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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결혼도 무효가 되나요? (4/110)

4화. 결혼도 무효가 되나요?2021.12.13.

지안은 중후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의 사무실 안을 쓱 둘러봤다. 스물여덟 인생에 로펌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노트북에 상담 내역을 기록하던 변호사가 그녀를 향해 물었다.

165488634796.jpg“이혼했다는 기록이 남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지안의 귓가로 며칠 전 도하가 뱉었던 말이 스쳐 갔다.

16548863479606.jpg‘마음대로 유부남을 만들어 놓더니, 이젠 이혼남까지 만드시겠다?’

그가 눈앞에서 이혼서류를 쓰레기처럼 구겨버린 이유는 명확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유부남이 되었는데, 하루아침에 또 이혼남이 되어야 한다니. 권도하가 아니라 보살이라도 화가 났을 거다. 지안은 모두 이해했다. 하지만 그다음 이어진 말은 이해할 수 없었다.

16548863479606.jpg‘성인이면 성인답게 당신 결정에 책임을 지도록 해.’

16548863479618.jpg‘책임이요?’

16548863479606.jpg‘결혼해서 배우자가 되었으면 배우자의 책임을 다하라고.’

그는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뱉은 걸까. 배우자의 책임을 다하라니. 너무 오랜 시간 잠들어 있어 현실감각을 잃은 게 분명했다. 애초에 잘못된 결혼이었으니 이혼이 아니라 결혼 자체를 취소할 순 없을까. 지안은 고민 끝에 변호사를 찾아갔다.

16548863479618.jpg“네. 말씀드렸듯이 배우자 의사와 상관없이 진행된 결혼이라서요.”

지안의 말에 변호사는 안경을 추켜 올리며 말했다.

165488634796.jpg“혼인무효소송이 인정받는다면, 결혼했다는 기록 자체가 남지 않습니다.”

그 소리에 지안의 두 눈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16548863479618.jpg“정말인가요?”

165488634796.jpg“네. 혼인 취소의 경우는 상세 혼인 관계 증명서를 떼면, 취소 이력이 남지만 혼인 무효 소송에서 승소하면 흔적도 남지 않고, 서로에 대한 모든 책임이 사라지게 됩니다.”

말만 들어도 홀가분해지는 것 같았다. 지안은 급한 마음에 물었다.

16548863479618.jpg“그럼, 혼인무효소송을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165488634796.jpg“무효 사유가 몇 가지 있는데, 의뢰자분 경우도 해당이 됩니다. 당사자 간의 합의 의사 없이 결혼이 이루어진 경우 말입니다.”

16548863479618.jpg“변호사님, 그럼 소송을 빨리 진행하고 싶은데요.”

165488634796.jpg“소송이야 가정법원에 제기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지만, 상대가 결혼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16548863479618.jpg“그거라면 어렵지 않아요. 말씀드렸듯이 남편은 혼수상태였고, 그때 진행된 결혼이라서요.”

165488634796.jpg“남편분이 혼인무효소송을 거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쉬울 텐데요. 지금은 반대의 경우라. 남편분께서 결혼에 동의한 적 없다는 입장을 확실히 밝히고 입증해야 소송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겁니다.”

결국 도하가 나서야 한다는 소리였다. 지안은 되도록 그를 귀찮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은 눈 꾹 감고 부탁해 볼 생각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원하는 완벽한 결말일 테니까. 로펌을 나온 지안의 얼굴로 엷은 미소가 흘렀다. 그래도 불가능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무모하게 저지른 결혼이었지만, 잘만하면 모두 없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이 결혼의 최대 피해자인 권도하, 그도 이번엔 선뜻 나서 주겠지. 유부남도, 이혼남도 되고 싶지 않은 남자이니까. 지이이잉. 가방 속에서 휴대폰이 울었다. 액정을 확인한 지안은 얼른 통화버튼을 터치했다.

16548863479618.jpg“여보세요.”

165488634796.jpg-네. 여기 부동산인데요. 오늘 방 보러 오신다고 했죠?

16548863479618.jpg“네. 맞습니다.”

165488634796.jpg-근처 도착하시면 전화 주세요. 저희가 픽업해서 바로 방 보러 가게요.

16548863479618.jpg“네. 감사합니다.”

3년을 살았던 저택을 떠나온 지 나흘째. 며칠은 호텔에 묵었지만, 기약 없이 호텔 생활을 할 순 없었다. 저택만큼 호화롭고 좋은 곳은 어디에도 없겠지만, 안락하고 따뜻한 느낌이 드는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앞으로의 미래를 천천히 구상해볼 생각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할지, 어떤 삶을 살면 좋을지. 그런 것들에 집중하다 보면 힘들었던 지난 3년간의 피로도, 저택에서 쌓은 정과 그리움도 조금은 옅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렇다고 정순이 보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할머님은 잘 계실까. 지금쯤이면 점심 식사를 마치고 안락의자에 앉아 꾸벅 졸고 계실 시간인데. 정순을 떠올리던 지안은 순간 화들짝 놀라 시계를 봤다.

16548863479618.jpg‘어! 도하 씨 자세 바꿔줘야 할 시간인데. 정면에서 측면으로 몸 위치를 바꿔줘야 욕창도 안 생기고…….’

한껏 졸아들었던 가슴이 무언가를 깨닫곤 순간 맥없이 펴졌다. 이제 그의 곁을 떠났다는 것, 더는 그를 간호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잠시 망각했다. 긴 시간 몸에 배고, 마음에 밴 습관을 어떻게 며칠 만에 다 떨쳐낼 수 있을까. 지안은 애써 스스로 위로하며 멀리에서 다가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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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8863479618.jpg[저기 남산타워에 파란색 불빛 보이죠? 오늘은 미세먼지 농도가 낮나 봐요. 어젠 미세먼지가 나빠서 빨간 불빛이 점등됐거든요. 이렇게 파란 불이 들어온 날은 서울 공기가 제주만큼 맑은 거래요.]

16548863479618.jpg[어젯밤에 비가 많이 와서 벚꽃이 다 떨어졌어요. 올해는 유난히 벚꽃 철이 짧네요. 작년에는 할머님과 여의도에 꽃놀이도 다녀왔었는데, 올해는 때를 놓쳤어요. 작년에 찍은 사진은 나중에 도하 씨 깨어나면 보여줄게요.]

16548863479618.jpg[미안해요. 어제오늘 제 손길이 조금 거칠었죠. 한숨도 평소보다 많이 쉬고. 그러면 안 되는데, 신경이 날카롭고 예민해져서. 한 달에 한 번쯤은 그냥 모른 척 눈감아 줄래요? 내가 그런 게 아니고 호르몬이 그런 거니까.]

16548863479618.jpg[도하 씨는 아마 겨울을 싫어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손발이 찬 걸 보면. 난 겨울 좋아하는데. 겨울밤 할머니가 구워주신 군고구마 먹으면서 할머니 무릎 베고 자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거든요. 어, 도하 씨 방금 침 삼킨 거예요? 내 이야기 듣고 있는 거예요? 도하 씨, 도하 씨…….]

  탁. 잠에서 깬 도하가 숨을 헐떡이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곁에 있던 메이드가 놀라 그의 희멀건 얼굴을 빠르게 훑으며 말했다.

165488634796.jpg“도련님, 괜찮으세요?”

도하는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는 얼마 후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16548863479606.jpg“방금 내 옆에서 뭐라 떠들었습니까?”

165488634796.jpg“……네?”

16548863479606.jpg“방금 여기서 혼잣말로 무슨 얘길 했냔 말입니다.”

역정을 내듯 공격적인 그의 말투에 얼은 메이드는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488634796.jpg“전 그저, 조용히 간병 수첩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요.”

16548863479606.jpg“미세먼지 이야기, 벚꽃 진 이야기…… 하지 않았다고?”

165488634796.jpg“……네.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말도 안 된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선명한 목소리였다. 잠시 미간을 좁히던 도하는 영문도 모른 채 커진 눈을 끔뻑이는 메이드를 향해 물었다.

16548863479606.jpg“말해 보세요.”

165488634796.jpg“……네?”

16548863479606.jpg“아무 말이라도 해보라고.”

165488634796.jpg“도련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다. 조금 전 귓가를 울리던 그 음성이 아니었다. 들뜨지 않고 차분한 톤의 조곤조곤한 목소리. 그렇다고 우울하지 않은 목소리는 상냥함과 정중함이 한껏 묻어났다. 도하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냈다.

16548863479618.jpg‘권도하 씨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좋아해 본 적 없으시죠? 할머님을 위해 뭐든 해드리고 싶었어요. 그게 말도 안 되는 결혼일지라도.’

자신을 간병인이자 권도하의 아내라고 소개하던 여자. 이혼서류를 내밀며 자신이 저지른 결혼을 책임지겠다던 여자. 서지안. 그녀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적이어서 또렷이 뇌리에 각인된 음성. 어째, 그 여자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 거지.

165488634796.jpg“도련님, 땀을 많이 흘리셨어요.”

메이드가 다가와 매뉴얼대로 말했지만, 도하는 다른 생각을 하느라 듣지 못했다. 수납장 쪽으로 갔던 메이드가 갈아입을 옷을 들고 다가오자 도하는 손을 뻗어 막으며 말했다.

16548863479606.jpg“됐고, 강 박사를 부르세요.”

얼마 후 강 박사가 도하 혼자 있는 병실로 들어왔다.

165488634796.jpg“부르셨습니까. 도련님.”

16548863479606.jpg“……이상한 소리가 들립니다. 환청 같은 게.”

도하의 말에 강 박사가 눈썹을 살짝 추켜들며 말했다.

165488634796.jpg“환청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소리가 들리십니까?”

16548863479606.jpg“……여자 목소리요.”

165488634796.jpg“여자…… 목소리라고요?”

16548863479606.jpg“옆에서 재잘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도 후유증의 일환입니까?”

165488634796.jpg“글쎄요. 뇌 기능이 정상적으로 회복되는 차원에서 환시, 환각, 환청이 생길 수도 있긴 한데. 혹시…… 그 목소리가 아는 사람의 것입니까?”

도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165488634796.jpg“로비에 경비실도 따로 있고, 이만하면 여자분 혼자 살기 딱 좋은 오피스텔이에요. 역도 아주 가깝고.”

부동산 중개업자의 숙련된 멘트에 지안은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165488634796.jpg“하실 거면 여기로 하셔요. 이 근처에 이 가격에 이만한 방이 없어요.”

16548863479618.jpg“좋긴 한데…….”

무슨 까닭에선지 지안은 망설이는 표정이었다. 방을 보러 다니기 전까지는 몰랐다.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다는 게 어떤 건지. 사실 이번이 그녀의 첫 홀로서기나 마찬가지였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늘 할머니와 함께였고, 할머니가 떠난 빈자리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도하의 간병인이 되어 저택에 입주했었다. 그래서 홀로 사는 적적함과 외로움이 어떤 것인지 잘 상상되지 않았다. 괜찮을까. 잘 때 무섭진 않을까. 지난 몇 년간 도하를 돌보며 이따금 스스로 어른스러워졌다고 느낄 때가 있었다. 한데 아직도 겁 많은 아이였다니.

165488634796.jpg“오늘 이 방 보고 간 다른 아가씨도 한두 시간 안에 결정해서 연락 주기로 했어요. 빨리 서둘러야 좋은 방 가져가지.”

중개업자의 부추김에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녀의 결단력 부족에 답답해하는 중개업자를 뒤로하고 지안은 멍하니 거리를 거닐었다. 원룸 오피스텔 말고 여럿이 함께 사는 셰어 하우스 같은 데를 알아봐야 할까. 한참을 헤매다 호텔로 돌아온 지안은 그대로 침대로 쓰러지듯 누웠다. 병실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하며 준 환자로 살아온 시간 때문인지, 이것저것 알아보고 다니기에 체력이 턱없이 모자랐다. 지안은 침대에 누운 채 오늘 하루를 돌아봤다. 변호사와 상담했던 걸 떠올리자 어서 도하를 만나 혼인무효소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집을 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법적으로 깔끔히 관계를 청산하는 게 더 우선이었다. 잠시 누워 휴식을 취한다는 게 그만 잠들어 버렸다. 딩동. 지안을 깨운 건 낯선 초인종 소리였다. 부스스 눈을 뜬 지안은 천천히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누가 잘못 누른 건가. 세탁 서비스를 부탁한 적도 없고, 룸서비스를 시킨 적도 없는데. 지안이 현관 쪽에 다가서 가만히 바깥에 귀를 기울이는데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165488634796.jpg“사모님.”

이 목소리는. 그녀가 외출할 때마다 발이 되어준 최 기사의 목소리였다.

16548863479618.jpg“최 기사님?”

165488634796.jpg“네. 접니다. 잠깐 뵐 수 있을까요?”

지안은 가족처럼 친근한 최 기사의 방문에 일말의 거리낌 없이 문손잡이를 밀었다. 문이 열리자, 복잡한 패턴의 카펫 위에 서 있는 최 기사가 보였다.

16548863479618.jpg“최 기사님, 여길 어떻게 아시고…….”

지안이 묻는 순간, 최 기사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슬쩍 옆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뒤에 가려져 있던 누군가가 보였다. 185cm가 거뜬히 넘는 장신. 긴 시간 의식이 없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장대한 체구의 남자가 그녀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16548863479618.jpg“다, 당신이 어떻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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