 간병해 온 환자이자, 몇 달 전 그녀의 남편이 된 남자. 그의 곁에서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금단현상을 겪듯 불안감이 가득 차올랐다. 자리를 비운 사이,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진 않았겠지. 두 시간마다 누워 있는 자세를 바꿔 줘야 불편하지 않을 텐데. 하루 24시간을 그의 곁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었으니, 불쑥 튀어나오는 걱정과 불안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직업병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얼마 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주치의의 말을 들은 터라 더 불안했다.

1654886291411.jpg‘금방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요.’

지안은 차창 밖으로 빠르게 스쳐 가는 풍경들을 보며 생각했다. 의식 없는 남자와 함께한 지 어언 3년. 그녀도 의식 없는 사람처럼 살았던 까닭일까. 눈앞에 스쳐 가는 모든 풍경이 낯설고 신기하기만 했다. 지안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과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잠시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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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862885697.jpg“사모님, 도착했습니다.”

최 기사의 목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창밖 너머로 보이는 저택을 확인하곤 자세를 바로 했다. 집이다. 그가 있는 집에 돌아왔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순간, 간병인 모드가 다시 가동됐는지 당장 그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외출한 모습 그대로 병실에 들어갈 순 없었다. 위생과 청결에 힘쓰는 것도 간병인의 중요한 덕목이었으니까. 지안은 거실을 지나 대리석으로 된 나선형 계단을 통해 2층에 있는 방으로 갔다. 샤워를 마친 후에는 미리 소독해둔 옷을 입고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 우측 복도 끝에 자리한 방. 초록빛 정원이 한눈에 보이는 고즈넉한 방은 도하의 병실이었다. 방문을 열자, 익숙한 병실 냄새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16548862885697.jpg“오셨습니까, 사모님.”

지안을 대신해 그곳을 지키고 있던 메이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지안은 일정한 소리가 나는 심박수 모니터를 잠시 바라보고는 물었다.

1654886291411.jpg“별일 없었죠?”

16548862885697.jpg“네, 사모님.”

1654886291411.jpg“수고하셨어요. 그럼 나가서 일 보세요.”

메이드가 고개를 숙여 그녀에게 인사하곤 방을 나갔다. 지안은 눈으로 쓱 도하의 상태를 살폈다. 전문 의료인은 아니지만, 3년간 간호를 하다 보니, 낯빛이나 숨소리만 듣고도 그의 컨디션을 짐작할 수 있었다.

1654886291411.jpg“오래 기다리셨죠. 토요일이라 차가 많이 막혀서 조금 늦었어요.”

되돌아올 대답이 없을 걸 알면서도 어김없이 뱉는 혼잣말. 이것 또한 그녀의 직업병 중 하나였다. 지안은 간병인용 의자에 앉아 조금 더 가까이 도하의 얼굴을 살폈다. 희고 창백한 피부와 대조적인 짙고 까만 눈썹. 그 아래로 기다란 눈과 베일 듯 높은 콧날이 보인다. 붉은빛을 잃지 않는 도톰한 입술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말을 걸어온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러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부진 턱선에선 왠지 모를 강인함이 느껴져서 때론 아픈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잠든 도하의 얼굴을 살피던 지안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환자복을 입은 커다란 몸. 유난히 크고 널따란 어깨는 긴 간병 생활에 지친 그녀가 이따금씩 졸 때면, 제법 포근하고 안락한 베개가 되어 주었다. 그의 얼굴부터 몸까지 불편한 곳이 없는지 살피던 지안의 눈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순간 커졌다. 어, 식은땀 흘리잖아. 도하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지안은 얼른 손수건을 꺼내 땀을 닦아주고, 체온을 체크했다. 체온계에 뜬 온도를 본 지안의 미간이 한껏 좁아 들었다. 39.2도. 오늘 아침 집을 나서기 전,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상태가 나빠질지 모른다는 걸 본능적으로 직감해서였을까. 이제야 그의 잠든 숨소리가 평소와 사뭇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놀란 지안이 인터폰을 향해 다가가던 그때 침대 위에 있던 도하가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654886291411.jpg“권도하 씨!”

놀란 지안의 목소리가 커다란 병실 안을 날카롭게 울렸다. 마치 누군가 침상을 흔드는 것처럼 도하의 경련은 점점 더 거세져 발작에 가까워졌다. 지안은 급히 인터폰을 들어 별채에 머무르고 있는 주치의를 호출했다.

1654886291411.jpg“빨리, 지금 당장 와주세요!”

얼마 후, 주치의와 간호사들이 병실로 달려왔다. 낯빛이 하얗게 질린 지안은 메이드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갔다. 소식을 듣고 급히 귀가한 도하의 할머니 황정순 회장은 그녀를 보곤 크게 놀랐다. 정순은 지안을 억지로 방에 돌려보냈다. 이러다 손자며느리까지 잃을 순 없다면서. 한 시간, 두 시간……. 시간이 지나도 도하의 병실에선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창밖으로 땅거미 진 세상이 보였다. 어두운 창밖을 멀거니 바라보던 지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1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에 아무도 없자, 복도 끝 방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때마침 병실에서 나오는 정순이 보였다. 손수건으로 눈가를 꾹꾹 눌러 닦는 주름진 손을 보자 가슴이 철렁했다. 주치의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한 지, 어느덧 석 달.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 매일 매일 조마조마하는 마음으로 지내오고 있었다.

1654886291411.jpg‘오늘은 아니겠지, 오늘은 아닐 거야. 그래, 아직 아닐 거야.’

하지만 정순의 눈물을 보는 순간, 그 모든 희망이 깨지는 것 같았다.

1654886291411.jpg“……할머님.”

지안의 목소리에 정순이 천천히 고개를 든다. 팔십을 내다보는 노파의 지나온 세월만큼 깊은 눈 항아리. 그곳에 그득 고인 눈물이 지안의 마음을 한없이 적셨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지만, 3년 동안 함께 도하를 보살피며 가족만큼 가까워진 사이였다. 그런 정순이 우는 모습을 보니, 친할머니의 눈물을 보는 것처럼 마음이 찢어졌다. 하지만 왜 울고 계시냐고 묻기도 겁이 났다. 입에 담기도 아픈 말을 정순의 입술에서 꺼내 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 정순이 젖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16548862981843.png“도하한테 들어가 보려무나.”

그 말이 지안의 귀에는 마지막 인사를 나누라는 소리로 들렸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권도하. 눈을 바라보고 대화를 나눠 본적도, 마주 앉아 밥을 먹어본 적도 없는 낯선 존재. 하지만 지안은 지난 3년간 그의 곁에 머물며, 24시간 그의 숨소리에 귀 기울였고, 맥박을 확인했다. 그런 존재가 이제 사라진다니 심장이 푹 꺼지고 눈앞이 아득해진다. 3년간 홀로 쌓은 정과 연민을 모두 담아 그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섰다. 그의 안색은 아까보다 많이 편안해 보인다. 잔잔하고 일정한 숨소리는 마치 긴 안식을 찾아 떠나기 위해 숨을 고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1654886291411.jpg“권도하 씨.”

지안은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이제 다신 부를 일이 없을 테니까. 이름만 불렀을 뿐인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린다. 크흠, 목을 가다듬고 다시 입술을 떼 보았다.

1654886291411.jpg“더 성심껏 보살펴주지 못해 미안해요, 제가 더 열심히 간호했어야 했는데.”

괜스레 눈가가 뜨거워진다. 그는 알지도 못할 텐데, 혼자 괜히 정이 들어서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기에 애써 마음을 가다듬고 꼭 해야 할 말을 전한다.

1654886291411.jpg“할머님은 제가 잘 모실게요. 그러려고 한 결혼이니까요. 그러니까 이곳 걱정은 너무 하지 마세요.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이제 더는, 더는 아프지 마세요.”

꾹 참고 있던 눈물 한 방울이 침대 위로 툭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커다랗고 묵직한 뭔가가 지안의 손목을 와락 낚아챘다. 그리고 처음 듣는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가득 울렸다.

16548862981865.png“누굽니까,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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