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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여보, 처음 뵙겠습니다 (2/110)

2화. 여보, 처음 뵙겠습니다2021.12.06.

깊은 동굴 속에 갇혀있던 목소리가 흘러나와 병실 안 공기를 흔들었다. 놀란 지안의 눈에 까맣고 단단한 남자의 눈동자가 들어왔다. 권도하, 그가 눈을 뜨고 있다. 늘 닫혀 있던 눈꺼풀이 가벼이 올라가 그 안에 감추고 있던 총명한 눈동자를 보여준다. 그가 저를 뚫어지게 보고 있자, 지안은 삽시간에 온몸으로 닭살이 돋는 걸 느꼈다. 한동안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그녀의 눈언저리가 파르르 떨렸다. 도저히 안 되겠는지, 먼저 시선을 뗀 지안은 제 손목을 붙잡고 있는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아귀에 잡힌 살갗이 뜨겁고 아프다. 3년을 의식 없이 잠들어 있던 사람의 온기와 악력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상상도 못 한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권도하, 그가 깨어나다니. 긴 시간 동안 의식 없이 잠든 그에게는 기적이라는 말도, 희망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예고도 없이, 기적처럼 눈을 뜨다니. 너무 놀라 벙쪄 있던 지안은 힘없이 혼잣말을 뱉었다.

16548863054763.jpg“……말도 안 돼.”

그러곤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려는데, 그에게 잡힌 손목이 더욱 팽팽하게 옥죄어졌다. 동시에 굳게 닫혀 있던 도하의 붉은 입술이 다시 열렸다.

16548863054769.png“누구냐고. 당신.”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귓가를 할퀴고 흩어진다. 일순 멈춰버린 머릿속이 어지럽기만 하다. 뭐라고 저를 소개해야 할까. 깨어날 가망이 없다는 주치의의 말에 기적 같은 건 단념한 지 오래였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었다. 지금처럼 그가 깨어나 돌처럼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며 누구냐고 물어오는 상황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당신의 간병인…… 아니, 나는 당신의 아내……. 그 말이 차마 쉽게 뱉어지지 않았다. 머뭇거리는 지안의 시선 끝에 창백한 낯을 일그러뜨리는 도하의 얼굴이 박힌다. 더는 머뭇거릴 수 없다.

16548863054763.jpg“저, 저는…….”

도하의 시선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지안의 입술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3년이라는 긴 시간, 어둠 말곤 아무것도 보지 못했을 두 눈. 그 눈동자에 어린 열기가 지안을 더 긴장하게 했다. 놀람과 긴장으로 널을 뛰던 심장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즈음, 지안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8863054763.jpg“처음 뵙겠습니다…… 서지안이라고 합니다.”

낯선 이름에 도하의 까만 눈동자에 순간 빛이 일었다.

16548863054763.jpg“저는, 간병인이자…… 권도하 씨, 그러니까 당신…… 아내입니다.”

정면으로 보지 않아도 그의 눈이 얼마나 일렁이고 있을지 예상이 됐다. 갑옷보다 무거운 몸속에 갇혀 3년을 지내다 겨우 깨어났는데, 전에 없던, 초면의 낯선 아내가 곁에 있다면……. 이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울지 묻지 않아도 상상이 된다. 하지만 당황스럽고 놀란 건 지안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깨어날 줄 알았다면, 그가 이렇게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자신을 쏘아볼 줄 알았더라면 결코,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다. 그의 아내가 되는 일, 말도 안 되는 결혼을 허락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으니,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던 주치의의 냉정한 목소리. 지안의 앞에서 목 놓아 울며 애원하던 정순의 목소리가 다시금 귓가로 희미하게 되살아났다.  

16548863054786.png‘지안아, 우리 도하와 결혼해 주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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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 달 전.  

16548863054763.jpg“어젯밤에 비가 많이 와서 벚꽃이 다 떨어졌어요. 올해는 유난히 벚꽃 철이 짧네요.”

도하의 병실, 통유리창 너머로 정원을 바라보던 지안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가 듣든, 듣지 못하든 지안은 잠든 도하의 곁에서 참새처럼 떠들곤 했다. 그 일이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병실에 생기를 불어넣는 유일한 방법이라 여겼다. 어제보다 휑해진 벚꽃 나무의 빈 가지를 보는 지안의 눈꺼풀이 아쉬움을 가득 싣고 깜빡였다. 똑똑. 문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지안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16548863054763.jpg“네?”

16548863054786.png“나다.”

도하의 할머니 정순의 목소리였다. 지안은 얼른 소리가 난 곳으로 가서 문을 열었다.

16548863054763.jpg“오셨어요. 회장님.”

정순은 지안을 보곤 애써 미소 지었지만, 그 미소 너머에 감출 수 없는 그늘이 보였다.

16548863054786.png“잠깐 이야기 좀 할까?”

정순의 말에 지안은 잠시 병실 안 도하를 돌아보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순과 지안은 말없이 정원을 거닐었다. 지안은 발아래로 떨어진 벚꽃잎이 짓이겨진 걸 볼 때마다 미간을 좁혔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정순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는 나무 벤치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16548863054786.png“강 박사 말이…… 이제 도하를 보내줄 준비를 하라는구나.”

16548863054763.jpg“……네?”

너무도 빨리 떨어진 벚꽃잎을 볼 때처럼 지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16548863054786.png“사고 때 끊어졌던 뇌 신경 부위가 더 나빠졌나 봐. 길어야 석 달이라고 하는구나.”

16548863054763.jpg“……!”

믿기지 않았다. 작은 미동도 없이 늘 같은 모습으로 누워 있는 남자라서. 액자 속 그림처럼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을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이제 거기에 없을 수도 있다니. 살랑, 미지근하게 부는 바람에 벚나무 위 간신히 매달려 있던 꽃잎이 흩날렸다. 그 순간 정순의 눈에서도 버티고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16548863054786.png“겨우 여섯 살에 사고로 제 부모 다 여의고, 외롭게 자란 녀석이야. 할미가 한다고 해도 어떻게 엄마 아빠를 대신할 수 있겠어.”

16548863054763.jpg“…….”

정순의 눈물에 지안의 가슴도 미어졌다. 지안도 부모가 아닌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었다. 지안의 부모는 그녀가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우기도 전에 각자의 다른 사랑을 만나 떠났다.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는 할머니의 품에서 사랑을 배웠다. 그래서인지 지안은 정순의 눈물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마치 제 할머니가 우는 것처럼 가슴이 아렸다.

16548863054786.png“평생을 외롭게 자라다가, 사고까지 당해서 혼자 저렇게 있고. 할 수만 있다면 저 녀석 대신 내가 눈감고 싶어.”

16548863054763.jpg“……회장님, 그런 말씀은 하지 마세요.”

그 말을 뱉는 지안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가늘게 떨렸다. 지안은 손을 뻗어 정순의 주름진 손을 꾹 잡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것 말곤 없었다.

16548863054786.png“지안이 네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니. 너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내가 견딜 수 있었겠어.”

정순은 지안이 내어준 손을 꾹 잡고 흐느꼈다. 한참을 애달프게 울던 정순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8863054786.png“지안아, 다 이 늙은이 욕심이란 거 아는데…… 난 지안이 네가 우리 도하의 짝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16548863054763.jpg“……!”

생각도 못 한 이야기였다. 평소 정순이 저를 친손녀처럼 아껴준다는 걸 알았지만, 그녀의 마음에 이런 생각이 있는 줄은 몰랐다.

16548863054786.png“명도 얼마 남지 않은 손주를 앞길 창창한 너랑 엮어주려는 게 얼마나 못난 생각인지 안다마는…….”

16548863054763.jpg“……회장님.”

16548863054786.png“난 도하도, 너도 이렇게 보낼 수가 없구나. 도하 그 녀석, 세상에 태어나 결혼 한번 못 해보고 저렇게 쓸쓸히 눈감게 두는 것도. 지안이 너를 이제 여기서 떠나보내는 것도.”

16548863054763.jpg“……!”

16548863054786.png“도하와 결혼하면 지안이 너도 이제 진짜 우리 식구가 되는 거잖니. 3년을 가족처럼 살았는데 이제 널 어떻게 안 보고 살 수 있겠니. 지안아.”

이것도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제 그가 떠나면 그녀도 이 집을 나가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익숙한 정원과 정든 공기와 작별해야 하고, 무엇보다 친할머니 같은 정순과 작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도하가 아니라 다른 누구와도 결혼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 없었다. 지안은 사랑을 믿지 않았다. 돌도 지나지 않은 핏덩이를 두고 떠난 엄마 아빠가 추종하는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일찌감치 그녀의 인생 사전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는 삭제된 지 오래였다. 정순을 위해 다른 일이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결혼만은 자신 없었다. 긴 침묵을 견디고 정원을 빠져나가는데 벚꽃잎 하나가 지안의 눈앞에 아스라이 떨어졌다. 지안은 무심코 손을 뻗었다. 분홍빛 여린 잎 하나가 그녀의 손에 꾹 들어왔다. 어디선가 떨어지는 벚꽃잎을 잡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었던 게 생각났다. 지안은 가만히 눈을 감고 빌었다.

16548863054763.jpg‘모두,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하지만 그날 이후 정순은 크게 아팠다. 지안은 도하와 정순의 곁을 번갈아 가며 지켰다. 정순의 주름진 얼굴이 핏기가 모두 증발한 듯 창백해질 때마다 지안의 낯빛도 하얗게 질렸다.

16548863054763.jpg‘회장님 아프지 마세요.’

정순을 걱정하는 지안의 투명한 눈동자 위로 3년 전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어둑한 새벽녘, 홀로 걷던 길목에서 우연히 목격한 교통사고 현장. 지안은 그곳에서 피투성이가 된 도하를 최초로 발견했었다. 빠른 신고와 응급처치로 꺼져가던 생명은 조금씩 생기를 되찾아갔다. 정순은 도하를 구해준 지안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았다. 지안의 유일한 가족인 할머니가 하늘로 떠난 날, 정순은 지안이 상주가 되어 홀로 버티고 있는 곳을 찾아가 3일을 함께 있어 주었다. 정순이 온 뒤론 어디선가 조문객들이 줄을 이었다. 일을 도와주는 사람들도 와서 분주하게 음식을 날랐고, 초라하던 장례식장은 쓸쓸할 틈 없이 시끌벅적했다. 하나뿐인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지안에게 정순은 기댈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그보다 진한 가족이 생긴 기분이었다. 지안은 다짐했었다. 이 은혜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하지만 막상 정순이 이렇게 아플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말없이 옆을 지키는 것 말고는. 그렇게 아픈 정순의 곁을 지키던 지안이 잠시 눈을 붙였을 때, 정순은 지안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어주었다. 선잠을 자던 지안은 그 부드러운 손길을 온전히 느꼈다. 따듯하고 포근했다. 사랑받고 있는 느낌.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정순에게 대신 받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 지안은 그 사랑을 갚고 싶어졌다. 그리고 정순의 말대로 그녀의 진짜 가족이 되고 싶었다. 떠날 필요도 없고, 떠나서도 안 되는 진짜 가족이. 길어봤자 3개월이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의 시한부 아내가 되어, 은인 같은 정순의 소원을 들어줄 수만 있다면. 평생 의지하고 정을 나눌 수 있는 가족을 얻게 된다면 못할 게 없었다.

16548863054763.jpg'그래. 그깟 결혼, 못 할 것도 없어. 어차피 내겐 의미 없는 일인데.'

결심이 실현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마 후, 푸른 정원이 보이는 고즈넉한 병실 안에 길지 않은 버진로드가 깔렸다. 환자복을 벗고 깔끔한 턱시도를 입은 도하가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단아한 실크 드레스를 입은 지안이 그가 누워 있는 곳을 향해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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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결혼식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이미 저질러버린 결혼. 지난 일을 떠올리던 지안의 귓가로 다시금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16548863054769.png“당신이 내 아내라고?”

도하의 입술에서 ‘아내’라는 말이 나오자, 지안은 그 생경함을 견디지 못하고 입술을 꾹 말아 감았다. 그리고 얼마 후 대답했다.

16548863054763.jpg“……네.”

도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지안이 선 곳을 서늘하게 응시했다. 그때 문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주치의 강 박사가 몇 가지 더 체크해야 할 게 있다며 부산스럽게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로 나간 지안의 눈에 여전히 눈가가 붉은 정순이 보였다. 정순은 지안을 보고는 얼른 다가와 꼭 안아주며 속삭였다.

16548863054786.png“다 네 덕분이야. 지안이 네가 밤낮 간호한 덕분이라고.”

정순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지안도 좋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영 불편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당사자가 모르는 결혼을 했는데.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가 살아났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묻고 싶었지만, 차마 정순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복도 끝에서 온 강 박사가 정순과 지안을 향해 말했다.

165488631189.jpg“더 자세한 건 정밀 검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지금으로선 사고로 끊어졌던 뇌 신경의 연결 부분이 스스로 자라 다시 연결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외국에선 종종 비슷한 사례가 보고되곤 하는데.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이 경우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방도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다는 이야기였다. 해외 토픽에나 나올법한 기적 같은 상황에 지안은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때 강 박사가 꿈이 아니라고 알려주듯 그녀를 향해 말했다.

165488631189.jpg“당분간은 절대 안정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환자가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이전처럼 24시간 곁에 꼭 붙어 간병하셔야 합니다.”

24시간 꼭 붙어서 간병하는 건 3년 동안 해온 일이라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땐 그가 의식 없이 잠들어 있었다면, 이젠 깨어나 버젓이 옆에 있다는 점이 달랐다. 지안은 습관처럼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을 때,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있는 도하의 모습이 보였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는 옆으로 긴 눈을 예리하게 떠 지안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여전히 낯설기만 한 그녀는 얼른 눈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이었다.

16548863054769.png“서지안.”

16548863054763.jpg“……!”

16548863054769.png“누구 마음대로 당신이 내 아내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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