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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이혼해 드릴게요 (3/110)

3화. 이혼해 드릴게요2021.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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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틈으로 스며든 달빛을 받아 음영 진 콧날이 사뭇 날카롭게 보였다. 지안이 쉽게 입술을 떼지 못하자, 도하는 기다란 눈을 한껏 추켜올리며 말했다.

16548863200224.png“한번 설명해 주겠어. 내 아내, 서지안 씨?”

냉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지안의 다갈색 눈동자가 초점 없이 흔들렸다. 눈앞의 남자가 정말 지난 3년을 함께 보낸 그 남자가 맞나 싶었다. 말없이 잠들어 있을 땐 순한 양인 줄로만 알았는데, 깨어난 그는 포악한 짐승에 가까웠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 이토록 간담이 서늘해지는 걸 보면. 그제야 떠올랐다. 의식불명이 되기 전, 건강하던 시절의 그가 어떤 남자였는지. 사람들이 떠들어대던 얘기가.

1654886320023.jpg‘벌써 일곱 번째 간병인인가?’

1654886320023.jpg‘그쯤 됐지. 어떻게 간병인 손이 닿기만 하면 발작을 일으키지? 식물인간 중에 도하 도련님만큼 까탈스러운 환자는 없을 거야.’

1654886320023.jpg‘아프기 전에도 세상 까칠하고 차가웠었잖아. 환자 됐다고 독살스러운 그 성격이 어디 가겠어?’

1654886320023.jpg‘근데, 이번 간병인은 젊은 여자더라? 나이 든 사람도 두손 두발 들고 도망치는데 젊은 여자가 얼마나 버틸까.’

1654886320023.jpg‘그러게. 젊은 여자가 진짜 안 됐어. 하필 도하 도련님한테 걸리고.’

간병인으로 첫 출근을 한 날이었을 거다. 화장실에 가려던 지안은 어디선가 메이드들이 속닥거리는 걸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됐었다. 하지만 그땐 무심코 흘려보냈다. 간병인의 손만 닿아도 경기를 일으킨다던 말에 조금 걱정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의 손길에 그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3년을 줄곧 그랬다. 그래서 지나치듯 들었던 그 이야기에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깨어난 도하를 보자, 그때 그 이야기가 번뜩 떠올랐다. 까칠하고 차가운 남자, 독살스럽기까지 한 남자가 이렇게 서늘하게 저를 보고 있으니 온전히 실감이 났다. 본래 권도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의식 없는 환자가 아니라, 깨어있는 권도하가 어떤 존재인지.

16548863200224.png“계속 말 안 할 건가.”

날이 선 그의 목소리가 다시금 고막을 때리자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16548863200254.jpg“……아뇨. 할게요. 제가 권도하 씨, 그쪽 아내가 된 건.”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안은 잠시 무거운 숨을 고르고 다시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8863200254.jpg“권도하 씨는 의식이 없으셔서 잘 모르겠지만, 최근까지도 많이 아프셨어요. 주치의가 위독하다는 진단을 내렸고,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죠.”

16548863200224.png“내가 죽을 뻔했다?”

16548863200254.jpg“……네.”

16548863200224.png“그래서?”

16548863200254.jpg“황정순 회장님, 아니 할머님께서 많이 힘들어하셨어요. 하나뿐인 손자를 그렇게 쓸쓸하게 보낼 수 없다면서.”

16548863200224.png“…….”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는 아무렇지 않은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이어서 해보라는 듯 태연자약한 눈빛만을 보낼 뿐.

16548863200254.jpg“지난 3년간 그쪽 간병하면서 할머님과 정이 많이 들었어요. 할머님도 저를 친손녀처럼 생각하셨고요. 권도하 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결혼이라도 하길 바라는 할머니 바람을 제가 들어드린 거예요. 그래서…….”

16548863200224.png“그래서 곧 죽을 사람과 결혼식을 올렸다?”

도하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지안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16548863200254.jpg“네.”

16548863200224.png“대단한 여자군. 서지안, 당신.”

16548863200254.jpg“…….”

도하는 비소를 머금은 입술을 천천히 떼어 말했다.

16548863200224.png“할머니께서 얼마를 준다고 하시던가. 내 유산을 전부 다 준다던가?”

16548863200254.jpg“……돈 때문이 아니에요.”

16548863200224.png“그래? 돈 때문이 아니면 오지랖이 넓은 건가. 남의 할머니 걱정에 자기 인생을 다 내던지고.”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메이드들이 말하던 독살스러운 성격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았다. 3년 만에 깨어나서 한다는 말이 이렇게 하나같이 비수 꽂힌 말뿐이라니. 지안은 잠시 평정심을 잃고 말했다.

16548863200254.jpg“그런 게 아니라고요.”

16548863200224.png“그런 게 아니면?”

16548863200254.jpg“권도하 씨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좋아해 본 적 없으시죠?”

16548863200224.png“……뭐?”

16548863200254.jpg“할머님을 위해 뭐든 해 드리고 싶었어요. 그게 말도 안 되는 결혼일지라도.”

16548863200224.png“……!”

지안의 투명한 두 눈이 요동치듯 흔들리자, 도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16548863200254.jpg“이렇게 그쪽이 깨어난 상황에선, 권도하 씨 말대로 제가 저지른 일이 오지랖이 맞아요. 제 인생만 내던진 게 아니라 그쪽 인생까지 피해를 줬으니까.”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이 지안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이런 상황이 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기에 미리 생각해 본 적 없지만, 답은 분명했다. 이렇게 된 이상 가장 현명한 길은 딱 하나뿐이었다.

16548863200254.jpg“원하신다면…… 이혼해 드릴게요.”

지안이 바위처럼 단단한 목소리를 내뱉자, 미동 없던 도하의 눈가가 살짝 흔들렸다.

16548863200224.png“……뭐?”

16548863200254.jpg“제가 멋대로 저지른 결혼이니까. 책임지고 이혼해 드리겠다고요.”

말을 마친 지안은 도망치듯 문 쪽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춘 뒤 나지막이 말했다.

16548863200254.jpg“강 박사님께서 아직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그때까진 24시간 곁에서 간병을 해야 한다고. 불편하시겠지만, 새 간병인 구해질 때까진 제가 권도하 씨 옆에 있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은 듣고 싶지 않아, 통보하듯 말하곤 얼른 병실을 빠져나갔다. 후유. 지안은 깊고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지난 3년간 자신이 돌봐오고 연민하던 남자가 맞나 싶다. 붙박이처럼 늘 그의 곁에 있었는데, 지금 저 병실 안에 있는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낯설고 두렵기만 하다. 무거운 걸음을 옮겨 복도를 걸어가는데, 저만치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16548863200254.jpg“……할머님?”

아까보다는 안정을 찾은 듯한 정순이 특유의 인자한 미소로 지안을 지켜보고 있었다.

16548863269892.png“잠깐 내 방에서 이야기 좀 할까?”

깨어난 도하의 낯선 면면들에 잔뜩 긴장했던 가슴이 정순을 보자 스르르 풀렸다. 정순은 안방 테라스로 지안을 데려갔다.

16548863269892.png“캐모마일 한 잔 줄까?”

16548863200254.jpg“아니에요. 괜찮아요.”

정순이 지안의 앞자리에 앉으며 그녀의 안색을 훑었다.

16548863269892.png“많이 놀랐지?”

16548863200254.jpg“조금…… 아니 좀 많이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굳어 있는 안면 근육이 말을 듣지 않았다.

16548863269892.png“이제 이 할미는 더 바랄 게 없구나.”

16548863200254.jpg“…….”

16548863269892.png“너한테 말도 안 되는 결혼을 부탁해놓고, 내가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니?”

16548863200254.jpg“할머님.”

16548863269892.png“도하도 중요하지만 지안이 너도 내 새끼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손주가 죽는다는 절박한 마음에, 앞길 창창한 네게 그런 부탁을 했으니.”

16548863200254.jpg“…….”

16548863269892.png“그런데 이제 도하가 깨어났잖니. 이제 함께할 수 있잖아!”

16548863200254.jpg“…….”

정순은 기다려달라는 손짓을 하더니, 어딘가로 사라져 지안의 시야를 벗어났다. 그러곤 오래 지나지 않아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16548863269892.png“자, 한번 열어보렴.”

지안은 정순이 내민 작은 상자를 가만히 응시하다 물었다.

16548863200254.jpg“이게 뭐예요?”

16548863269892.png“원래 결혼식 때 주려고 했는데, 수선이 필요해서 이제야 주는구나.”

어서 열어보라는 정순의 눈짓에 지안은 천천히 작은 상자의 뚜껑을 오픈했다.

16548863200254.jpg“어, 이건…….”

처음 보는 영롱하고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에 그녀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졌다.

16548863269892.png“내가 도하 할아버지한테 시집올 때 시어머니한테 받은 거란다. 원래는 도하 엄마한테 줬었는데…… 주인이 멀리 떠나버리는 바람에 내가 간직하고 있었지.”

16548863200254.jpg“…….”

정순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지안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16548863269892.png“이제 반지의 새 주인이 생겼으니, 전해줘야지. 자, 어서 한번 해 보렴. 눈대중으로 사이즈를 수선한 거라 맞을지 모르겠어.”

정순이 반지를 꺼내 지안의 손을 향해 가져갔지만, 지안은 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테이블 밑으로 감췄다.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16548863200254.jpg“죄송해요. 할머님.”

16548863269892.png“왜, 왜 그래?”

16548863200254.jpg“이 반지는 못 받을 것 같아요.”

16548863269892.png“……왜, 마음에 안 드니? 하긴 디자인이 좀 올드하긴 하지. 수십 년 전에 만든 거니까.”

정순이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웃음을 거둬내고 싶진 않았지만, 더 늦기 전에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16548863200254.jpg“아뇨. 그게 아니라…….”

지안이 시선을 피하며 불안한 목소리를 내자, 정순은 반지를 내려두고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인생을 먼저 산 선배의 눈에는 지안이 지금 무슨 말을 꺼내려는지 듣지 않아도 보이는 것 같았다.

16548863269892.png“지안아, 달라질 건 하나도 없다.”

정순의 단단한 목소리에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16548863200254.jpg“……죄송해요. 할머님.”

16548863269892.png“뭐가 죄송해. 그동안 그래왔듯, 앞으로도 우리 도하 곁에서 잘 지내주면 되는데.”

그 말을 하는 정순의 손이 더 굳세게 지안을 붙든다. 난로처럼 따듯하고 포근한 손. 그 손을 더 잡고 있으면 영영 놓기 싫어질까 봐, 놓을 수 없을까 봐 지안은 애써 손을 거뒀다.

16548863200254.jpg“……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아요.”

16548863269892.png“그게 무슨 소리야.”

16548863200254.jpg“이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아요. 저를 위해서도, 도하 씨를 위해서도요.”

16548863269892.png“지안아…….”

16548863200254.jpg“그래도 이제 마음이 놓여요. 할머님 곁에 도하 씨가 있으니까요.”

지안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자꾸만 흐려지는 눈가를 감췄다.

16548863269892.png“도하가 겨우 살아나니까, 이제 네가 떠나겠다고?”

정순이 서운함과 복잡한 심경을 담아 목청을 높였다.

16548863200254.jpg“……할머님.”

16548863269892.png“나는 못 보낸다. 절대 못 보내.”

16548863200254.jpg“……도하 씨 미래도 생각하셔야 해요. 도하 씨도 본인이 진짜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살 자격 있잖아요.”

가냘픈 몸매에 여리여리한 얼굴로 뭘 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이렇게 똑 부러지게 이야기할 때면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하고 단단한 아이, 서지안. 정순은 지안의 이야기에 말문이 막혔다.

16548863269892.png“……!”

지안은 정순의 주름진 손을 꼭 잡고 속삭였다.

16548863200254.jpg“도하 씨와의 관계는 끝나도 할머님과 제 관계는 그대로예요. 자주 뵈러 올게요.”

하지만 정순은 아직 지안을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피만 섞이지 않았을 뿐, 가족이나 다름없는 그녀를 이렇게 갑자기 떠나보낼 수 없었다.

16548863269892.png“지안이 네 뜻은 알겠다만 아직은 아니야. 도하 녀석 이제 막 깨어났는데. 적어도 회복될 때까지만이라도, 전처럼 제 발로 걷고, 제 손으로 밥 먹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네가 있어 주면 안 되겠니?”

그 말을 하는 정순의 목소리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주름진 눈가에 그득한 슬픔을 보자, 지안은 더 이상 단호하게 제 뜻만 주장할 수 없었다. 지안의 눈빛이 흔들리자, 정순은 온 마음을 다해 간절하게 애원했다.

16548863269892.png“네 손으로 직접 3년을 보살폈잖니. 누구보다 지안이 네 손길이 익숙한 녀석이야. 갑자기 간병인이 바뀌면 상태가 다시 나빠질지도 모르고.”

16548863200254.jpg“…….”

일리 있는 말이었다. 환자가 깨어났다고 도망치듯 바로 떠나는 것만큼 무책임한 일이 있을까. 한동안 생각에 잠겼던 지안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8863200254.jpg“그럼. 도하 씨 건강 회복되는 날, 그때까지만 있을게요. 그땐, 꼭 보내주셔야 해요.”

16548863269892.png“……그래. 그러도록 하마.”

  그날 이후,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의식을 되찾은 도하는 3년간 내리 잠들어 있었던 침대가 갑갑한 듯 재활에 대한 의지로 불타올랐다. 그는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시작했다. 재활이라는 목표 앞에서 불도저로 변한 그는 눈빛부터 남달랐다. 재활치료사와 주치의 강 박사 이외엔 누구도 병실에 들어올 수 없게 했다. 그의 곁에 24시간 남자 재활치료사가 상주해 있는 덕에 지안은 그와 부딪힐 일이 없어졌다. 가끔씩 재활 운동 중인 그와 눈이 마주칠 때면, 도하는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쓱 훑고는 칼같이 시선을 돌렸다. 저를 투명인간 취급하는 그가 얄미워 떠나야겠다 마음먹었지만, 그때마다 정순에게 붙잡혀 때를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훌쩍 지나가 버린 8개월. 남다른 의지와 타고난 체력으로 도하는 빠르게 회복했고, 이제는 보조기구 없이도 혼자 힘으로 걷고, 가벼운 운동을 할 수 있을 만큼 건강해졌다. 지안은 비로소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

16548863269892.png“못 보낸다! 지안이 널 어떻게 보내.”

정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울렸다.

16548863200254.jpg“할머님도 들으셨잖아요. 도하 씨 이제 많이 회복되었다고 강 박사님께서 하신 말씀.”

16548863269892.png“……하지만,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지안아.”

16548863200254.jpg“할머님, 저……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꼭 이루고 싶은 꿈이요.”

16548863269892.png“뭐?”

16548863200254.jpg“이젠 병실 말고 밖에 나가서 새로운 꿈도 꾸고, 하고 싶은 일도 맘껏 하고 싶어요. 저 아직 청춘이잖아요.”

서툰 거짓말을 뱉은 지안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이루고 싶은 꿈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거짓말 말고는 정순을 진정시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말도 안 되는 결혼으로 엮인 남자와 한집에 산다는 게 편치 않았다. 환자일 때와는 180도 다른 남자가 지안은 낯설고 불편했다. 마지막까지 정순이 걱정되어 머뭇거렸지만, 이제 정순도 혼자가 아니었다. 목숨처럼 아끼던 손자가 든든하게 곁을 지켜줄 테니, 저의 빈자리쯤이야 금방 메워지지 않을까. 지안이 애써 싱긋 미소 지어 보이자, 정순은 그 미소가 너무도 눈이 부셔 마음이 아렸다. 지안의 말마따나 그녀는 가장 빛나야 할 아름다운 청춘이었다. 갑갑한 병실보다 넓은 세상이 어울리는 꽃다운 나이.

16548863269892.png“지안아…….”

16548863200254.jpg“할머님 자주 뵈러 올 거예요.”

지안이 떠난다는 이야기에 저택은 점점 생기를 잃고 무미건조해져 갔다. 살갗으로 와닿는 침울한 분위기에 지안은 마음이 쓰였지만, 이것 또한 일상으로 돌아가는 과정이라 여기며 애써 외면하는 중이었다. 저택을 떠나기 하루 전.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치고, 이제 마지막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지안은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복도 끝 도하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병실 문 앞에 잠시 멈춰 서 노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도하가 의식 없이 잠들어 있었을 땐 생략하던 행동이지만, 그가 깨어난 지 어느덧 8개월. 이제는 노크가 제법 익숙해졌다. 똑똑.

16548863200224.png“네.”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16548863200254.jpg“저예요. 잠깐 들어갈게요.”

지안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병실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도하가 쓱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16548863200254.jpg“저…… 이거.”

지안이 한쪽 손에 들고 있던 서류 봉투를 그의 앞에 건넸다.

16548863200224.png“뭐지, 이건?”

그의 냉담한 목소리에 지안이 화답하듯 차갑게 답했다.

16548863200254.jpg“이혼서류예요.”

도하는 말없이 서류를 꺼내 검토하듯 한동안 꼼꼼히 훑었다. 서류를 검토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된 그의 상태에 지안은 소리 없이 감탄했다. 긴 시간, 고생했던 것들이 알 수 없는 보람이 되어 가슴을 두드렸다. 후. 이제 정말 다 끝나는구나. 길었던 간병도, 무모하게 저질러버렸던 결혼도. 지안이 안도하듯 낮은 숨을 뱉던 그때였다.

16548863200224.png“싫다면?”

도하의 입술 끝에서 흘러나온 짧은 몇 음절의 말에 지안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16548863200254.jpg“……뭐라고요?”

도하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고는 손에 들린 서류를 와락 무참히 구겨버렸다.

16548863200224.png“마음대로 유부남을 만들어 놓더니, 이젠 이혼남까지 만드시겠다?”

16548863200254.jpg“…….”

16548863200224.png“그러니까 함부로 저지를 게 따로 있지.”

16548863200254.jpg“……!”

16548863200224.png“안 그래, 내 아내 서지안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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