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집 나간 아내 찾으러 왔어.2021.12.17.
지안은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멍하니 도하를 응시했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는지 눈가 근육이 다 뭉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떴을 때도 거기에 그가 서 있었다.
"……권도하 씨."
기약 없는 잠에서 그가 깨어났던 그 날처럼 믿기 힘든 순간이었다. 저택이 아닌 다른 곳에서 이렇게 그를 마주 보고 있다는 게 낯설고 어색했다. 제 발로 곧게 선 그는 그녀가 고개를 한참 들어 올려 아슬아슬한 각도를 만들어야지만 제대로 볼 수 있을 만큼 컸다. 재활 후 몰라보게 단단해진 그의 몸은 여자 둘이 서도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을 만큼 크고 위압적이었다. 여전히 낯설기만 한 모습에 잠시 벙쪄 있던 그녀는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떠올렸다. 겉은 멀쩡해도 아플 수 있다는 것. 겉모습만으로 환자의 병세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지난 3년 8개월의 간병 생활에서 그녀가 배운 것이었다. 지안은 놀란 가슴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물었다.
“이렇게 외출해도 될 만큼 다 나은 거예요?”
도하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그녀의 목소리를 음미하고 있었다. 차분함과 건조함, 그 사이로 알 수 없는 따스함이 배어나 은은하게 들리는 목소리. 찾던 목소리가 확실하다는 듯 도하의 눈가에 순간 빛이 일었다. 얼마 후 그가 입술을 떼 나직이 말했다.
“아직은 아니지.”
지안의 눈썹이 순간 높게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안 되는 걸 알면서 여기까지 오신 이유를 좀 물어도 될까요?”
그녀의 말에 도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뱉었다.
“남편이 집 나간 아내를 찾아다니는 게 이상한 일인가.”
그의 말에 지안의 두 눈이 또다시 평정심을 잃고 크게 흔들렸다. 누가 들으면 정말 두 사람이 진짜 부부인 줄 착각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사였다. 그는 대체 무슨 까닭으로 여기에 온 걸까. 지안은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도하를 경계하듯 바라보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도하가 그녀의 앞으로 도발하듯 다가섰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더 가까이. 살이 닿고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로 그가 바짝 다가오자, 지안은 한껏 어깨를 말아 몸을 피하며 말했다.
“뭐 하는 거죠, 지금?”
“알다시피 내가 아직 환자라서.”
“…….”
도하는 그 말을 하곤 그녀의 곁을 스쳐, 반쯤 열려있던 객실 문 안으로 쓱 들어갔다.
“저기요!”
“…….”
환자로 보기 힘들 정도로 위엄있고 힘이 느껴지는 걸음으로 금세 소파 앞까지 가 있었다. 지안은 제 안방처럼 편하게 소파에 앉는 도하를 멍하니 지켜봤다. 그런 그녀를 도하가 돌아보며 불렀다.
“안 들어올 건가.”
누가 보면 그가 객실 주인이고, 그녀가 잠시 방문한 게스트로 보일 지경이었다.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남자. 지안은 그 자리에 선 채 잠시 그를 여기에서 내보낼 방법에 대해 생각했다. 자기보다 몇 배는 큰 남자를 물리적으로 내보내는 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다면 호텔 로비에 전화를 걸어야 할까. 이상한 남자가 제멋대로 들이닥쳤다고. 분주히 굴리던 눈동자가 순간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닿았다. 오늘 방문한 로펌에서 받아온 서류 봉투가 그 위에 올려져 있었다. 불현듯 그와 긴밀히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다면, 그녀가 그를 직접 찾아가 부탁해야 할 일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결혼 사실을 완전히 지울 혼인무효소송에 대해. 차라리 잘 된 거야. 따로 찾아가지 않아도 되고. 지안은 생각하며 천천히 객실 문을 닫았다.
“그래도 외출까지 하는 걸 보니 이제 거의 다 회복한 모양이에요.”
그녀가 고르고 골라 꺼낸 말에 도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젊은 사람은 나쁜 것도 빨리 진행되는 반면, 좋은 흐름으로 바뀌면 호전도 빠르다더군.”
대화의 주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전직 간병인에게 알리는 호전 소식이 만족스러웠는지 도하는 처음으로 무겁던 분위기를 풀고 말했다. 지안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전직 간병인이자, 곧 그의 전 부인이 될 사람으로서.
“다행이에요.”
그녀의 말에 순간 도하의 콧잔등에 엷은 주름이 앉았다. 독살스러운 성격의 남자가 제 건강이 회복된 이야기를 사람 좋게 떠들고자 여기에 온 게 아니라는 걸 그녀가 잠시 망각한 순간이었다. 그가 차게 식은 목소리로 뱉었다.
“……다행?”
순간 객실 안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분명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건강이 호전된 소식에 나름 화기애애하다고 생각했는데. 지안은 당황한 티를 감추며 천천히 뱉었다.
“……네. 다행이죠. 건강이 회복되고 있다는 건.”
그녀의 말에 도하가 한쪽 입꼬리를 피식 들어 올리곤 말했다.
“글쎄. 누구 때문에 치명적인 후유증이 생겨서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지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유증이요?”
“그래.”
지안은 ‘후유증’이라는 말에 놀라서 한참 뒤에야 ‘누구 때문에’라는 말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이 가리키고 있는 게 이상하게도 자신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냉기를 띤 눈이 날카롭게 지안을 주시했다. 지안은 자신을 향해 고정된 눈빛에 얼어붙은 듯 굳어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초점 없이 흔들리는 지안의 눈동자를 집요하게 훑으며 그가 말한다.
“당신이 겨울을 좋아한다는 걸. 나쁜 남자만 만나던 당신 죽마고우가 드디어 좋은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당신 호르몬이 예민하게 작용하는 주기를.”
그의 입술에서 쏟아져나오는 말들이 화살처럼 지안의 가슴을 찔렀다.
“그 이야기들을 대체 내가 왜 알고 있는 거냐고.”
“……!”
“그것 말고도 수없이 많은 이야기가 내 귓가를 어지럽히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이래도, 다행인가?”
책임을 묻듯 냉혹한 눈빛이 매섭게 노려보자 지안의 눈동자가 또다시 정처 없이 흔들렸다. 분명 그녀가 한 이야기가 맞았다. 길고 긴 간병 생활. 그의 곁에서 습관처럼 떠들었던 이야기들. 처음엔 그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잊지 않기 위해 자꾸 말을 걸었었다.
‘오늘은 컨디션이 어때요?’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네요. 이따 디자이너 선생님 오시기로 했어요. 예쁘게 정리해드릴게요.’
‘오늘 도하 씨 생일인 거 알죠. 축하해요.’
그렇게 자꾸 말을 걸지 않으면 그가 왠지 숨 쉬고 있는 것 같지 않아서. 그가 살아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자꾸 속삭였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습관이 돼 친한 친구에게 하듯 주제를 막론하고 털어놓았다는 게 문제이지만. 가끔은 그녀도 지치고 외로워서. 긴 간병 생활에 제 이야기를 들어줄 친구가 필요해서. 잠든 그에게 속삭이고 또 재잘거렸다. 한데 그걸 그가 듣고 있을 줄은 몰랐다.
“……다 듣고 있었던 거예요?”
떨림을 숨길 수 없는 목소리에 도하가 비딱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아마도.”
“……정말 그걸 다 듣고 있었다고요?”
“처음엔 환청인 줄 알았지. 그런데 강 박사님과 이야기하다 보니 그게 환청이 아닐 수도 있다고 하시더군.”
“……!”
“식물인간 상태에서도, 몸속에 의식이 갇힌 채 이야기를 듣고 생각하는 게 가능하다고.”
“어떻게……!”
“뇌 기능이 회복될수록 더 많은 목소리가 기억나고 있어.”
“…….”
“잠잘 때도, 깨어 있을 때도 온통 당신 목소리가 들려와서 미치겠다고.”
“……!”
지쳐 보이는 도하의 얼굴에 지안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도 그 말을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닐 것이다.
“듣고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요. 정말 미안해요.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이런 후유증을 겪게 해서요.”
“……사과 따위 받으려고 온 게 아니야.”
“원하시는 게 있다면 말해 주세요. 손해배상 같은 걸 원하시면……”
가만히 듣고 있던 도하가 거칠게 말허리를 끊었다.
“그딴 건 필요 없어.”
“……!”
지안의 놀란 두 눈이 핏대 선 그의 목을 스치듯 보곤 바닥을 향해 시선을 떨궜다.
“돌아와.”
단호한 목소리에 그녀의 낯빛이 이내 창백해졌다.
“……네?”
“다시 돌아오라고. 내가 완벽하게 일상으로 복귀할 때까지 내 옆에 있어.”
“……!”
“당신한테서 시작된 거니까, 당신한테 답이 있겠지. 이 말도 안 되는 후유증에서 벗어날 답이.”
다시 그에 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지안은 본능적으로 그것만은 피하고 싶은 마음에 뱉었다.
“……제 목소리를 들으면 더 힘들어질지도 모르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피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야. 정면 돌파하는 게 내 방식이지.”
지안은 여러모로 난감했다. 인간으로서 누군가 자기 때문에 고통받고 있다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야 마땅하단 걸 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 권도하를 감당할 수 있을지, 그와 다시 전처럼 환자와 간병인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막막했다. 더 이상 그는 온순하게, 아기처럼 잠든 남자가 아니었다. 거칠고 위압적인 남자.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그런 불안한 남자였다. 그때 도하의 시선이 소파 테이블에 올려진 서류 봉투에 꽂혔다. [골드 로펌] ‘로펌’이라는 글자가 그의 시선을 붙잡고는 무한한 상념을 자아내는 것 같았다. 그의 시선이 거기에 가 닿은 걸 본 지안은 어서 화제를 돌렸다.
“오늘 변호사를 만나고 왔어요."
"뭐?"
"불행 중 다행인 건…… 혼인무효소송이라는 게 있대요.”
그녀의 말에 도하의 눈이 순간 커졌다.
“결혼 당사자가 결혼에 동의한 적 없다는 것을 입증하면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대요. 결혼했단 기록도, 이혼했다는 기록도 전부 다.”
도하가 어떤 표정을 지어주길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무관심하고 사늘한 표정은 예상치 못했던 거였다. 유부남도 이혼남도 되고 싶지 않다던 남자. 누구 마음대로 당신이 내 아내냐던 남자는 대체 어디 가고.
“……그래서?”
되돌아온 낯선 반응에 지안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협조 부탁드린단 말씀 드리려고요. 권도하 씨가 동의하지 않은 결혼이었단 것만 확인해 주시면 돼요.”
“그건……"
"……?"
지안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 그 순간 나직이 흘러나오는 목소리.
"그건 당신 하는 거 봐서.”
도하가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리며 씩 사악하게 웃었다. 지안은 기가 차다 못해 욱하는 얼굴로 그를 쏘아보았다.
“뭐라고요?”
“생각해보니, 잠든 사이 귀찮은 일 하나를 해결해버린 것도 나쁘지 않더군."
"……네?"
"우리 할머니 평생 숙원사업 말이야. 결혼 따윈 생각도 없었는데. 이런 식으로 해치웠으니 홀가분하기도 하고.”
“……!”
지안은 맥없이 풀려 있던 손가락을 저도 모르게 꾹 말아쥐었다.
“이봐요, 권도하 씨!"
지안이 외친 그때 그가 다시 사납게 그녀의 말을 잘랐다.
“서지안, 당신이 먼저 대답해. 돌아와 내 옆에 있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