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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한이불 덮고 잔 사이 (11/110)

11화. 한이불 덮고 잔 사이2022.01.07.

16548865231815.png“저체온증이 올 뻔했어.”

도하가 낮게 뱉자, 지안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그녀가 아는 한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친절한 남자였다. 간병인의 저체온증이 걱정돼, 제 침대로 데려가 꼭 끌어안고 있을 사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그렇게 인류애 넘치는 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지안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의문을 눈에 담고 보자, 도하가 다시 입술을 뗐다.

16548865231815.png“한밤중에 온 집안을 발칵 뒤집을 순 없었으니까.”

1654886523183.jpg“…….”

그의 말에 지안의 눈언저리에 들어갔던 힘이 맥없이 빠졌다.

16548865231815.png“할머니를 또다시 걱정시킬 순 없잖아. 내 선에서 이렇게 해결할 수 있는데.”

그녀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었다. 정순이 이 일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사색이 되었을지. 기다란 이마 주름이 얼마나 더 깊게 팼을지. 그 얼굴이 안 봐도 본 것처럼 눈앞에 선연히 그려졌다. 불편한 남자의 품에 안겨있었다는 게, 여전히 내키지 않지만 그래도 머리론 이해가 됐다. 그가 왜 이 방법을 택한 것인지.

16548865231815.png“계속 정상체온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때 강 박사를 부르려고 했어.”

1654886523183.jpg“……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그냥 좀 놀라서요. 여기서 이렇게 깨어난 게.”

지안은 놀란 기색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런 그녀의 안색을 가만히 살피던 도하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뱉었다.

16548865231815.png“크게 놀랄 일도 아니지.”

1654886523183.jpg“……?”

16548865231815.png“아내가 남편 품에서 깨어나는 일이.”

1654886523183.jpg“……!”

지안은 잠시 정신이 멍해졌다. 잊고 있던 두 사람 사이의 또 다른 관계. 간병인과 환자 말고, 보다 깊게 얽힌 관계가 있었다. 엄연한 부부 사이. 지안의 귀에 도하의 말은 꼭 그 관계에 안주하려는 것처럼 들렸다. 두려워졌다. 자는 동안 귀찮은 숙제를 해결해서 후련하다고, 턱을 치켜들고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지안은 얼른 표정을 바꿔 정색하듯 말했다.

1654886523183.jpg“우린 그런 부부가 아니잖아요.”

그녀의 목소리를 음미하듯 귀에 담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뱉는다.

16548865231815.png“그럼 우린 어떤 부부이지?”

1654886523183.jpg“…….”

역으로 날아온 질문에 지안은 잠시 말문이 턱 막혔다. 하지만 아무 말도 잇지 못하면, 그가 멋대로 새로운 정의를 내려버릴까 두려웠다. 그는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그녀가 아는 권도하라면. 지안은 굳게 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 말했다.

1654886523183.jpg“우리는…….”

도하는 조금 전까지 퍼런빛을 띠던 작은 입술이 붉게 변한 것을 가만히 주시했다.

1654886523183.jpg“우리는…… 아마도 곧 이별할 부부이겠죠.”

16548865231815.png“…….”

선을 긋듯 차가운 목소리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16548865231815.png“알수록 재미있군. 당신.”

1654886523183.jpg“…….”

16548865231815.png“아닌가. 원래부터 이런 여자였지.”

상대를 앞에 두고 철저히 소외시키는 화법의 말투. 지안은 차갑게 말했다.

1654886523183.jpg“……무슨 뜻이죠?”

16548865231815.png“곧 이별할 부부라면서 나를 구하러 물속에 뛰어드는 게. 수영도 못하면서 그런 무모한 짓을 벌이는 게.”

1654886523183.jpg“……!”

생각도 못 한 지적에 지안은 잠시 머릿속이 멍해졌다. 맹렬하게 헤엄치던 모습처럼 그는 거칠게 퍼부어댔다.

16548865231815.png“하긴, 남의 할머니를 위해서 결혼도 저지르는 사람인데, 물속에 따라 들어오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가.”

비아냥 섞인 그의 말에 지안의 당황한 입술이 허공에서 겉돌았다. 물속에 뛰어든 건, 당신과 내가 부부라서가 아니라고. 간병인으로서 그저 내 환자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길었던 간병의 시간만큼 몸에 밴 관성 때문이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술이 말을 듣질 않는다. 지안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악에 받친 한 마디를 겨우 내뱉었다.

1654886523183.jpg“이봐요. 권도하 씨!”

하지만 그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16548865231815.png“선 넘지 마, 서지안. 자신을 함부로 내던지지 말라고.”

1654886523183.jpg“……!”

데일 듯 뜨거운 눈빛이 그녀의 얼굴로 무섭게 드리웠다.

16548865231815.png“그냥 거기 있어. 당신 자리에.”

1654886523183.jpg“…….”

16548865231815.png“당신이 아프면 내가 곤란해지니까.”

1654886523183.jpg“……!”

다른 곳, 다른 상황에서 들었다면 로맨틱할지도 모를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차가운 입술 새로 흘러나온 말의 뉘앙스는 완전히 달랐다.

16548865231815.png“잊지 마. 내가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때까지, 당신은 여기 내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걸.”

1654886523183.jpg“…….”

16548865231815.png“그전까진 물에 빠져도 안 되고, 죽어서도 안 돼.”

1654886523183.jpg“……!”

16548865231815.png"그게 간병인의 의무이자, 아내의 도리이지."

고강도 운동의 효과일까. 그는 전보다 강해지고 거침이 없어 보였다. 눈빛도, 목소리도, 작은 손짓 하나에서도 거스를 수 없는 위엄이 느껴져 지안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가 지금처럼 활력을 찾고, 하루가 다르게 건강해진다면 아마 그녀는 더 이상 그를 감당하지 못할지 모른다. 벌써부터 이렇게 버거워진 걸 보면. 더는 그와 부딪힐 기운이 없었다. 지안은 창백한 얼굴로 낮게 말했다.

1654886523183.jpg“알겠어요. 그렇게 하도록 하죠.”

지안이 순순히 대답하자 도하의 눈이 잠시 번쩍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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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원하게 탁 트인 통유리창 너머로 깊어가는 도심의 야경이 보였다. 세준은 한 손에 가볍게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스모키한 피트향이 입안을 가득 맴돌다 뜨겁게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온몸이 뜨거워지며 한껏 긴장돼 있던 구석구석의 근육이 조금씩 풀렸다. 먼 밖을 응시하던 그는 몇 시간 전, 비즈니스 파트너들과 함께한 저녁 식사를 떠올렸다.

16548865297751.jpg‘지 대표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케이원 그룹 권도하 대표가 깨어났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요.’

16548865297756.png‘도하…… 권도하 대표가요?’

세준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흔들리자, 소식을 전한 남자가 새삼 놀란 듯 말했다.

16548865297751.jpg‘어, 모르고 계셨군요. 워낙 두 분이 막역한 사이라고 들어서 당연히 아시는 줄 알고. 확인차 여쭸던 건데.’

세준은 잠시 굳어 있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8865297756.png‘같은 고등학교, 같은 와튼스쿨 출신이라고 다 막역한 사이는 아니죠. 아시잖습니까?’

그의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보조를 맞췄다.

16548865297751.jpg‘그렇죠. 동문끼리 다 친하다는 법은 없죠. 이게 우리 한국 사람들 문제라니까. 학연, 지연으로 막 넘겨짚는 거.’

16548865297751.jpg‘맞습니다. 제가 권도하 대표님을 좀 아는데, 지 대표님이랑 권 대표님은 결이 완전히 다른 분들입니다.’

한 남자의 말에 세준의 눈동자에 순간 커다란 호기심이 일었다.

16548865297756.png‘결이 다르다라…… 궁금하네요. 권 대표랑 내가 어떻게 다른지.’

세준의 시선을 받은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16548865297751.jpg‘권도하 대표님은 뭐랄까, 철옹성 같달까요. 흔들림이 전혀 없으시죠.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힘은 따라올 자가 없고요. 근데 좀 빡빡하죠. 함께 일하려면 엄청난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남자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세준은 말을 끊고 물었다.

16548865297756.png‘그럼 지세준은 어떻습니까.’

16548865297751.jpg‘지세준 대표님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랄까. 권도하 대표님에 비하면 유연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에 빠르게 잘 적응하시죠. 그런 분이라서 발 빠르게 대한민국을 지금의 딜리버리 천국으로 만드신 거겠죠.’

남자는 그 말을 하며 은근히 세준의 눈치를 살폈다. 세준이 흡족해하는 표정을 보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지만 세준은 쓴웃음을 지으며 술잔을 비울 뿐, 그의 기대감 따윈 채워주지 않았다. 칭찬과 아부가 넘쳐나는 술자리. 세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찬사를 배부르게 먹고 마셨다. 스타트업 최초로 미국 증시 상장을 앞둔 딜리버리 그룹 CTM의 젊은 오너. 요즘은 어딜 가도 모두가 그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세준은 겉으론 웃고 있었지만, 마음 한 곳에선 끝없는 갈증과 불안이 밀려왔다. 도하가 깨어났다는 이야기에 그 불안감은 배가 되었다. 도하, 도하가 깨어났다니……. 세준은 손에 들고 있던 위스키 잔을 꾹 감아쥐었다. 위스키 잔을 든 손이 파르르 위협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똑똑. 밖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세준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16548865297751.jpg“대표님, 접니다.”

세준은 자신의 수족과도 같은 노 실장의 목소리를 금세 알아차렸다.

16548865297756.png“들어오세요. 노 실장님.”

끝으로 갈수록 갈라져 없는 연한 눈썹과 달리, 눈매만은 또렷하고 매서운 중년의 남자가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16548865297751.jpg“아직 안 주무실 것 같아서 들렀습니다.”

16548865297756.png“소파로 가시죠.”

모던한 그레이 컬러의 소파에 두 남자가 마주 앉았다. 노 실장은 한쪽 팔 사이에 끼고 있던 서류 봉투를 세준의 앞으로 내밀었다.

16548865297751.jpg“저번에 말씀하신 것 관련해 조사한 겁니다.”

노 실장의 말에 세준의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높이 올라갔다. 세준은 분주한 손놀림으로 봉투를 개봉하고 서류를 꺼내 올렸다. 그의 속도에 맞춰 노 실장이 설명을 덧붙였다.

16548865297751.jpg“권도하 대표의 병상 결혼식 소문은 사실이었습니다.”

16548865297756.png“……!”

16548865297751.jpg“상대는 3년간 권 대표를 돌본 입주 간병인, 서지안이라는 여자이고요.”

노 실장이 건넨 서류들 사이로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사진 속 여자를 보는 세준의 눈빛이 순간 소리 없이 일렁였다. *** 잠에서 깬 지안은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전처럼 따사롭지 않은 건, 아마도 오래전부터 온몸을 데워주고 있는 낯선 남자의 뜨거운 체온 때문일 것이다. 여전히 도하의 팔이 이불처럼 그녀의 몸을 덮고 있었고, 그의 몸과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그와 한 침대 위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잠들다니. 불과 하루 전. 옆자리에 놓인 간병인 침대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못 견디게 불편했었는데, 불과 하루 만에 이만큼씩이나 거리가 가까워져 버렸다. 차마 상상할 수도, 상상하기도 싫은 그런 류의 전개였다. 지안은 천천히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몸에 힘을 넣었다. 다행히 도하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옆으로 비틀어 조금씩 다리부터 침대에서 내려갔다. 비로소 그의 침대를 벗어난 지안은 길고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일 때문인지, 힘이 풀린 다리를 어렵게 움직여 천천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스로 문 앞에 다다른 지안은 잠시 도하의 침대 쪽을 돌아봤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돌려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 순간, 병실 문 앞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무언가를 보고 사색이 된 그녀의 얼굴이 거울 속에 생중계되었다.

1654886523183.jpg“이…… 이게, 어떻게!”

지안은 거울 속 낯선 차림의 저를 보고 질겁했다. 도하의 사이즈에 맞춰나온 큼직한 환자복은 그녀의 몸이 얼마나 작고 가녀린지 확인시켜줬다.

1654886523183.jpg“내가 왜 이 옷을…….”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지난 3년간 도하가 입고 잠들어 있던 환자복이었다. 그때, 그녀의 뒷덜미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16548865231815.png“당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알겠더군.”

1654886523183.jpg“…….”

16548865231815.png“의식 없는 사람의 옷을 벗기고 입히는 일. 생각보다 쉽지 않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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