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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저질스러운 미소는 사양할게요 (8/110)

8화. 저질스러운 미소는 사양할게요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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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864244245.jpg“……!”

손끝에 밴 땀에 단추를 잡고 있던 손가락이 그만 미끄러졌다. 지안의 손이 허공으로 툭 떨어지자, 도하의 입꼬리가 비딱하게 올라갔다. 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16548864244249.png“다 봤나 보군.”

16548864244245.jpg“…….”

그 말에 지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게 아닌데. 어디까지 봤냐고? 글쎄……. 3년 동안 매일같이 그의 옷을 갈아입혔고, 마른 타월에 물을 적셔 몸을 닦아줬었다. 하지만 그건 간병인으로서 당연한 일이었을 뿐, 그의 몸을 훔쳐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안이 당황한 건 다른 게 아니었다. 그의 말에 놀라서 얼어버린 제 입술 때문이었다. 간병인이 간병을 하면서 환자의 몸을 보게 되는 건 당연하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의 물음에 왜 재깍 대답하지 못한 건지. 왜 말문이 턱 막혀버린 건지. 꼭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왜 바보처럼 수그러든 건지 몰랐다. 생각에 잠긴 지안의 눈동자가 부서질 듯 흔들리자 도하가 말했다.

16548864244249.png“할 말이 많은 모양인데.”

지안은 꾹 말아 감고 있던 입술을 떼 목에 힘을 주었다.

16548864244245.jpg“그래요. 봤어요.”

3년간의 진심 어린 간병을, 의식 없는 남자의 몸을 염탐한 시간으로 왜곡되게 둘 순 없었다. 간병인으로서 환자 권도하의 몸을 봤을 뿐, 남자 권도하의 몸을 본 건 아니다.

16548864244245.jpg“본 건 맞는데, 그저 간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본 거지, 다른 이유로 본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녀가 잠시 말끝을 늘어뜨리자, 도하의 눈동자가 다음 말을 기다리며 짙어졌다.

16548864244245.jpg“……그런 저질스러운 미소 짓지 마세요.”

16548864244249.png“뭐?”

어떻게 이런 말을 저렇게 차분하고 나긋나긋하게 뱉을 수 있는지. 격앙된 비난보다 더 사람의 마음을 때리는 목소리였다. 도하의 입꼬리가 추락하듯 아래로 굽어갔다. 잠시 그녀의 말을 곱씹던 그가 되묻는다.

16548864244249.png“저질스러운 미소?”

16548864244245.jpg“네.”

단호하게 대답한 지안은 얼마 후 높낮이 없이 기계적으로 뱉었다.

16548864244245.jpg“침대 오른쪽 협탁 위.”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한 목소리에 도하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러곤 본능적으로 그녀가 말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안이 말한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그의 입꼬리가 픽 꺼진다. 탁상용 거울. 도하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 지안이 말했다.

16548864244245.jpg“본인은 모를 것 같아서요. 그게 어떤 미소인지.”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가 다시 픽 웃으며 말했다.

16548864244249.png“……많이 억울했나 보군. 이렇게 즉각 보복하는 걸 보면.”

그의 눈을 보고 있노라니 지안은 제 속을 전부 읽히는 것 같아 불편했다. 시선을 돌리던 그녀의 눈에 조금 전 벗기다 만 그의 옷이 들어왔다. 상의 단추 서너 개가 풀려 속살이 은근하게 드러나 있었다. 커다란 품만큼이나 쩍 벌어져 굴곡진 상체가 옷 사이로 도드라져 시선을 붙잡았다. 침대에 꼼짝없이 누워 있던 그의 몸은 핏기없이 창백했었다. 가끔은 피가 돌지 않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로. 한데, 피땀 흘린 재활로 다시 태어난 그의 몸은 제법 구릿빛에 탄력까지 있어 보였다. 그의 몸에 시선이 머무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걸 지안이 인지했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

16548864244249.png“지금 이것도 간병인으로서 보는 건가?”

그의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지안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러곤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다. 그녀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표정을 짓던, 어딜 보든 상관없다는 듯 잠들어 있던 남자. 그가 이제는 그녀의 말, 표정, 시선 모든 것을 문제 삼는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16548864244245.jpg“…….”

16548864244249.png“오랜 습관이라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군.”

도하가 으레 넘겨짚자, 지안은 참지 못하고 말했다.

16548864244245.jpg“습관이라뇨. 제가 권도하 씨 몸을 훔쳐보는 습관이라도 있다는 말씀이세요?”

순식간에 귓불이 붉어질 정도로 그녀는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가 낮게 대꾸했다.

16548864244249.png“그건, 본인이 더 잘 알겠지.”

말문이 턱 막혔다. 무슨 말을 해도 그에겐 상대가 안 된다. 지안은 다시 한번 자신의 무모함을 후회했다. 아무리 제겐 의미 없는 결혼이었다지만, 적어도 상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정도는 알아보고 할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뻔뻔하고 집요하며 의심 많은 남자일 줄은 몰랐다. 그가 정말 정순의 친손자가 맞나 싶었다. 어떻게 이런 돌연변이가 인자한 정순의 손자일 수 있단 말인지. 지안은 다시 속으로 다짐했다. 그를 상대하려 하지 않겠다고. 그냥 무난하게, 가능한 한 부딪히지 않고 지나치겠다고. 그러다 보면, 이 남자와 다신 마주칠 일 없이 떠나게 될 날이 올 거라고. 그녀가 마음을 다잡고 있던 그때, 다시금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16548864244249.png“이제 감상은 그쯤하고, 어서 하던 걸 마저 하지 그래?”

16548864244245.jpg“……!”

감상한 게 아니라고 짚어주고 싶었지만, 그냥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지안은 다시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서 팔을 뻗었다. 거침없이 단추를 붙잡았지만 어째 전처럼 푸는 게 쉽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가느다란 손을 매섭게 주시하고 있었고, 그때마다 손이 언 듯 엇나갔다. 단추 하나를 푸는데 이토록 버벅거리다니. 그러다 손이 멀리 빗나가 그의 살결을 스칠 때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기가 통하는 것처럼 아찔했다. 지난 3년간, 이 일을 대체 어떻게 해왔던 걸까. 겁도 없이 남자의 옷을 벗기고 입히고 그랬다는 게 새삼 놀랍고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꾸역꾸역 어렵게 마지막 단추를 푸는 순간, 그의 몸을 덮고 있던 환자복이 툭 아래로 내려갔다. 애써 외면하고 있지만 내리깐 시야 위로 커다랗고 광활한 상체가 느껴졌다. 지안은 시선을 계속 내리깐 채 몸을 돌려 수납장 쪽으로 갔다. 서랍을 열어 새 옷처럼 뽀송한 환자복 상의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긴장으로 얼룩졌던 감각이 보드랍고 사각거리는 옷의 감촉에 잠시 위안을 받는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서랍을 닫으려던 그녀의 눈에 바로 아래 서랍이 보였다. 환자복 하의만 모아 따로 정리해둔 칸이었다. 보통은 아침저녁으로 상의와 하의를 함께 교체해 주곤 했었다. 아무리 바쁜 날도 상의만 갈아입힌 적은 없었는데……. 지안은 고개를 다 돌리지 않고 작게 움직여 저만치 멀리에 있는 그를 의식했다. 하의도 갈아입겠냐고, 다시 말을 걸면 분명 또 걸고넘어질 거다. 다 봤다는 말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아무래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지안은 조금 전의 고민을 그에게 들키지 않으려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가 있는 침상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든 순간, 온몸이 바짝 얼어붙었다.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땐 제대로 실감 나지 않던 드넓은 어깨가 옷을 벗자 더 크고 도드라져 보였다. 원래도 작은 그의 얼굴이 어깨와 함께 보니 더 작아 보였다. 어깨 아래로 발달한 두텁고 선명한 굴곡들이 잠시 넋을 잃게 만들었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근육이 들어찬 몸을 보자 지안은 본능적으로 굳어버렸다. 자신이 알던 몸이 맞나 싶었다. 3년이면 천 번은 족히 눈에 담고도 남았을 텐데, 지안은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겁먹은 눈이었다. 그녀가 바짝 얼어 서 있자, 그의 고개가 자연스레 그녀 쪽을 돌아봤다. 그 기척에 지안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정신으로 그에게 환자복을 입혔는지 모른다. 최대한 긴장한 티를 내지 않고, 그의 몸이 낯설지 않은 표정을 지었지만, 손의 떨림까지 감출 순 없었다. 익숙하던 일이 평소처럼 잘되지 않는 건, 그의 모든 게 자신이 알던 것과 달리 낯설게 보인다는 건, 더 이상 그가 환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방증일지도 몰랐다. 지안의 눈에 도하는 더 이상 이전에 그녀가 돌보던 환자가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기엔 너무도 불편하고 어려운 남자일 뿐. *** 도하는 조금 전 지안이 나간 병실 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여리여리하고 작은 체구와 달리 외유내강의 성격을 가진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강단 있고 대가 세서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것 같은. 그랬기에 3년이라는 긴 시간, 제 몸보다 두 배는 족히 더 큰 남자를 혼자 간병했을 거라고. 한데 그런 여자가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했다. 도하는 지안이 갈아입혀 주고 간 옷을 쓱 내려다봤다. 하얗게 질려 손을 파르르 떨던 모습을 떠올리니, 피식 헛웃음이 나고,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녀를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잊고 있던 변화를 느꼈다. 지안이 떠나고 몇 날 며칠 지독하게 저를 괴롭혀온 환청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곁에 있어야 평안할 수 있다는 걸, 본능이 알아차렸는지 지난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붙잡았다. 부부니까 한방에서 자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로. 깊은 어둠으로 가득한 방안에, 밤새 꺼지지 않는 은은한 불빛을 켜놓은 것처럼 그녀가 곁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간만에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청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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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말 서지안 때문일까. 물론 아직 더 지내봐야 알 수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으로선 놀라운 변화였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분명 뭔가가 있는 것 같다. 서지안이라는 여자에게. 생각에 골똘해진 도하의 귓가로 노크 소리가 들렸다.

16548864244249.png“네.”

도하는 낮게 뱉고 지그시 문 쪽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고 강 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침 진료 시간이었다.

16548864291917.jpg“몸은 좀 어떠십니까?”

강 박사의 말에 도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16548864244249.png“일어난 직후에 팔과 어깨가 조금 불편하다가 지금은 괜찮아졌습니다.”

16548864291917.jpg“많이 불편하던가요?”

16548864244249.png“처음보다는 나아진 것 같은데…….”

16548864291917.jpg“일시적으로 그럴 수 있습니다. 많이 불편할 땐 바로 저를 부르십시오.”

16548864244249.png“……그건 그렇고, 언제쯤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겠습니까?”

16548864291917.jpg“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하셨지만 그래도 서두르시면 안 됩니다. 3년을 의식 없이 누워계셨다는 걸 생각하셔야 하고요.”

16548864244249.png“그럼…….”

16548864291917.jpg“8개월간 기초 재활을 끝내셨으니, 수영 같은 전신운동으로 떨어진 체력을 끌어올리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도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 박사가 나가고 혼자 남은 도하는 멍하니 병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 시선 끝에 TV 모니터가 들어왔다. 자신이 잠들어 있는 지난 3년 동안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얼마나 많이 변했을까. TV 전원을 켜는 도하의 눈에 일말의 긴장감이 번졌다. 뉴스 프로에선 나라 곳곳,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다양한 소식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소식에 그의 눈썹이 크게 출렁였다. [국내 최대 규모의 배달 딜리버리 그룹 CTM이 미국 증시 상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CTM의 지세준 대표는…….] 뉴스 화면 속 남자를 보는 도하의 두 눈이 크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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