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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맹렬하게 헤엄치는 (9/110)

9화. 맹렬하게 헤엄치는2021.12.31.

세상이 어둠으로 뒤덮인 시간. 물 안으로 조명이 켜진 야외 수영장은 마치 멋진 휴양지를 떠오르게 했다. 저택 뒤편에 이렇게 큰 수영장이 있다는 걸 지안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곳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게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지난 3년간, 수영장은 늘 주인 없는 공간으로 방치돼 있었다. 찾는 이 없는 풀은, 가끔은 황량하고 음습해 보이기도 했다. 이곳의 유일한 이용자가 기약 없이 잠들어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도하도, 수영장도 끝없이 메말라 그렇게 영원히 생기를 잃게 될 줄 알았다. 넘실거리는 물과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눈부신 조명에 지안은 새삼 감탄했다. 주인을 잃고 허전하던 수영장도, 의식 없던 그도 이렇게 소생하다니.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 끝까지 가봐야만 알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득 차오른 물만큼 지안의 가슴 속에도 깊은 사색이 차오르던 그때,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16548864390575.png“일찍 나왔군.”

도하의 목소리였다. 지안은 얼른 뒤를 돌아봤다. 상의를 탈의한 채 수영모와 수영복 하의를 입은 그가 걸어오고 있었다. 순간 놀란 동공이 물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댔지만, 이내 중심을 잡았다. 오후 내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던 그가 불쑥 수중 재활에 대해 얘기했을 때, 이미 어느 정도 예견한 일이었다.  

16548864390581.jpg‘수중 재활이요?’

16548864390575.png‘그래. 기초 재활을 마쳤으니, 수영 같은 고강도의 전신운동으로 체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더군.’

16548864390581.jpg‘아…….’

16548864390575.png‘관리인에게 연락해서 야외 풀 정비를 부탁하도록 해.’

16548864390581.jpg‘네.’

  풀 가까이에 다가선 그는 수영장을 가득 채운 물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 앞에 다시 서게 된 감회가 남다른 표정이었다. 사고를 당하기 전 그는 유명한 수영광이었다고 했다. 정순은 그룹을 이어받을 후계자가 또 있었다면, 도하는 분명 수영선수의 길을 걸었을 거라고 했었다. 그러고 보면, 유난히 넓고 커다란 어깨는 수영선수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지안은 말없이 도하를 응시했다. 아직도 병실이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그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야외 풀장에 있는 그의 모습은 언젠가 본 적 있단 기시감이 들 정도로 자연스럽고 잘 어울렸다. 물 아래에서부터 비추는 조명이 그의 몸과 얼굴에 닿을 때면, 지안은 이따금씩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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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 광고 속 한 장면 같기도 하고, 꿈을 꾸듯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다시 만난 수영장과 인사를 마친 그가 가볍게 몸을 풀기 시작한다. 별거 아닌 스트레칭을 하는 것뿐인데, 유난히 길고 다부진 팔다리가 만들어내는 태가 남다르다. 마치 올림픽 무대에 선 선수의 준비 운동처럼 비장하고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지안은 말없이 그의 작은 몸짓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그녀의 역할은 물 밖에서 그가 문제없이 움직이는지 지켜보는 안전요원이었다. 준비 운동을 마친 그가 물속에 입수하기 전 물안경을 쓴다. 그러곤 쓱 고개를 돌려 저만치에 떨어져 있는 지안을 바라봤다. 안경 속에 감춰진 눈빛이 어떤 빛을 띠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의 고개가 저를 향한 순간, 지안은 잠시 숨을 꾹 참고 긴장했다.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른다. 그저 반사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요하던 수영장 안의 물이 커다랗게 일렁였다. 그의 입수를 확인한 지안은 눈에 힘을 주어 한동안 그곳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3년을 잠들어 있던 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유연하고 부드러운 몸놀림. 지난 시간, 그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닷속을 홀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수많은 갈래로 갈라지는 물살과 그 위의 커다란 몸. 물과 하나가 된 그의 움직임을 지안은 넋 놓고 바라보았다. 물속에서 점점 더 몸이 풀리는지 그의 손짓과 발짓이 전보다 더 활기를 띠었다. 깊은 물 속을 금세 정복해나가는 그를 보자, 불안감마저 씻긴 듯 사라졌다. 그는 생각보다 더 강한 사람이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사람은 보통 사람의 사고로는 판단하기 힘든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수영장 끝까지 간 그가 가볍게 턴을 해 다시 이쪽을 향해 헤엄쳐오는 게 보였다. 지안은 말없이 돌아오는 그를 지켜봤다. 나중에는 안전요원이라기보다 관객처럼 그의 수영 실력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익숙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스며왔다.

16548864390581.jpg“이런 날도 오는구나.”

지안은 얼른 고개를 돌려 뒤를 봤다. 베이지색 얇은 카디건을 걸친 정순이 수영장 쪽을 고즈넉이 바라보고 있었다.

16548864390581.jpg“할머님, 언제 나오셨어요?”

지안이 반갑게 부르자 정순의 두 눈이 금세 둥글게 휜다.

16548864390616.png“도하가 수영을 한다기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해서 와봤지.”

지안은 정순이 걱정을 할까 봐 말없이 조용히 나왔었다. 하지만 부쩍 분주해진 메이드들의 행동과 말이 정순의 눈과 귀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두 여자의 마음에 스몄던 걱정을 모두 타파해줄 요량인지, 도하의 움직임은 더 탄력을 받았다. 그의 거침없는 수영에 지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정순도 지안만큼 진지해진 눈으로 그곳을 바라봤다. 그러곤 나직이 말했다.

16548864390616.png“도하 녀석, 마음이 복잡한 모양이구나.”

16548864390581.jpg“……네?”

16548864390616.png“사고 나기 전에도 그랬지.”

16548864390581.jpg“…….”

16548864390616.png“마음이 복잡한 날에는 저렇게 거칠게 수영을 하더구나.”

마음이 복잡한 날. 정순의 말에 지안은 도하의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물을 그저 만끽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뭔가 거칠고 무서운 데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오후 내 그는 침울해 보였다. 옷을 벗겨달라고,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던 오전과는 사뭇 달랐다.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병실에 오고 간 건 그녀와 주치의 강 박사뿐이었다. 매일같이 보는 얼굴 때문에 그의 마음이 복잡할 리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콜록콜록. 생각에 잠긴 지안의 귓가로 정순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16548864390581.jpg“할머님, 괜찮으세요?”

정순은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걸치고 있던 카디건을 잡아당겨 앞섶을 모았다.

16548864390616.png“낮에는 여름만큼 푹푹 찌는데, 밤엔 늦가을만큼 쌀쌀하구나.”

16548864390581.jpg“이만 들어가서 쉬세요. 도하 씨는 제가 잘 챙겨서 들어갈게요.”

지안은 정순의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아 저택 쪽으로 걸어갔다.

16548864390616.png“혼자 가도 되는데.”

16548864390581.jpg“바로 앞인데요, 뭘. 입구까지만 바래다 드릴게요.”

지안의 상냥한 목소리에 정순의 미소진 눈가가 가늘어졌다. *** 피부에 차가운 물이 닿는 순간, 살아 있다는 게 강력하게 느껴졌다. 도하는 긴 잠에서 깨어난 이래, 가장 맹렬하게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하고 있었다. 몸 곳곳의 근육과 신경이 전처럼 자유로운 느낌은 아니었지만, 온 힘을 다해 헤엄쳤다. 커다란 손짓으로 물살을 밀어내듯,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온 불편한 생각을 씻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불쾌한 마음은 일렁이는 물살처럼 점점 더 큰 물결을 만들었다. 물을 가를 때마다 몇 시간 전, 대수롭지 않게 봤던 뉴스의 한 장면이 되살아났다. [국내 최대 규모의 배달 딜리버리 그룹 CTM이 미국 증시 상장을 앞두고 있습니다. CTM의 지세준 대표는…….] 지세준. 단정한 수트 차림에, 지적인 느낌을 자아내려 쓴 안경. 엘리트에 대한 대중들의 거부감을 줄이려는 계산이 들어가 보이는 소탈한 웃음까지. 뉴스 속 그는 도하가 알던 지세준이 아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미국 와튼스쿨 유학까지 꽤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 그리고 둘도 없는 선의의 경쟁자. 세준을 떠올리는 도하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준열하게 빛났다. 10년 전.

16548864390575.png‘10년 후 대한민국은 딜리버리 천국이 될 거야. 집 안에서 빠르게 모든 걸 받아볼 수 있고, 밤에 결제한 물건을 새벽에 바로 받아볼 수 있는. 그것도 앱 하나면 모든 게 가능하지.’

와튼스쿨의 다목적 공간인 밴스홀로 가던 길. 도하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세준은 건성으로 듣다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16548864445156.png‘딜리버리 천국? 밤에 주문한 걸 새벽에 받아본다라. 그게 가능하긴 해? 너무 앞서간 거 아닌가.’

어림없다는 식의 웃음에 도하는 제법 깊이 있게 접근한 사업계획을 천천히 설명했다. 처음엔 막연한 이야기로 치부하던 세준의 눈이 점점 진지하게 변해갔다.

16548864445156.png‘도하 네가 말한 시스템이 정말 정착된다면, 딜리버리 천국이 되고도 남겠네. 빠른 거 좋아하는 한국인 특성을 고려해봐도 꽤 좋은 아이템 같고.’

16548864390575.png‘학위 마치고 한국 돌아가면 바로 준비해봐야지.’

도하의 말에 잠시 생각을 하던 세준이 넌지시 던졌다.

16548864445156.png‘혼자 하려면 힘들 텐데. 내가 괜찮은 녀석 하나 소개해 줄까?’

그의 말에 도하가 관심 있는 듯 눈썹을 추켜들었다.

16548864390575.png‘누구?’

세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16548864445156.png‘레오 지라고. 와튼스쿨 최고 수재. 한국 이름은 지. 세. 준.’

16548864390575.png‘수재?’

16548864445156.png‘그래, 수재! 나 정도면 수재 아니냐? 부모 백으로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16548864390575.png‘여자 홀리기의 수재겠지. 저기나 봐라.’

도하가 가리킨 곳에 아직 소녀미가 남은 금발 머리 여학생이 세준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떴다.

16548864390575.png‘그새 또 바뀐 거냐? 에바랑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나.’

도하가 지친 듯한 목소리로 뱉었다.

16548864445156.png‘에바는 나랑 같이 한국으로 갈 생각이 없다잖아. 야, 나 그럼 가본다. 헤이, 샬럿!’

공부와 경영보단 연애에 더 두각을 보이던 지세준. 그가 뉴스 화면 가득 얼굴이 나올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 되어 있다니. 그것도 도하가 10년을 준비해온 딜리버리 사업으로.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하의 미간이 걷잡을 수 없이 구겨졌다. 3년 전, 도하가 교통사고를 당했던 때만 해도 케이원 그룹 딜리버리 사업팀이 국내 최초로 배달 앱을 개발하고 시험 운영 중이었다. 도하가 기억하는 마지막은 개발팀 팀장으로 세준이 일하던 모습이었다. 아무 일이 아니라고 치부하기엔 자꾸만 불편하고 어두운 생각이 그를 덮쳐왔다. 거친 헤엄을 멈추고 도하는 잠시 물 위에 바로 섰다. 젖은 채 내려온 머리칼에서 뚝뚝 물이 떨어지자, 손으로 거칠게 밀어 올렸다. 까만 밤하늘을 보고 있자,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더는 수영을 할 힘도,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 불편하고 어두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도하는 모든 것을 침잠시키려는 듯 물속으로 깊이 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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