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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부부잖아, 우리 (6/110)

6화. 부부잖아, 우리2021.12.20.

룸미러를 보는 최 기사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거울 속 도하와 지안은 서로를 밀어내는 자석처럼 몸과 시선을 정반대로 한 채 앉아 있었다. 차창 밖으로 고개를 고정시킨 지안은 수심 가득한 눈으로 먼 곳을 보았다. 그녀가 간헐적으로 내뱉는 차가운 한숨이 차 안의 공기를 더욱 얼어붙게 했다. 지안은 다시 도하를 따라나설 수밖에 없었던 조금 전의 상황을 떠올리고 있었다.

16548863833688.png‘서지안, 당신이 먼저 대답해. 돌아와 내 옆에 있겠다고.’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간병인으로서 마지막 책임을 다하라고.’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내 귀에 박힌 당신 목소리. 그 몹쓸 후유증이 사라질 때까지 당신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어.’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당신을 최고의 간병인이자, 손자 며느릿감이라고 여겼던 우리 할머니를 실망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마지막 책임을 다하도록 해.’

16548863833692.jpg‘……!’

지안은 저를 누구보다 믿어주던 정순의 이름을 듣는 순간, 무장해제되고 말았다. 그에게 몹쓸 후유증이 남았다는 걸 알고 속상해할 정순을 떠올리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간병인으로서 마지막 남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따라나선 길. 하지만 확실해 해둬야 할 게 있었다. 지안은 무미건조한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던 도하를 향해 나직이 속삭였다.  

16548863833692.jpg“약속……해 주세요.”

16548863833688.png“……뭐?”

16548863833692.jpg“후유증 다 낫고, 정상적으로 일상 복귀하게 되면 그땐 제가 하자는 대로 잘 협조해 주신다고요.”

내내 불안했다. 이렇게 돌아가면 왠지 다신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단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잠들어 있던 사이, 귀찮은 일을 해결해 홀가분하다는 도하의 말이 자꾸만 마음에 가시처럼 걸렸다. 귀찮은 숙제를 엉뚱한 여자가 대신해 놨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젠 그녀가 거부하고 싶었다. 자신이 마음대로 대신해 놓은 숙제를 지우개로 싹싹 모두 지워버리고 싶었다. 그를 알면 알수록 그 마음이 커졌다. 긴 잠을 자고 있던 권도하라는 사람은 그래도 제법 괜찮은 동반자였다. 나긋한 숨소리와 흔들림 없이 편안한 표정은 보고만 있어도 그녀의 마음까지 차분해지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긴 잠에서 깨어난 그는 함께하기엔 많이 두려운 사람이었다. 의미심장한 숨소리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자꾸만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되도록 함께 있고 싶지 않다. 이런 남자와는 무늬만 부부라도 되고 싶지 않았다. 지안은 그 간절함을 눈빛에 담아 도하를 바라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비웃음 섞인 목소리뿐.

16548863833688.png“앞일을 함부로 단언하는 건 좋지 않아.”

16548863833692.jpg“……뭐라고요?”

16548863833688.png“누가 알았겠어? 내가 사고로 3년을 죽은 듯 누워 있을 줄.”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그러니까 앞일을 정해두고 미리 마음 쓰지 말라고.”

16548863833692.jpg“……하지만!”

16548863833688.png“혹시 모르잖아? 계속 내 아내로 살고 싶어질지. 그렇게 해 달라고 애원할지.”

그것만은 장담할 수 있겠네요. 그럴 일은 절대,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없을 거예요! 앙다문 지안의 입술 끝이 가늘게 떨렸다. 지안은 시선을 돌려 차창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어두컴컴한 세상이 마치 그녀가 앞으로 걸어야 할 시간처럼 막막해 보였다. 어쩌면 그가 잠들어 있던 지난 3년의 시간을 전부 다 더해도, 깨어난 그와 함께할 시간만큼 버겁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휴우. 버텨낼 수 있을까. 두려움이 깃든 그녀의 시야로 익숙한 풍경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언제봐도 청아하고 아름다운 저택. 싱그러움이 가득한 정원을 품고 있는 집. 고향에 돌아온 듯 잠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후에 방을 보러 다녀서인지, 이곳의 소중함과 따스함이 더 깊이 와닿았다. 그때 그녀의 귓가로 중저음의 울림 있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16548863833688.png“뭐해, 내리지 않고.”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는 익숙한 풍경 속에 이런 남자는 애석하게도 존재하지 않았다. 불쑥 내뱉는 말로 사람 속을 들쑤셔놓는 남자, 비딱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남자 따윈 분명 없었다. 뒤늦게 차에서 내린 지안은 저만치 앞서 걷는 도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커다란 몸집만큼이나 그림자도 큰 남자. 저의 두 배, 아니 세 배쯤 되려나. 앞서 걷던 도하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리자, 지안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분주히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다시 돌아오고 말았다. 자신이 저지른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수습하기 위하여. 이상하고 불편한 이 인연을 깔끔히 매듭짓기 위하여. ***

16548863856001.png“누가, 누가 왔다고!”

정순의 메마른 입술이 쩍 벌어졌다.

1654886388171.jpg“서지안 사모님이 돌아오셨습니다.”

최 기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관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그 소리에 정순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선발로 현관 앞까지 달려나갔다. 도하를 뒤따라 들어오는 지안의 얼굴을 보고는 정순은 그대로 굳었다. 칙칙하던 노파의 낯빛이 조명이라도 켠 듯 금세 환해졌다.

16548863856001.png“지안아!”

정순은 그대로 달려가 지안을 와락 끌어안았다.

16548863833692.jpg“……할머님!”

바람처럼 달려온 노인의 작은 몸이 지안의 품에 와락 감겼다. 두 사람은 한동안 그렇게 서로를 꼭 부둥켜안고 있었다. 도하는 이산가족 상봉이 따로 없는 광경을 잠시 넋을 놓고 지켜보다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자신이 잠든 사이, 저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왠지 모를 묘한 소외감이 들었지만, 그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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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안은 자신이 좋아하던 정순의 냄새를 가만히 맡았다. 친할머니한테서도 비슷한 향기가 났다. 어린 지안은 그 향을 꼬순내라고 불렀었다. 누룽지처럼 고소하고, 왠지 모르게 포근하면서 따듯한 냄새. 마냥 안겨 잠들고 싶은 그런 냄새.

16548863856001.png“잘 왔어. 잘 돌아왔어. 얼마나 걱정했다구.”

정순이 주름진 손으로 토닥토닥 지안의 마른 등을 토닥였다. 그러다 며칠 새 더 야위었다고 느꼈는지 화들짝 몸을 떼며 말했다.

16548863856001.png“굶고 다닌 거야? 왜 이렇게 뼈만 앙상하니!”

16548863833692.jpg“안 굶었어요. 저 아시잖아요. 식사는 꼭 제때 챙기는 거.”

16548863856001.png“그렇지. 우리 지안이가 얼마나 야무진 아이인데 밥을 굶고 다니겠어. 내 정신 좀 봐.”

정순이 배시시 웃자 지안도 따라 웃다가 흠칫 놀라 물었다.

16548863833692.jpg“제가 아니라 할머님이 야위셨는걸요.”

정말이었다. 정순은 볼 아래가 쏙 들어가 있었고, 눈 밑도 퀭했다. 입술이 건조하게 메말라 갈라진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16548863856001.png“……나야 뭐. 늙은이가 다 그렇지 뭐.”

16548863833692.jpg“할머님, 저랑 약속하셨잖아요. 식사 잘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겠다고.”

지안이 안쓰러운 듯 이맛살을 구기자, 정순은 그런 지안의 걱정이 반가운 듯 싱긋 웃었다.

16548863856001.png“저녁은?”

지안이 고개를 가로젓자, 정순은 손수 저녁을 차려주었다. 지안은 식사 중간 무심결에 시선이 닿은 곳에서 제 손으로 밥을 먹는 도하를 보곤 흠칫 놀랐다. 3년간 튜브 관을 통해 경관식 식사만 하던 그가 직접 밥을 먹고 있는 게 아직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가 정말 살아났다는 게 피부로 와닿았다. 식사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간 도하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메이드가 들어와 약을 챙겨주었다. 도하가 물과 캡슐을 가볍게 털어 넣자 메이드가 빈 컵을 받아 나가려는 듯 몸을 돌렸다. 도하는 잽싸게 메이드를 불러 세웠다.

16548863833688.png“잠깐.”

1654886388171.jpg“네, 도련님?”

16548863833688.png“그동안 고생했어요. 이제 나를 챙기는 건 서지안, 아니 내 아내가 다시 맡을 겁니다.”

1654886388171.jpg“네?”

16548863833688.png“내일부턴 별채에서 근무하도록 하세요. 페이는 같고, 일은 더 수월할 테니.”

1654886388171.jpg“……!”

16548863833688.png“그럼 이만 나가 보세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가는 메이드를 뒤로하고 도하는 다시 먼 허공으로 눈을 돌렸다. 정순과 담소를 나누고 있던 지안의 눈에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나가는 메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어. 놀란 지안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간병인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16548863833692.jpg“어디 가시려고요?”

지안의 목소리에 메이드가 기울어져 있던 캐리어를 바로 세우고 그녀를 봤다.

1654886388171.jpg“아, 별채에 짐을 옮겨두려고요.”

16548863833692.jpg“별채요?”

1654886388171.jpg“……네. 도련님께서 이제 사모님께서 도련님을 돌보실 거라고, 별채로 가라고 하셨거든요.”

16548863833692.jpg“……!”

이야기를 듣던 지안의 두 눈이 순간 커졌다. 도하를 케어하기 위해 돌아온 건 맞지만, 이렇게 한밤중에 메이드를 다른 곳으로 보낼 만큼 시급한 일인 줄은 몰랐다.

1654886388171.jpg“그럼, 저는 이만 건너가 보겠습니다.”

메이드가 지친 듯 꾸벅 인사하곤 다시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

16548863833692.jpg“네. 고생하셨어요.”

지안은 늦지 않게 인사를 건네곤 곧장 도하가 있는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노크를 하자, 얼마 뒤 문 너머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48863833688.png“들어와.”

그녀인 줄 이미 알고 뱉은 말 같았다. 지안은 병실로 발을 내딛기 무섭게 말했다.

16548863833692.jpg“이 밤에 도우미분을 별채로 보내셨다고요?”

살짝 원망이 섞인 그녀의 목소리에 뭐가 잘못됐냐는 듯 도하의 눈이 한결 또렷해졌다.

16548863833688.png“열심히 하는 친구인 건 아는데, 내 후유증엔 별 도움이 안 되거든.”

후유증, 이라는 말에 지안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말했다.

16548863833692.jpg“저라고 별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16548863833688.png“그래도 노력은 해 봐야지. 당신이 저지른 일이니까.”

당신이 저지른 일. 그 말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지안이 낮게 내뱉었다.

16548863833692.jpg“……그래요. 제가 저지른 일이죠.”

지안은 그 말을 하고는 천천히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무거운 어깨가 무언가에 짓눌린 듯 조금씩 내려오는 게 느껴진다. 변호사를 만나러 갔다가, 방을 보러 다녔고, 돌고 돌아 결국 여기까지 왔으니 지칠 만도 했다. 하루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온몸이 노곤해져 어서 빨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려면 한시라도 바삐 권도하가 없는 곳으로 달아나야 했다. 문 쪽으로 걸음을 내딛던 지안의 뒤통수로 다시금 그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16548863833688.png“서지안.”

16548863833692.jpg“……!”

지안은 멈칫 걸음을 멈췄다.

16548863833688.png“어딜 가려고.”

낮고 울림이 큰 목소리가 병실 안을 휘감고는 이내 공기 중으로 사라진다.

16548863833692.jpg“……밤이 깊었잖아요. 권도하 씨도 외출하느라 무리하셨을 텐데 어서 푹 쉬세요.”

그를 걱정해주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잠시 당신 없는 곳에서 숨을 돌리려 한다는 말보다는.

16548863833692.jpg“그럼 쉬세요.”

홀연히 돌아서려는 지안을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가 붙잡았다.

16548863833688.png“거기 서.”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나를 혼자 두고 가겠다고?”

16548863833692.jpg“……그게 서로 편하지 않겠어요?”

겉보기에 멀쩡해 보일 정도로 호전된 그와 한방에서 밤을 보낼 생각은 없었다. 지안은 목에 힘을 주어 꾹꾹 뱉었다.

16548863833692.jpg“침상 옆.”

그녀의 짧은 말에 도하의 눈동자가 짙어졌다.

16548863833692.jpg“침상 옆에 보시면 긴급 벨이 있어요. 제 방, 제 방 화장실 어디서든 울리는 벨이에요. 무슨 일이 있거나, 급할 때 눌러주시면.”

가만히 듣고 있던 도하가 차가운 입술로 그녀의 말허리를 잘랐다.

16548863833688.png“좋아, 그럼 혼인 무효 소송 얘기 같은 건 없던 거로 하지.”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책임을 다하지 않는 사람의 요구를 내가 꼭 들어줘야 할 의무는 없잖아?”

16548863833692.jpg“……권도하 씨.”

16548863833688.png“내가 빨리 회복하길 바라거든, 그래서 어서 벗어나고 싶거든. 여기 있어, 내 옆에.”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그리고 잊었나 본데, 당신이랑 나 부부 아닌가?”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부부라면 한 침대는 아니라도, 적어도 한방에선 자야지.”

16548863833692.jpg“……!”

16548863833688.png“안 그런가. 내 아내 서지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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