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처음부터 부부인연2022.01.14.
세 식구가 마주한 식탁 풍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지안은 식사 중간에 도하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하면 밥알이 목에 걸린 듯 기침을 뱉었다. 문제는 밥알이 아니라, 조금 전 방에서 들었던 이야기가 아직 소화되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러니까 함부로 자신을 내던지지 마. 결혼도…… 무모한 입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이렇게?’
생각만으로도 귓가가 서늘해지는 목소리였다. 그 사악한 목소리를 곱씹다 보니,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하가 깨어난 건 어쩌면, 멋대로 저질러버린 결혼을 응징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고.
“지안아.”
정순이 숟가락을 든 채 멍하니 있는 그녀를 보고 불렀다.
“네?”
지안이 화들짝 놀라 눈을 크게 뜨자, 정순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밥 먹다가 말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야.”
“네? 아뇨. 아무 것도…….”
지안은 스스로 말하고도 어색하다고 느꼈다. 도하가 깨어난 후 부쩍 거짓말할 일이 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자신이 거짓말에 눈곱만큼도 소질이 없다는 걸.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지안의 얼굴을 보며, 그런 그녀를 건조하게 바라보며 고개 젓는 도하를 보며 정순은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밥 먹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정순은 마음이 벅찼다. 거울을 가져다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지금 둘의 모습이 얼마나 예쁘고 잘 어울리는지. 이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얼마나 한스러웠을지 모른다. 식사를 마친 정순은 도하와 함께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도하의 정서적 회복에 좋다는 강 박사의 말에, 그녀도 동참한 것이다. 볕을 받아 더 울창한 정원을 몇 바퀴 돌고 난 후, 두 사람은 아름드리나무 아래 벤치로 갔다. 정순은 고개를 돌려 조심스레 물었다.
“어떠니, 몸 상태는?”
“사고 전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느껴져요.”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구나.”
정순이 싱긋 웃자, 도하도 자주 짓지 않는 편안한 미소를 보였다. 정순은 그런 손자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 나지막이 물었다.
“지안이는…… 어떠니?”
내내 궁금했었다. 겉으로는 문제없어 보였지만, 정말 그런 건지. 마냥 잘 어울려 보이는 건, 혼자만의 착각이나 욕심은 아닐는지. 정상적인 결혼이 아니었기에 그게 가장 신경 쓰였다. 도하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결혼이었을 거다. 긴 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옆에 처음 보는 아내가 생겼으니. 그래도 정순이 한시름 놓았던 건, 지안이 저택을 떠났을 때 도하가 먼저 나서 그녀를 찾아왔다는 거였다. 빠른 회복을 위해 도움을 받기 위해서라지만, 싫은 사람을 24시간 옆에 둘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하는 최소한 지안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소리였다. 남녀가 가까이 있다 보면 정이 움트고, 감정이 자라나는 건 시간문제이니까. 그러다 보면 둘도 진짜 부부가 되어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다 정순의 생각일 뿐, 도하의 생각은 알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정순의 귓가로 도하가 낮게 되묻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걸 말씀이시죠?”
정순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내내 궁금했었다. 도하 네 의사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잖니. 두 사람 결혼 말이야.”
“네.”
“어떠니? 지낼만한 거지?”
정순은 목소리와 눈빛에 조심스러움을 담아 물었다.
“뭐…… 아직까진.”
도하의 말에 정순은 크게 안도했다. 좋다, 싫다 호불호가 담긴 확실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어려서부터 도하는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아서, 괜히 가슴을 졸이게 되는 구석이 있었다. 정순은 그런 도하 앞에서 늘 을처럼 절절맸다. 어린 손자가 혹은 슬픈 건 아닌지, 힘든 건 아닌지. 여느 아이들처럼 울거나 떼라도 쓰며 표현을 해주었다면 나았을 텐데. 어린 도하는 아이 같지 않게 말수가 없고, 혼자 일찍이 세상을 다 알아버린 것처럼 과묵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정순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모른다.
‘뭐…… 아직까진.’
별거 아닌 대답일지 모르지만, 그녀는 알았다. 도하에게 그 정도 대답은 충분한 긍정의 대답이라는걸. 정순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함께하다 보면 느낄 거야. 두 사람이 얼마나 좋은 인연인지.”
정순의 말에 도하의 눈빛이 한껏 진지해졌다. 그리고 물었다.
“좋은 인연이요?”
“……그래, 두 사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지. 더없이 좋은 인연이 될 것 같다고.”
처음 듣는 낯선 이야기에 도하의 눈이 커졌다.
“처음이라면…… 제가 언제 서지안을 또 만난 적 있단 말씀이신가요?”
정순은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녹음 진 정원을 바라보던 정순의 두 눈이 깊어졌다.
*** 3년 전. 그날은 평소 같지 않게 잠이 잘 들지 않는 밤이었다. 정순은 한참을 뒤척이다 새벽 2시가 넘은 시간에 겨우 눈을 붙였다. 그리고 잠든 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한 통의 전화를 받고 잠에서 깼다. 새벽녘에 날아온 청천벽력 같은 연락.
‘뭐, 도…… 도하가 사고를 당했다고!’
그 무렵 도하는 딜리버리 사업팀을 꾸리고, 새벽 배달 사업을 시험 차 운영 중이었다. 그날은 직접 새벽 배달 현장에 나가 현장 상황을 파악하겠다고 했었다. 뜨거운 열정과 투지로 가득 찬 젊은 손자를 늙은 할머니가 말릴 방법은 없었다. 그게, 사고로 이어질 줄 알았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렸을 테지만. 아들 내외를 사고로 잃고 느꼈던 충격의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충격이 몰려왔다. 정순은 혼절할 뻔했지만 애써 정신을 붙잡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도하야!’
세상을 잃은듯한 그녀의 목소리가 응급실을 가득 울렸다. 급히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비서의 부축을 받아 나왔을 때였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는 젊은 여자가 보였다. 그때 비서가 정순에게 그녀를 알려주었다.
‘권 대표님 사고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119에 신고한 분입니다. 관계자 이야기를 들어보니, 초반에 저 아가씨가 응급처치를 잘해서 더 위험한 상황까진 가지 않았다고…….’
정순은 저만치 떨어진 벽에 기대 있는 젊은 여자를 가만히 눈에 담았다. 휘익. 그 순간 여자의 다리가 휘청 꺾이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는 여리여리한 몸매에, 야윈 얼굴이었다. 그 얼굴 위로 얼룩진 지독한 긴장과 충격은, 마치 정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듯했다. 비록 남의 일이지만, 끔찍한 사고 현장을 목격했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놀랐을지. 정순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불렀다.
‘저기요, 아가씨.’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정순을 보고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그러곤 도망치듯 급히 자리를 떴다. 나중에 물어보니, 지안은 그랬다. 정신없는 상황에서 저까지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정순은 비서를 시켜 그녀를 찾았다.
‘이름은 서지안이라는 아가씨이고, 할머니와 단둘이 산다고 합니다. 사고 현장 근처에 있는 병원에 할머니가 입원 중이라, 집에서 짐을 가지고 오던 중 현장을 목격했다고 하고요.’
‘그래, 요새 보기 드물게 착한 아가씨군. 할머니 간병을 다하고.’
‘네. 이야기를 나눠보니 일찍이 철이 들었는지, 나이에 비해 훨씬 성숙하고, 바른 느낌이었습니다.’
‘그래. 사례금은 잘 전달했고?’
‘그게…… 절대 받을 수 없다고 끝까지 사양하더라고요.’
‘뭐라고?’
‘돈을 받으려고 한 일이 아니라고. 병상에 있는 할머니가 깨어나시면 혼날 거라고 끝까지 사양했습니다.’
‘그래도, 그럼 안 되는데!’
‘그래서 병원비로 대신할까 해서 원무과에 알아봤는데, 아가씨가 미리 손을 써놨는지 절대 받지 않았습니다.’
‘뭐?’
‘아, 그리고 회장님께 꼭 이걸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비서는 작은 엽서 하나를 정순의 앞에 내밀었다. 정순은 엽서 속 꾹꾹 눌러쓴 정갈한 글씨를 눈에 담았다. [소중한 가족이 큰 사고를 당해 많이 힘드시죠. 저도 지금 할머니를 간병을 하는 중이라, 그 마음이 어떤 건지 잘 알아요. 그래도 힘내시라는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아파도 다 느낄 수 있대요. 옆에 있는 가족이 슬퍼하면 환자분도 많이 속상해하실 거예요. 가족분 꼭 쾌차할 거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고, 기운 내세요!] 별거 아닌 위로의 말에 정순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없이 작고 야윈 아이가 어떻게 이런 위로를 안겨줄 수 있는지. 수술 후, 도하가 의식 없이 며칠을 보내는 사이 정순은 직접 지안을 찾아갔다. 하지만 비서가 알려준 병실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할머니가 입원해 있다던 자리도 휑하니 비어 있었다.
‘아, 그 환자분. 새벽에 소천하셨습니다. 지금은 저희 병원 장례식장에…….’
정순은 예정에도 없던 장례식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상에서 가장 조용하고 고요한 빈소를 마주했다. 가족이 할머니뿐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예상했지만, 그렇게나 쓸쓸할 줄은 몰랐다. 정순은 상복 차림으로 웅크린 채 있는 지안의 모습에서, 엄마 아빠의 빈소를 지키던 여섯 살 도하를 보았다. 둘의 모습이 겹쳐 보인 뒤로는, 차마 그곳을 떠날 수 없었다. 정순은 장례 마지막 날까지 지안의 곁을 지켜주었다. 슬픔에 젖어 있는 그녀와 많은 대화를 나누진 못했지만, 마음만은 한층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도하의 의식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자, 병원에서는 불안한 소리를 했다. 어쩌면 이 상태가 장기간 이어질지 모른다고. 정순은 언제 깨어날지 모를 도하를 낯선 병실에 두는 것이 마음 아팠다. 고민 끝에 도하를 집으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저택에선 도하를 위한 의료진을 꾸려졌고, 입주 간병인도 들였다. 그때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간병인의 손길이 닿기만 하면 의식 없는 도하가 경기를 일으키고, 발작을 하는 거였다. 한 달 만에 다섯 명이 넘는 간병인이 도하를 이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그게 간병인 업계에 소문이 난 건지, 높은 보수에도 좀처럼 오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고심하던 정순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스쳐 갔다. 오랜 시간 할머니를 간병했다던 아이. 사고 현장에서 응급처치로 도하의 생명을 구했다던 아이. 죽어가던 도하를 살려낸 그 손길로, 의식 없는 도하를 보살펴 준다면, 어쩌면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이 솟아났다. 장례 기간, 짧은 시간이었지만 옆에서 본 지안은 마음이 따듯하고, 진실된 사람이었다. 정순은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무작정 지안을 찾아가 부탁했다.
‘지안 양. 이런 말 염치 없지만, 지안 양이 우리 도하를 맡아 줬으면 하네. 그날 새벽 도하를 구해주었던 것처럼, 한 번만 더 그 아일 구해주게.’
정순은 눈물을 흘리며 지안의 손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안 또한 그런 정순의 주름진 손이, 제 할머니의 손 인양 말없이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을 텐데도, 지안이는 기꺼이 내 손을 잡아줬지. 나중에 그러더구나. 그날 내가 걸어오는데,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 돌아온 줄 알았다고. 홀로 남겨져 의지할 곳 없는 저에게 하늘에서 할머니가 보내준 선물 같았다고.”
“……!”
“지안이가 오고 나선 도하 네 상태가 마법처럼 좋아졌지. 발작도, 경기도 더는 일으키지 않고. 어쩌면…… 도하 너도 그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게 아니었나 몰라.”
정순의 이야기를 듣던 도하의 눈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