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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보면 좀 어때 (12/110)

12화. 보면 좀 어때2022.01.10.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고 뒤통수 끝이 곤두섰다. 지안은 거울 속 사색이 된 제 얼굴과 마주했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눈동자가 안쓰러울 정도로 불안정해 보였다. 그러니까 권도하, 그가 직접 옷을 벗기고 갈아입혔다는 말이지. 아주 어렸을 때, 할머니가 옷을 갈아입혀 준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건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의 이야기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지안은 단 한 번도 타인에게 그런 일을 부탁하지 않았다. 성인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남들 다 하는 연애에도 관심을 둔 적 없어서, 남자의 손에 그런 일이 일어날 일도 없었다. 한데, 이렇게 어이없이 불편하고 어렵기만 한 남자의 손에 옷이 벗겨지다니.

16548865455132.jpg“……말도 안 돼.”

지안은 제 귀에만 들릴 정도로 낮게 뱉었다. 도하는 인정하기 힘든 현실과 맞닥뜨린 그녀를 위해 입술을 뗐다.

16548865455137.png“걱정 마. 당신이 염려하는 일은 없었으니까.”

염려하는 일? 지안의 눈언저리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16548865455137.png“당신이 그랬었지? 본 건 맞지만, 본 게 아니라고.”

도하의 말에 지안은 비슷한 상황에서 그녀 자신이 뱉었던 말을 떠올렸다. 지난 3년 동안, 제 몸을 어디까지 봤느냐고 캐물어 오는 도하를 향해 던졌던 말. 그저 환자로서 봤을 뿐, 다른 의미로 본 게 아니라는 말. 그도 그 말이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골똘해진 그녀의 뒤에서 도하가 말을 이어갔다.

16548865455137.png“직접 그 상황이 되어보니 알겠더군. 그 순간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16548865455132.jpg“…….”

무슨 말을 들은들 위로가 되지 않았다. 얼굴이 불에 덴 듯 뜨겁고 귓불이 홧홧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저 어서 빨리 여길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 문손잡이를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가던 순간이었다.

16548865455137.png“설령 봤다 한들…… 문제 될 것도 없고.”

16548865455132.jpg“……!”

폭주하던 심장이 순간 낭떠러지로 떨어지듯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있는 곳을 돌아보고 싶지 않았지만, 의미심장한 말을 들은 이상 계속 이렇게 있을 수도 없었다. 지안은 천천히 몸을 돌려 도하를 응시했다.

16548865455132.jpg“그게…… 무슨 말이죠?”

16548865455137.png“……부부가 서로 옷을 갈아입혀 준 게, 큰 문제는 아니라고.”

16548865455132.jpg“……!”

다시금 말문이 막혔다.

16548865455137.png“벗기지 않으면, 저체온증이 올 수도 있는 상황이었어.”

간병인으로서 그의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해서, 입장이 뒤바뀌니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잘 안됐다. 저 사람이 내 옷을…… 내 옷을 벗기고 갈아입혔다니. 그리고 자꾸만 유치한 물음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다녔다. 그래서 봤다는 거야, 못 봤다는 거야. 그 순간 도하가 뱉은 한마디가 미친 듯 방황하던 그녀의 눈동자를 고정시켰다.

16548865455137.png“그러니까 함부로 자신을 내던지지 마.”

16548865455132.jpg“……뭐라구요?"

16548865455137.png“결혼도…… 무모한 입수도.”

16548865455132.jpg“……”

16548865455137.png“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지금처럼.”

그가 눈짓으로 지안의 옷을 쓱 훑자, 지안은 입술을 꾹 물었다.

16548865455132.jpg“……!”

그 모습을 보던 도하의 입술 끝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지안은 한숨조차 내쉴 힘이 없었다. 하루하루 새롭게 힘듦이 갱신돼 나가는 기분이다. 3년간의 기나긴 간병 생활은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더 고되고, 더 무서운…… 그런 나날의 연속. 그가 깨어난 이후, 놀랍도록 그랬다. 회복하면 할수록 그는 얄궂은 환자와 무서운 남편 사이를 줄타기하며 숨통을 옥죄어 왔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사람들이 왜 ‘결혼’을 인륜지대사라고 하는지 알 것 같다. 어떤 사람과 함께 하는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렸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마음대로 저지른 것에 대한 벌일까. 몹쓸 후유증이 감당하기 힘들게 몰려왔다. 겨우 병실 밖으로 나온 지안은 문 앞에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루에도 수천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기분. 하루가 달리 회복되어가는 남자를 보고 있으면, 간병인으로서 순수하게 기뻤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맞닥뜨리면 함정에 빠진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안이 축 처진 어깨를 애써 들어 올리던 그때, 저만치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16548865479058.png“지안아!”

정순이 복도 끝에서 그녀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웃음기라곤 찾아볼 수 없던 얼굴에 비로소 편안한 미소가 앉았다. 그나마 그녀가 이곳에서 버틸 수 있는 건, 버팀목 같은 정순 덕분이었다. 지안은 정순이 있는 곳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16548865455132.jpg“할머님.”

지안이 조금 전의 근심을 지우고 씩 웃는데, 어째 정순의 표정이 심상찮았다.

16548865479058.png“지안이 너…….”

정순의 주름진 눈이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고 있었다. 지안도 정순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그제야 자신이 도하의 환자복 차림이라는 걸 깨달았다.

16548865479058.png“옷이 왜…….”

정순이 미간을 좁히고 묻자, 지안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흔들며 말했다.

16548865455132.jpg“어젯밤에 옷이 좀 젖어서 이걸로 대충 갈아입었어요.”

지안은 말하는 중간, 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젯밤 그녀가 물에 빠진 일을 정순이 알게 될지도 몰랐다. 정순을 걱정시킬 순 없는 노릇이었다. 지안은 일부러 자세한 전후 사정은 감췄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던 정순이 이상하다는 듯 눈꺼풀을 느릿하게 끔뻑이며 되물었다.

16548865479058.png“어젯밤에…… 옷이 젖어?”

당황한 지안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16548865455132.jpg“아, 어제 땀이 좀 많이 나서.”

16548865479058.png“따암?”

정순의 이마에 순간 깊은 주름이 팼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말아 감아 꾹 깨물었다. 본래 거짓말에 소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서툴 줄은 몰랐다. 어젯밤은 땀이 날 날씨도, 그 이유로 옷을 갈아입을 날씨도 아니었다. 맵찬 바람이 불 정도로 밤공기가 제법 쌀쌀했으니까. 게다가 도하의 방은 가장 쾌적한 온도와 습도 조절이 자동으로 되는 최첨단 병실이었다. 그런 곳에서 땀을 흘리며 잤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다니. 곰곰이 생각하던 정순의 눈에 순간 번쩍 빛이 일었다. 지안은 정순을 속였다는 죄책감에 어서 자리를 피할 방법을 떠올렸다. 잠시 시계를 보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말했다.

16548865455132.jpg“어머,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아침 준비 도우러 가봐야겠어요.”

누구보다 차분하던 지안이 낯설 정도로 허둥지둥 대는 모습에 정순은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곤 멀찌감치 보이는 도하의 병실을 힐끗 보며 낮게 뱉었다.

16548865479058.png“녀석, 3년간 지안이를 그리도 괴롭히더니, 이젠 다른 방식으로 괴롭히나 보구나. 하하.”

복도를 걷는 정순의 발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우렁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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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고 맑은 피부와 갸름한 얼굴 위로 들어찬 작지 않은 이목구비. 선이 고운 목라인 위로 무심하게 떨어뜨린 긴 갈색 머리카락. 세준의 눈길을 가장 오래 사로잡은 건, 다갈색의 힘 있는 눈동자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왠지 모를 슬픔이 묻어 있는 눈. 그 슬픔 속에서 자라난 강인함 같은 것이 눈빛에서 보였다. 웃음기 없는 여린 분홍빛의 입술은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툭. 세준은 노 실장이 건넨 사진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도 한참이나 그 사진 속 여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16548865501062.png“간병인이면, 도하가 사고 난 후에 만난 사이 아닙니까?”

16548865501066.jpg“그런 것 같습니다. 서지안이라는 여자를 조사해보니, 이전에 권 대표와 접점이라 할만한 게 하나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16548865501062.png“그럼…… 지금 도하는 일면식도 없는 여자랑 부부가 되었단 소리입니까?”

16548865501066.jpg“……케이원 황 회장 쪽을 잘 아는 사람에게 들어보니, 황정순 회장이 권 대표가 그렇게 죽어가는 걸 무척 힘들어했답니다.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살아서 결혼이라도 시켜주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는지. 일을 감행한 것 같습니다.”

노 실장의 말을 듣던 세준의 시선이 자연스레 사진 속 지안에게 가닿았다.

16548865501062.png“그럼 저 여잔, 죽을 날 받아놓은 남자랑 덜컥 결혼을 한 거고?”

16548865501066.jpg“……네. 형편이 많이 어려운 여자더군요. 식구라곤 할머니가 하나 있는데, 그마저도 3년 전에 돌아가시고. 혈혈단신이라 두려울 게 없었나 봅니다.”

16548865501062.png“……길고양이 같은 여자와 권도하라.”

세준은 손을 뻗어 다시 사진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사진 속 지안을 투시하듯 바라봤다. 들꽃처럼 은은하고 조화로운 이목구비가 보면 볼수록 저도 모르게 눈이 가는 얼굴이었다. 작고 여리여리한 몸과 달리, 짙은 눈빛과 입매에서 나오는 강인함은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없는 느낌이었다. 함부로 다가설 수도, 움켜쥘 수도 없을 것 같은 그런……. 그래서인지 더 꺾어보고 싶은 욕망을 지폈다. 도하가 깨어나 그녀를 봤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어떤 마음이었을지 세준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서지안이라는 여자 때문일까. 아니면 그녀가 권도하의 것이라서일까. 세준은 알 수 없는 열정이 저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 서재 문이 열리고 슬립 가운 차림의 여자가 들어왔다. 세준은 들고 있던 사진을 얼른 재킷 속주머니에 감췄다.

16548865501062.png“하린아.”

16548865527919.png“세준 씨, 무슨 이야기를 이렇게 오래 해?”

16548865501062.png"이제 다 끝났어."

세준은 제법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여자를 바라봤다.

16548865527919.png“세준 씨가 서재에서 안 나오니까 걱정돼서 와봤지.”

말을 마친 하린은 노 실장을 보고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16548865527919.png“오셨어요?”

16548865501066.jpg“네. 아가씨…… 아니 사모님.”

호칭에 혼선이 온 듯 노 실장이 버벅대자 하린이 웃으며 말했다.

16548865527919.png“아가씨가 맞죠. 아직 결혼은 안 했으니까. 요즘 세상에 약혼은 쳐주지도 않는다면서요.”

하린의 말에 세준이 한껏 커진 눈으로 말했다.

16548865501062.png“뭐?”

16548865527919.png“농담이야. 농담.”

하린이 웃으며 무마하려 했지만, 세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16548865527919.png“세준 씨, 그게 그렇게 눈을 번뜩일 일이야? 알았어, 미안. 내가 실수.”

하린이 애교 섞인 말투로 말하며, 세준의 팔에 매달렸다. 그제야 세준은 차게 식었던 얼굴을 조금은 풀었다.

16548865501062.png“노 실장님, 그럼 이만 가보세요.”

16548865501066.jpg"네. 대표님."

노 실장은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하곤 서재를 나갔다.

16548865527919.png“이제 방으로 갈까?”

하린이 어린아이처럼 그의 팔을 잡아끌자, 세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잔잔하던 시선은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세준은 불시에 하린을 벽 쪽으로 몰아넣었다. 단숨에 기울어진 고개가 그녀의 여린 입술로 들이닥쳤다. 놀란 하린이 그를 밀어내며 말했다.

16548865527919.png“왜 그래, 세준 씨.”

그녀의 만류에도 세준은 무작정 입술을 붙이고 뜨겁게 밀어붙였다. 한참을 가열하게 놓아주지 않던 그가, 잠시 고개를 떼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16548865501062.png“정말 그렇게 생각해?”

16548865527919.png“……뭘?”

16548865501062.png“우리 약혼이 깨질 수 있다고 생각하냐고.”

16548865527919.png“아직까지 그 이야기야? 농담이라니까.”

16548865501062.png“그럼 나랑 결혼할 거야?”

16548865527919.png“……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거야?”

16548865501062.png“대답해!”

16548865527919.png“할 거야. 세준 씨랑 결혼할 거라고.”

무슨 까닭인지 세준은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낮게 물었다.

16548865501062.png“권도하가 깨어나도, 다시 살아 돌아와도?”

16548865527919.png“……!”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하린의 두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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