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남편의 구여친이 집 앞을 배회한다2022.01.21.
“죄송합니다.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살짝 입술을 깨문 채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여자. 세준의 눈에 지안의 모든 행동이 슬로모션으로 보였다. 사진이 실물을 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이목구비는 사진과 비슷했지만, 단아하고 깊이 있는 분위기는 미처 사진이 담아내지 못했다. 하린이 장미처럼 화려하고 반짝이는 외모라면, 눈앞의 여자는 들꽃 같았다. 은은하고 은근한 아름다움이 가슴으로 스며드는. 맑고 꾸밈없는 아름다움에 세준은 잠시 넋을 놓았다. 그때 지안이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괜찮으세요?”
차분하면서도 신뢰가 가는 목소리는 주변에 흔히 있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모든 것을 관찰하던 그는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쪽 연락처를 주시겠어요?
“네?”
“제가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지안은 급히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이름과 번호를 메모했다. 세준은 바쁘게 번호를 적어 내려가는 희고 가녀린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가늘고 긴 손가락과 그 흔한 네일 아트조차 하지 않은 정갈한 손톱. 늘 눈에 띄는 컬러와 반짝이는 장식으로 치장된 하린의 것과 확실히 달랐다. 세준은 그녀를 보며, 본래의 분홍빛 손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았다. 지안이 번호를 적은 쪽지를 건넬 때, 세준은 저도 모르게 뱉었다.
“네일은 안 하시나 봐요.”
느닷없는 질문에 지안의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높이 올라갔다.
“네?”
“아, 아뇨. 제가 아는 분이 네일 아트 하는 걸 좋아해서.”
“아…….”
지안은 잠시 제 손을 뻗어 열 손가락을 확인하듯 보며 말했다.
“돌봐야 할 가족이 있어서요. 언젠가부터 손톱은 늘 이 길이에, 이 상태로 유지하고 있어요.”
어쩌다 낯선 남자에게 제 손톱 사정을 보고하는지 알 수 없지만, 피해를 입혔기에 최대한 친절히 답했다. 그녀의 말을 듣던 세준의 얼굴에 순간 그늘이 드리워졌다. ‘돌봐야 할 가족’이라는 말에, 잊고 있던 도하의 얼굴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세준은 그녀가 준 쪽지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낮게 뱉었다.
“그럼, 연락드리겠습니다. 서지안 씨.”
그러곤 먼저 자리를 떴다. 지안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지만, 조금 특이한 사람 같았다. 난데없이 네일 취향을 묻더니, 그녀가 대답하자마자 정색하며 떠나는 남자. 저만치 멀어진 세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안의 눈이 순간 커졌다.
“어, 늦겠다.”
지안은 다시금 잰걸음을 옮겼다. 회의장 앞에 도착한 그녀는 정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후 회의장 문이 열리고 정순이 나왔다.
“지안이 왔구나!”
“할머님, 제가 늦었죠. 여기 있어요, 서류.”
지안의 목소리에 밭은 숨이 섞여 나오자, 정순은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땀을 흘렸는지 이마 쪽 잔머리가 젖어 있었다.
“땀 좀 봐, 뛰어온 거야?”
정순이 걱정스레 묻자, 지안은 대답 대신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천천히 와도 되는데.”
“아뇨.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죄송은 무슨.”
정순은 지안의 어깨를 토닥이며, 잠시 회의실 안쪽을 들여다봤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기대에 찬 눈들이 보였다. 정순은 지안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잠깐 안에 들어갔다 갈래?”
“네?”
“다들 궁금해하셔서 말이다. 내가 손자며느리 자랑을 너무 많이 했나 봐.”
지안은 정순이 난처하지 않게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정순이 앞장서고, 지안이 뒤따라 회의장 안으로 들어갔다. 지안의 등장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감탄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황 회장님, 안목 좋은 거 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보셨습니다.”
“요즘에도 이렇게 참한 아가씨가 있단 말입니까?”
“손자며느리 착하다, 귀하다 그 이야기만 하셨지. 이렇게 아리따운 건 왜 말 안 하셨어요!”
정순이 흐뭇하게 지안을 응시했다. 지안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조아렸다가 정식으로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지안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한마디 하면 금세 칭찬이 돌아왔다.
“목소리까지 청아하잖아.”
드라마 속 그룹 오너들의 근엄한 모습과는 다르게 친근한 분위기. 지안은 정순의 기를 살려줄 만큼만 짧지도, 오래지도 않게 그곳에 머물다가 나왔다. 지안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 안으로 한 사람이 나타났다. 세준을 초대한 D그룹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자네, 왔군.”
“네. 회장님.”
세준이 다른 오너들을 향해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한 뒤,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저만치 떨어진 곳에 앉아 있던 정순이 그를 알아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안은 괜스레 마음이 무거워졌다. 자신을 손자며느리라고 자랑하며, 행복해하던 정순의 얼굴을 생각하면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도하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가면 저 또한 떠날 거라는걸. 아직 정순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순의 지인들을 만나 인사까지 하게 됐으니. 죄짓는 마음이 점점 더 커졌다. 게다가 어른들은 늘 그렇듯, 한참 앞서나간 이야기를 했다.
‘그럼, 이제 도하도 깨어났겠다 곧 예쁜 아가를 기대해 봐도 되려나?’
누군가 시작한 2세 이야기는, 부담 주지 말라는 정순의 만류에도 눈덩이처럼 부풀어갔다.
‘권 대표도 한 인물 하지, 와이프도 이렇게 아리따우니, 2세는 연예인을 시켜도 좋겠네요!’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들답게, 앞을 내다보는 속도도 남달랐다. 그 이야기에 정순은 손사래를 치면서도 싫지만은 않은지 크게 웃었다.
‘연예인은 무슨.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가지고. 하하.’
정순의 웃음을 늘 좋아했던 지안이지만, 그 순간만은 얼굴 근육이 굳어 따라 웃을 수 없었다. 휴우. 회의장에서의 일을 떠올리던 지안의 미간이 한껏 좁아 들었다. 2세라니……. 진짜 결혼을 한 부부도, 가짜 결혼을 한 부부도 피해 갈 수 없는 난관이구나. 그 생각을 하자, 급격히 피로가 밀려왔다. 도하가 깨어난 후로, 일상의 패턴이 많이 바뀌었다. 그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몸과 마음이 쉴 틈 없이 바빴다. 지안은 눈을 감고 잠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사모님, 도착했습니다.”
최 기사의 익숙한 목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감사합니다. 최 기사님.”
가방을 챙겨 내리려던 지안의 시야에 낯선 무언가가 걸렸다. 저택 앞에 서 있는 낯선 차. 새빨간 스포츠카는 지난 3년간 저택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저 차는…….”
지안이 낮게 뱉자, 최 기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저희 차 들어오기 직전에 도착한 차인데……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차 번호라.”
차에서 내린 지안은 저택 바로 앞에 세워진 낯선 차를 잠시 바라봤다. 안에 사람이 타고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지안이 낯선 차를 지나쳐 저택 대문 앞에 선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저기요!”
왠지 모르게 새침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은 허스키한 음성. 목소리를 듣는 순간, 도회적이고 섹시한 느낌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 직감은 정확했다. 지안이 뒤를 돌아봤을 때, 170cm가 넘을 듯 큰 키에, 늘씬한 몸매의 여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완벽한 몸매를 더 도드라지게 하는 슬림핏의 블랙 시스루 원피스가 무척 잘 어울렸다. 조막만 한 얼굴과 서구적인 이목구비는 자체로 빛이 났다. 지안은 연예인을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 어느새 지안의 옆까지 다가온 여자가 자신감 넘치는 투로 말했다.
“여기서 일하는 분이시죠?”
“…….”
일하는 분이라는 말에 지안은 잠시 고민했다. 일하는 분이라고 하기엔 그 이상으로 복잡한 관계가 있었다. 그렇다고 일하는 사람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녀는 도하의 하나뿐인 간병인으로 일하고 있었다. 지안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네.”
지안의 말에, 여자의 차갑던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잘됐네요. 저도 들어가려던 참인데.”
들뜬 여자의 목소리에, 지안은 순간 경계의 눈빛을 비췄다. 3년간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다.
“누구시죠?”
지안이 묻자 여자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기분 나쁜 듯 대답했다.
“민하린이에요. 도하 씨 친구. 근데…….”
“……?”
“이 집 일하는 분한테 내가 자기소개를 해야 하나?”
하린은 고개를 꼿꼿이 치켜들고 지안을 날카롭게 내려다봤다. 도하 씨 친구? 지안은 잠시 기억을 뒤적였다. 종종 도하의 지인이 병문안을 오긴 했지만, 이런 여자는 없었다. 한 번 보면, 절대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외모의 여자를 보고 기억 못 할 리 없다. 지안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친구라면, 어떻게 아는 친구분이시죠?”
집요해 보일지 모르지만 확인이 필요했다. 낯선 사람을 함부로 집 안에 들일 순 없으니까. 지안의 경계 어린 질문에 하린의 눈빛이 순간 이글거렸다.
“지금 나, 의심하는 거예요?”
“아뇨. 제가 3년 동안 이 집에서 일했는데, 처음 뵙는 분이라서요. 그리고 미리 연락도 없이 오신 것 같아서.”
트집을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게 다 맞는 말이었다. 하린은 하는 수 없는 듯 도하와의 관계를 간단히 설명했다.
“도하 씨 와튼스쿨 유학 시절, 전 근처 디자인스쿨에 다니고 있었어요. 한인 유학생 모임에서 만나 알고 지낸 사이고요. 이제 됐죠?”
제법 구체적인 설명에 지안은 조금씩 경계의 눈빛을 거뒀다.
“들어가시죠.”
*** 도하는 침대 헤드에 기댄 채 두꺼운 영문 원서를 읽고 있었다. 하지만 한 문단을 채 다 읽기도 전에 자꾸만 시선이 허공으로 빗나갔다.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는다. 자꾸만 하나의 장면만이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끼어들었다. 지난밤, 물에 빠진 그녀를 구해 제 품에 안았던 순간. 저체온증을 막으려 급히 옷을 갈아입히고, 그녀를 제 침대로 데려와 품에 안았다. 처음엔 어색하기만 하던 자세가 조금씩 편안해지고 스르르 눈이 감겼다. 그가 다시 깬 건, 제 가슴팍으로 가득 파고드는 작은 숨결을 느끼고서였다. 더 따듯한 곳을 찾아 헤엄치듯 그의 심장 가까이 고개를 파묻던 여자. 서지안. 아기처럼 잠든 그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와 함께 정순이 해준 이야기가 배경음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사고 현장에서 그를 처음 발견하고 응급처치를 한 게 그녀라던 이야기. 간병인들의 손길에 발작을 일으키던 그가, 그녀를 만나 안정되었다는 이야기도. 도하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지안이 정순의 호출을 받고 나간 지도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는 열리지 않는 방문을 예리하게 노려보며, 혼잣말을 뱉었다.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서지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