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내가 왜 당신 침대에……2022.01.03.
“그래도 아직 불안하니까, 수영 너무 오래 하게 두진 말고.”
“네. 이제 그만 들어가자고 하려구요.”
지안의 말에 정순이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
“지안이 네가 있어서 내가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진심이 느껴지는 목소리에 지안의 입꼬리가 수줍게 올라갔다.
“그럼, 나는 이만 자러 가마.”
“안녕히 주무세요. 할머님.”
지안은 정순이 저택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곤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정순의 말마따나 밤바람이 제법 맵찼다. 낮에는 한여름처럼 바람 한 점 불지 않더니. 지안은 저만치 앞에 보이는 푸른색 불빛의 수영장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가까이에서 볼 때도 아름다웠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니 더 멋졌다. 삭막하던 저택에 푸르른 생기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앞으로 이 풍경도 종종 보게 되겠지. 지안은 괜스레 가슴이 훈훈해졌다. 지난 3년의 노력이 헛된 게 아니었다는 게 사뭇 뿌듯해진다. 깨어난 도하를 상대하는 일이 결코 녹록지 않았지만. 그래도 간병인으로서 이처럼 보람된 순간은 없을 거다. 자신이 맡은 환자가 회복하고, 건강을 되찾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지안은 입가에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자리로 돌아왔다. 천천히 수영장을 둘러보던 그녀의 두 눈이 순간 커졌다. 조금 전만 해도 물속에서 활개를 치던 도하가 보이지 않았다. 먼저 병실로 돌아갔나. 얼른 고개를 돌려 저만치 저택 쪽을 응시했다. 하지만 도하의 병실은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불이 꺼져 있었다. 뭔가 이상함을 느낀 그녀는 좀 더 가까이 다가가 풀 안을 살폈다. 금세 당황한 눈동자가 분주하게 흔들렸다. 지안은 중간중간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권도하 씨, 도하 씨!”
하지만 어디에서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놀란 그녀가 몸을 숙여 물속 곳곳을 주시하고 있던 그때, 저만치 앞에 까만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납처럼 물 아래로 깊이 가라앉은 뭔가를 발견한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도, 도하 씨!”
질겁한 그녀의 얼굴색이 순간 하얗게 변했다. 수영하는 그의 몸짓이 너무도 크고 활기차서, 그가 아직 환자라는 걸 잊어버렸다. 그래서 잠시 방심했던 거다. 짧은 순간, 온갖 무서운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갑작스러운 과격한 운동에 신경이 놀라 마비가 온 건 아닐까. 설마 물속에서 의식을 잃은 건 아니겠지. 이유를 불문하고 몹시 위험한 상황이었다. 땅 위에서 벌어져도 위험한 일이 물속에서 일어났다면. 게다가 물에 가라앉은 시간이 오래된 거라면……! 머릿속에 무서운 가정들이 가득 차오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잠시 얼어붙은 듯 그 앞에 서 있던 지안은 떨리는 다리에 힘을 한껏 넣었다.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그러곤 무작정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잔잔하던 물 위가 크게 일렁였다. 차가운 물이 연약한 피부를 빠르게 적셔왔다. 물속은 밖에서 볼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185cm의 장신에 프로 못지않은 실력을 가진 그만의 풀은 일반 풀과 달랐다. 깊이가 못해도 3미터는 족히 될 듯 깊었다. 고작 160cm가 조금 넘는 그녀를 가두고도 한참이 남았다. 지안은 마음이 앞서 저지른 실수를 그제야 깨달았다. 수영은커녕, 물 위에 제대로 떠 있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깊은 곳에 바보처럼 뛰어들었다니. 하지만 그 순간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자신의 환자가 눈앞에서 위험에 처한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지난 3년간, 저보다 도하를 더 걱정하고 먼저 돌봤던 것이 몸에 밴 관성이 되어 발현된 것이다. 이 와중에도 그녀의 이성은 도하를 걱정하고 있었다. 권도하 씨. 안 돼요. 여기, 이렇게 있으면 안 된다고요. 지안은 온 힘을 다해 사지를 휘저었다. 하지만 힘없이 물속을 겉돌 뿐, 몸은 점점 더 말을 듣지 않았다. 코와 입을 타고 미친 듯 스며들어오는 물에 숨이 막혔다. 조금씩 눈앞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건 처음이었다. 지안은 남아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천천히 눈을 떴다. 이 안에 있을 그를 찾기 위하여. 지안의 희뿌연 시야 끝에 까맣고 커다란 뭔가가 조금씩 들어왔다. 하지만 그마저도 쓸려오는 물살에 오래 볼 수 없었다. 하아. 그녀가 맥없이 눈을 감는 순간, 남아 있는 모든 힘이 손끝, 발끝으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안의 몸이 그렇게 완전히 넘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강력한 힘이 그녀의 허리를 필사적으로 붙잡아 끌어안았다. 완전히 흐릿해진 시야 속에 거친 숨을 내뱉는 젖은 남자의 실루엣이 보였다. 삐이이. 동시에 전원이 나가는 것처럼 지안은 의식을 잃었다.
*** 도하는 물속의 고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미친 듯 사지를 움직여 헤엄을 칠 때와는 다른 매력이었다. 복잡한 마음을 달래려 조용히 물속에 전신을 담고 그대로 머물렀다. 잠수하는 동안에는 잠시 이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3년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깊은 평화와 고요를 경험했던 그 시간으로. 물 밖에서는 빠르게 지나갔을 시간이, 물속에선 느린 호흡으로 흘러간다. 비로소 마음이 차분해지고, 머리를 어지럽혔던 복잡한 이슈들이 가라앉는 순간이었다. 풍덩. 커다란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물속의 평화를 완전히 깨뜨렸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저만치에 발버둥 치며 가라앉는 작은 몸이 보였다. 서지안? 그가 그녀를 알아봤을 때, 지안은 눈도 뜨지 못한 채 속절없이 가라앉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묻기도 전에 몸이 먼저 거칠게 물을 헤쳐 그녀 쪽으로 달려나갔다. 오래 걸리지 않아 그녀의 곁에 다가섰지만, 하얗게 질린 피부가 상황의 위급함을 알려줬다. 도하는 거칠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챘다. 그 순간 가늘게 열린 지안의 두 눈이 힘없이 빛났다. 하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도하는 재빨리 그녀를 안아 전광석화처럼 물 밖으로 나왔다. 물에 젖은 그녀의 몸이 한 줌도 되지 않을 듯이 가볍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사뭇 이런 여자의 간병을 받았다는 게 미안하게 느껴졌다. 도하는 비치 의자에 올려둔 샤워가운을 바닥에 깔고, 그 위로 조심히 그녀를 눕혔다. 물과 가깝게 지낸 그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몇 번의 구조 경험이 있었다. 무릎을 세운 채 꿇어앉아, 그녀의 양손을 잡고 가슴 아래를 눌러 공기를 내뿜게 했다. 하지만 차도가 없자 가슴을 적당한 깊이로 압박했다. 희멀건 한 얼굴과 가녀린 몸이 그의 힘을 받아 거칠게 들썩일 뿐 이번에도 변화가 없었다. 수차례 반복해도 호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도하는 차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지안의 가느다란 아래턱을 쥐고 조금씩 입술을 벌렸다. 그리고 다른 손이 그녀의 코를 쥐었다. 도하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가 그녀의 입술에 대고 천천히 공기를 불어 넣기 시작했다. 그의 뜨거운 입술로 시퍼렇게 질린 그녀의 차가운 입술이 조금씩 스며들었다. 최대한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어, 차디찬 숨을 거칠게 몰아내 본다. 후우우우. 지안의 작은 입술 끝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리는 게 보인다. 도하는 얼른 그녀의 가슴에 귀를 대고 폐에서 공기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했다. 전보다는 차도가 보였다. 다시금 그녀의 입술로 고개를 붙였다. 같은 방식으로 몇 차례 반복하자, 폐에서 공기가 나오는 소리가 조금씩 선명해졌다. 아무런 반응도 없던 그녀의 몸에 조금씩 생기가 돌아오자, 탄력을 받은 그는 다시 그녀의 입술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술과 입술이 거칠게 겹쳐지는 순간, 굳게 닫혀 있던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지안의 흐릿한 눈동자와 도하의 놀란 눈동자가 한곳에서 만나 뒤엉켰다. 지안은 얼마 못 가 어지러운 듯 눈을 질끈 감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물을 토해냈다. 그제야 도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긴박했던 몇 분간을 보여주듯 그의 이마는 온통 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 난로를 켠 듯 따뜻한 온기가 온몸을 감싸 안는다. 잠들어 있던 지안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스르르 눈꺼풀이 열렸다. 익숙한 천장 조명, 익숙한 병실 냄새, 익숙한 새벽 공기.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정면을 향해 누워 있던 그녀는 천천히 측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게다가 그녀의 몸 위로 그의 두텁고 커다란 팔이 둘려 있었다. 조금만 움직이면 온몸이 붙을 듯 아주 가까운 거리에 서로 맞닿아 있다. 마치 서로를 끌어안고 잠든 것처럼. 지안은 자신이 도하와 한 침대 위에, 그것도 아주 가깝게 누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잠시 멍해진 머릿속에, 의식을 잃기 전의 아찔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물속에 납처럼 가라앉은 그를 발견하고 무작정 뛰어든 순간. 손 써보지도 못하고 속절없이 가라앉던 몸. 눈앞이 아득해지던 순간에 나타난 커다란 실루엣. 온몸이 차갑고 심장마저 얼 것 같던 때에, 뜨겁게 밀려들어 오던 거친 숨결. 맥없이 풀린 몸이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잠시 눈을 떴을 때 허공에서 마주친 시선. 저의 입술 사이를 사정없이 비집고 들어와, 새 숨을 넣어주던 그의 호흡과 온기.
꿈처럼 아찔한 순간들이 하나둘 떠오르자, 지안은 숨을 꾹 참았다. 그녀의 인기척을 느낀 도하도 천천히 눈을 떴다. 바로 코앞에서 두 시선이 만나 다시금 얽혔다. 놀란 그녀가 먼저 시선을 이리저리 피해 보았지만, 결국 갈 곳을 찾지 못하고 그의 앞에 다시 돌아왔다. 지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게 뱉었다.
“제가 왜…… 여기, 권도하 씨 침대에 있는 거죠?”
물에 빠졌고, 그가 구해줬다는 것까진 알겠다. 그건 따로 고맙다는 인사를 하더라도. 이 상황에 대해선 설명을 듣고 싶었다. 왜 자신이 낯선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는지. 그때 그의 낮고 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 그게 중요한가.”
“…….”
순순한 남자가 아니라는 걸 안다. 답을 들으려면 얼마간 더 실랑이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지안은 그러려면 우선 자리를 옮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딱 붙어서 불편하게 있는 것보단 떨어져 거리를 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지안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몸을 일으키려는데, 순간 커다랗고 묵직한 팔이 그녀를 툭 막았다. 그리고 서늘한 목소리가 함께 날아왔다.
“움직이지 마.”
“…….”
“정상체온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
놀란 지안의 두 눈이 그대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