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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신기한 여자 (14/110)

14화. 신기한 여자2022.01.17.

잠든 세준의 팔이 하린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쌌다. 하린은 슬며시 세준의 팔을 빼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어젯밤, 세준이 뱉은 의미심장한 말에 그녀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16548865859728.png‘권도하가 깨어나도, 다시 살아 돌아와도?’

16548865859733.png‘……그게 무슨 소리야, 누가 깨어나?’

생각 없이 던진 말이라기엔 세준의 눈동자가 이상할 정도로 흔들렸다.

16548865859733.png‘세준 씨! 그게 무슨 말이냐고. 권도하가 살아 돌아오다니.’

16548865859728.png‘만약, 만약을 말하는 거야.’

16548865859733.png‘만약?’

아니야. 하린은 분명히 느꼈다. 그의 말이 만약을 이야기한 게 아니라는걸. 불안해 보이는 눈동자와 초조한 숨소리는 만약의 일이 현실이 되었을 때의 반응이었다. 권도하, 도하 씨가 깨어났다고? 하린은 건조해진 입술을 짓씹었다. 믿을 수 없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여명이 3개월이 채 남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런 사람이 깨어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니,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필라델피아 유학 시절에 만나 싹틔운 서투른 첫사랑의 기억은 하린의 가슴속에 남아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하린은 무작정 도하를 찾아갔었다. 도하는 스물셋의 풋풋한 소년미를 벗고, 진짜 남자가 되어 있었다. 누구보다 듬직했고, 단단했고, 섹시했다. 하린은 그에게 다시 시작해 보자고 말했다. 도하는 대답 대신, 신사업을 시작해 많이 챙겨주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미리 미안하다고 했었다. 로맨틱한 대답은 아니었지만, 권도하다운 무뚝뚝한 그 대답이 하린은 반가웠다.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표정 없는 남자의 사랑을 받는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여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무심한 듯 자상하고, 차가움 속에 가장 뜨거운 구석이 숨어 있는 남자. 케이원 그룹의 후계자라는 배경도, 모델 못지않은 훤칠한 외모도. 도하는 모든 면에서 그녀를 만족시키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었다. 이런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여자는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하지만 둘의 만남이 다시 시작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도하에게 큰 사고가 났다. 도하의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고, 평생 그렇게 살 수도 있다는 얘길 전해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하린은 자신의 사랑을 의심했다. 도하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이 남자밖에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던 마음에 너무도 쉽게 금이 가버렸다. 의식불명이 된 도하의 곁을 지킬 자신이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권도하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비상구가 있다면, 빨리 도망치고 싶었다. 다행히 두 사람이 다시 만남을 시작했단 걸 아는 건, 몇 되지 않았다. 권도하의 베스트 프렌드인 지세준과 도하의 할머니. 둘쯤 되었으려나. 그녀를 비상구로 안내한 건 다름 아닌 도하의 절친 세준이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재빨리 그녀가 도망칠 수 있도록 도와줬다.

16548865859728.png‘도하도 하린이 네가 불행해지는 걸 원치 않을 거야.’

세준의 그럴싸한 위로에 하린은 온몸을 휘감고 있던 죄책감과 미안함을 털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위로해 준 그의 손을 너무도 쉽게 잡아버렸다. 도하와 연인이던 시절에도 함께 어울려 보낸 시간이 적지 않았지만, 세준은 그런 기억 따윈 모두 지운 듯 하린을 대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하린이 자신의 애인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태연한 세준의 행동에, 하린도 점점 편해졌다. 도하와의 지난 인연 따윈 간밤 꿈에서 본 장면인 듯 현실감을 잃어갔다. 게다가 하린을 만난 후, 세준은 승승장구했다. 도하의 회사에 다니는 직원에 불과하던 그가, 자신만의 회사를 열어 성공했고, 이제는 케이원 그룹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위치에 섰다. 자연스레 결혼 이야기가 나왔고, 하린은 망설일 게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두 달 전엔 약혼식까지 올렸다. 이제 석 달 뒤, 결혼식만이 남아 있었다. 모든 게 순조로웠고, 행복감으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도하, 권도하가 깨어났다는 말도 안 되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는. 그의 존재가 이제 아무 의미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세준의 입에서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권도하가 깨어나도 흔들리지 않겠냐는 물음에 덜컥 말문이 막혔다. 미련일까. 아니면 욕심일까. 그것도 아니면 사랑일까. 밤새 머릿속으로 복잡한 생각들이 스며들었다. 그 생각의 끝자락에 이런 생각도 있었다. 도하가 사고를 당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래서 의식불명이 되지 않았더라면 지금 그녀의 곁에 세준이 아닌 도하가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후우. 반쯤 열려 있던 입술 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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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6548865859766.jpg“혈압 체크해 드릴게요.”

창밖을 보고 있던 도하의 고개가 문 쪽으로 향했다. 지안이 혈압측정기를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연신 바닥만 볼 뿐, 시선조차 마주치지 않는 그녀의 얼굴에선 아직도 어젯밤의 후유증이 남아 보였다. 저체온증 위험 환자의 젖은 옷을 갈아입히고, 끌어안고 있었던 게 그리 큰 잘못인가. 도하는 그 생각을 하다가, 익은 듯 여전히 귓불이 붉은 그녀를 보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처음 봤을 땐, 자신만큼이나 차갑고 무정한 얼굴로 보였다. 웃는 모습보다 표정 없는 얼굴이 더 쉽게 떠오르는 그런 얼굴. 한데 이제 보니, 소녀가 따로 없는 얼굴이었다. 별거 아닌 거에 놀라고, 별거 아닌 거에 고개조차 들지 못하는 그런 소녀. 알면 알수록 신기했다. 이런 여자가 어떻게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돌본 건지. 간병이라는 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나이의 어른들도 버티기 힘들다고 하던데. 어린 여자가, 그것도 이렇게 연약해 보이고, 소녀 같은 여자가 어떻게 3년을 견딘 건지. 지안이 침상 가까이로 다가오자, 도하는 한 손으로 가볍게 환자복을 걷어 단단한 팔을 드러냈다. 그 순간 지안의 눈이 크게 요동쳤다. 건강미가 느껴지는 매끈한 피부 위로, 불끈 선 힘줄과 굵은 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혈압을 재는데 이렇게 속살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다.

16548865859766.jpg“옷은 안 걷으셔도 돼요.”

지안은 힘없이 손으로 쓰윽 옷을 다시 내려 그의 팔을 감췄다. 그러곤 조금 편안해졌는지, 도하의 팔을 잡아 심장과 같은 높이에 두고 혈압을 측정하기 시작했다. 혈압을 재는 중간중간 시선이 마주칠 새면 지안은 먼 허공으로 눈을 피했다. 도하는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집요하고 끈질기게 그녀의 시선을 따라다녔다. 그러다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 유난히 희고 맑은 피부, 적당한 쌍꺼풀과 그 아래 감춰진 다갈색의 오묘한 눈동자. 그 눈을 한 번씩 감았다 뜰 때면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작지만 오뚝한 코와 분홍빛의 차분한 입술. 갸름한 얼굴선이 그녀의 가녀린 이미지를 완성시키고 있었다. 이렇게 하나하나 따로 뜯어본 적 없었기에, 도하는 처음으로 느꼈다. 그녀의 얼굴이 제법 조화롭고 자꾸만 눈이 가는 얼굴이라는걸. 도하는 여전히 지안의 얼굴을 바라보며, 정순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16548865859774.png‘가족이라도 지안이처럼은 못 했을 거야. 지난 3년간 지안이가 도하, 너한테 얼마나 잘했는지 네가 봤더라면 나만큼 지안이를 사랑하게 됐을걸. 아니, 나보다도 더 많이 사랑하게 됐을 테지.’

그때 지안의 들뜬 듯 톤이 올라간 목소리가 도하의 귓가를 울렸다.

16548865859766.jpg“혈압이 아주 좋네요.”

16548865886879.png“…….”

16548865859766.jpg“다행이에요. 어제 물속에 오래 있어서 혹시 문제가 생겼을까 봐 내내 걱정했는데.”

도하는 말없이 그런 지안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하얀 얼굴 위로 발그레 번진 미소가 통유리창 너머로 스며든 햇살보다 눈이 부셨다. 이렇게 그녀가 밝게 웃는 건 처음 본다.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녀가 이리도 밝게 웃는 이유가, 제 몸도 아닌 누군가의 혈압이 좋아져서라니. 지안의 꾸며내지 않은, 꾸며낼 수 없는 진심 어린 기쁨이 도하의 가슴에도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혈압 측정기를 정리하던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들었다. 평소였다면, 벌써 불편한 말 몇 마디를 하고도 남았을 남자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덜컥 겁이 났다.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닌지. 지안은 제 얼굴로 시선을 고정한 채 생각에 잠긴 도하를 불렀다.

16548865859766.jpg“괜찮으세요?”

도하의 눈동자에 순간 빛이 일었다.

16548865886879.png“……뭐라고?”

16548865859766.jpg“괜찮으신지 물었어요. 어디 안 좋은 건 아닌가 해서.”

도하는 고민 없이 말했다.

16548865886879.png“좋아.”

그 순간 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늘 냉담한 표정에, 높낮이 없이 낮고 차가운 음성만 뱉던 남자가 무슨 일인지 다정하게 말한다. 몸이 정말 많이 나아졌나 보다. 조금 낯설지만, 좋아지고 있다니 간병인으로서도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지안은 오래간만에 싱긋 웃으며 말했다.

16548865859766.jpg“다행이네요. 좋아지고 있다니.”

얼마간 두 시선이 한곳에 만나 머물렀다. 의도치 않게 맞닿은 시선. 그 시선이 서로를 향해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지안은 당황했다. 그녀가 눈을 피하려 마음은 먹은 순간,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었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정순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16548865859766.jpg“네. 할머님.”

16548865859774.png-지안아, 이를 어쩌지. 내가 오늘 오너 모임에 가져와야 할 서류를 깜빡한 거 있지? 중요한 거라 비서들 시키기도 뭐 해서. 지안이 네가 가져다주면 좋겠는데. 잠깐 시간 되겠니?

지안은 잠시 도하를 힐끗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6548865859766.jpg“네. 할머님. 지금 출발할게요.”

16548865859774.png- 그래, 고맙다.

  *** 케이원 호텔 VIP 회의장에는 각 그룹 총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방금 막 전화를 마친 정순이 그들을 향해 말했다.

16548865859774.png“온대요. 곧 온다니까 조금만 기다리고들 계셔요.”

16548865907475.jpg“드디어 보는 겁니까? 우리 황 회장님이 입이 닳도록 자랑한 그 손주 며느님을!”

16548865907475.jpg“3년이나 간병하고, 죽을뻔한 손주를 살려냈으니 자랑할 만도 하죠.”

오너들의 말에 정순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때 저만치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던 D그룹 회장이 말했다.

16548865907475.jpg“저도 오늘 이 자리에 한 사람 소개할까 해서 초대했습니다. 젊고 유망한 사업가인데. 괜찮으시죠들?”

16548865907475.jpg“그럼요. 요새 젊은이들은 늙은이들하곤 놀고 싶어 하지 않아서. 어울릴 기회조차 없는데.”

16548865907475.jpg“아주 사람이 된 청년입니다. 아, 황 회장님도 아시려나?”

정순은 누구냐는 듯 눈을 크게 떴다. *** 케이원 호텔 로비에 도착한 지안은 가방에서 정순이 부탁한 서류를 꺼냈다. 저만치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곤, 늦었다는 생각에 바삐 뛰기 시작했다. 지안이 앞만 보고 달리던 그때, 옆으로 난 코너에서 나오던 누군가와 정통으로 부딪히고 말았다. 탁. 부딪힌 충격에 상대방의 휴대폰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16548865859766.jpg“어. 죄송합니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휴대폰을 줍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산산조각 금이 간 액정이 보였다.

16548865859766.jpg“어떡해.”

낮게 뱉는 그녀의 뒤로 상냥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16548865859728.png“어차피 바꿀 때 다 됐는데, 잘됐네요.”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응시했다. 사진 속 여자를 실물로 마주한 세준의 두 눈이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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