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여보, 이리 가까이 와2022.01.24.
“다들 CTM 아시죠들?”
D그룹 대표가 세준을 앞에 세워두고 소개했다.
“당연히 알죠. 요즘 만나는 사람마다 치타맨 빠른 배송 이야기를 하던데.”
“이 훤칠한 청년이 우리나라를 딜리버리 천국으로 만든 CTM 지세준 대표입니다.”
오너들이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사업가는 얼굴로 성패가 갈리나 봅니다. CEO 얼굴이 웬만한 연예인보다 잘생겼으니, 원.”
민머리의 모 그룹 회장이 말하자, 세준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유일하게 웃지 못하는 한 사람. 정순은 전과 비교해 멀끔해진 세준을 가늘어진 눈으로 찬찬히 훑었다. 세준도 그런 정순을 의식한 듯, 그녀 쪽으론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회의장을 나갈 때까지도 정순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세준은 입구에 서서 각 그룹 오너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오는 정순을 보고는 긴장한 듯 얼어붙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회장님.”
정순은 그의 앞에 우뚝 멈춰 서며 되물었다.
“안녕히?”
서릿발처럼 차가운 목소리에 세준의 입꼬리가 제멋대로 뒤틀렸다.
“…….”
“안녕이라는 인사가 참 쉽구나. 지난 3년간 우리 도하가 안녕한지는 궁금하지 않았고?”
“……할머니, 아니 회장님.”
“내가 아는 한, 도하는 세준이 너를 가장 친한 친구로 생각했었다. 학교는 물론이고, 군대까지 같이 갈 정도였으니. 너도 마찬가지였겠지.”
“……!”
“한데, 3년 동안 코빼기도 비추지 않더구나.”
“죄송합니다. 아시다시피 사업이 갑자기 바빠져…….”
정순은 날 선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그래, 사업! 그 사업이란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은데…….”
정순은 가만히 주변을 돌아봤다. 아직 복도 곳곳에 오너들이 남아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그건, 내가 아니라 도하가 직접 하는 편이 나을 것 같구나.”
“……!”
“우리 도하, 깨어난 건 알고 있겠지?”
“……네. 우연히 들었습니다.”
정순은 고개가 한껏 수그러든 세준을 향해 말했다.
“내 팔십 가까이 살아보니, 결국 모든 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더구나. 그러니, 지금을 마음껏 누리렴. 금세 눈앞에서 다 흩어져버리기 전에.”
정순의 뼈 있는 말에 세준의 눈이 소리 없이 요동쳤다. 정순은 젊은 사업가를 격려하듯, 그의 어깨를 몇 차례 토닥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남겨진 세준의 굳게 말린 두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 도하의 인생에 그런 일은 없었다. 아무리 중요한 계약이라도, 약속 시간을 어겨 기다리게 하는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았다. 도하는 일 분이라도 시간이 지나면 가차 없이 자리를 떴다. 그래서 여태껏 누군가를 기다려본 적이 없었다. 기다리는 일이 그에게는 무엇보다 가혹한 일이었다. 그건 아마도 어린 시절,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던 두 사람에 대한 기억 때문일 거다.
‘할머니, 엄마 아빠 언제 와?’
‘우리 도하가 밥 잘 먹고, 할머니 말 잘 듣고, 그렇게 열 밤만 더 자면, 그땐 오실 거야.’
케이원 예술회관 개관식에 참여했다가, 갑작스러운 화재로 실종자 처리가 된 엄마와 아빠. 도하는 한참이 지나서야, 그때 엄마 아빠가 열 밤 아니 서른 밤을 자도 돌아오지 못한 이유를 알게 됐다. 도하의 가슴에 기다림은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이었다. 한데, 그런 제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인지한 순간 기가 찼다.
‘지금 내가 서지안을 기다리고 있는 건가.’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 방문을 보던 그의 눈빛이 빠르게 흔들렸다. 이내 시선을 거둬 다른 곳으로 옮겼다. 무심결에 닿은 시선에 그의 침대 옆에 놓인 간병인용 침대가 보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에 있는 간병인용 의자도. 지안의 흔적이 묻은 것들을 보는데,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도 기다렸겠구나. 3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약 없이 누워 있는 저를 하염없이 기다렸겠구나. 이제는 제법 익숙해진 지안의 목소리가 순간 귓가로 스쳤다.
[작년에는 할머님과 여의도에 꽃놀이도 다녀왔었는데, 올해는 때를 놓쳤어요. 작년에 찍은 사진은 나중에 도하 씨 깨어나면 보여줄게요.]
눈앞의 저 의자에서, 저 침대에서 그가 깨어나길 기다렸을 한 여자. 그렇게 3년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아릿해졌다. 그 순간이었다. 똑똑. 기다리던 노크 소리가 들렸다. 순간 도하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이러다 다시 쓰러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맥이 미친 듯 널을 뛰었다. 요동치는 가슴을 겨우 붙잡고, 낮게 뱉었다.
“들어와.”
오래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 너머로 지안이 아닌 다른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도하는 제 눈을 의심하듯 잠시 눈을 가늘게 만들었다가 다시 떴다.
“도하 씨!”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이젠 낯설어진 목소리. 하린의 등장에 도하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도하 씨, 나 알아보겠어?”
하린은 돌진하듯 도하의 침상으로 달려갔다. 그러곤 막무가내로 도하를 끌어안았다.
“많이 아팠지, 많이 힘들었지?”
하린의 눈에서 눈물이 빗방울처럼 뚝뚝 떨어졌다. 도하는 잠시 당황한 듯 그대로 굳었다.
“도하 씨, 난 도하 씨가 깨어날 줄 알았어. 강한 사람이잖아. 누구보다 강하고 단단한 사람. 도하 씨는 그런 사람이잖아.”
울먹이는 목소리가 제법 그럴싸하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는지, 하린은 점점 더 연기에 몰입했다.
“나빴어. 어떻게 나랑 다시 만나기로 하고 한 달도 안 돼서 그렇게 돼. 내가 얼마나 놀라고 무서웠는지 자긴 모르지?”
하린의 목소리를 배경으로, 도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정순과 정원 벤치에 앉아 나눴던 대화를.
‘민하린이. 그 아이는 이제 잊어라.’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도하의 눈썹이 순간 꿈틀거렸다. 그리고 까맣게 잊고 있던 기억이 빠르게 되살아났다. 어느 날 불현듯 찾아와 다시 만나자던 민하린. 좋았던 옛 추억에 잠시 흔들려 받아들였지만, 그녀의 지독한 애정 결핍과 집착에 괴로웠던 날들. 신사업 준비로 바쁜 일정과 하린의 히스테리로 결국 이별을 고하기로 결심했던 것까지. 갑작스러운 사고로 결국 헤어지잔 말은 못 했지만, 관계는 거기서 멈춰 있었다. 물론, 마음도 마지막에 먹은 그대로였고. 잠시 골똘해졌던 도하가 정순에게 물었다.
‘하린이는 왜요?’
‘네가 그렇게 되고,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글쎄, 세준이랑 만난다더구나.’
‘……!’
하린이 누구를 만나든 그건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가 먼저 이별을 고하려 했었기에.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는 걸, 도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긴 잠에서 깨어난 후, 그녀를 한 번도 떠올린 적 없는 것만 봐도 그랬다. 하지만 그녀의 새 애인이 세준이라는 건 조금 충격적이었다. 누구보다 두텁다고 믿었던 우정이, 그가 잠든 사이 모두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제가 하려던 사업으로 세준이 성공을 이룬 것도, 하필이면 자신이 만나던 여자를 그가 만나는 것도. 모두 우연이라 여길 수 없었다. 생각에 잠긴 도하의 귓가로 하린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하 씨, 왜 아무 말이 없어? 내가 왔는데.”
좋은 말이 안 나올 것 같아 참고 있다는 걸 왜 모를까.
“…….”
*** 지안은 조금 전 여자가 들어간 도하의 방 쪽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도하 씨한테 저런 친구가 있었다고?’
어디선가 재벌들은 연예인이나, 연예인에 준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한다고 들었던 것 같다. 워낙에 바위 같은 남자라서 미처 몰라봤다. 그도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걸. 그 생각을 하자, 왠지 모르게 그녀가 알던 권도하가 아닌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 3년간 그의 곁을 지키며 그를 가장 잘 안다고, 가깝다고 자부했는데. 아직도 그에 대해 모르는 것 투성이인가 보다. 그러다 불현듯 조금 전 병실로 들어간 여자가 아무 준비 없이 들어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낯선 여자의 화려함과 눈부신 외모에 잠시 넋이 나가 놓친 게 있었다. 어, 안 되는데! 몸에 밴 간병인 본능이 튀어나왔다. 지안은 급히 손 소독제와 옷에 뿌릴 소독 스프레이를 챙겨 걸음을 옮겼다. 도하가 빠르게 회복 중이라지만, 3년간 정상 생활을 하지 않아, 면역력은 최악이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미리 대비해야 했다. 지안은 바쁜 걸음을 재촉해, 복도 끝 병실 앞으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무슨 까닭에선지 방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당황한 지안은 저도 모르게 우뚝 걸음을 멈추고 숨죽였다.
“도하 씨, 나 안 보고 싶었어? 난 도하 씨 무지 보고 싶었는데.”
대문 앞에서 들었던 허스키한 목소리는 사라지고, 아이처럼 혀 짧은 목소리가 들렸다.
“……민하린.”
“응, 도하 씨, 말해. 하린이 여기 있어.”
“이제 그만 돌아가.”
“뭐?”
“돌아가라고.”
지안은 도하의 냉랭한 목소리를 듣고 생각했다. 예쁜 여자에게나, 남자에게나, 간병인에게나 누구에게나 공평한 목소리라고. 차갑고 무감한 목소리. 하긴, 그게 그의 트레이드마크니까. 지안이 그 생각을 하던 순간이었다. 하린이 표정 없는 도하의 얼굴로 무작정 달려들더니, 막무가내로 입술을 겹치려 했다. 어. 얼떨결에 그 광경을 목격한 지안은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병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툭. 시간이 멈춘 듯 아찔한 몇 초간의 정적이 뒤따랐다. 병실 안에 있던 두 사람의 시선이 고스란히 문밖의 그녀에게로 쏠렸다. 잠시 벙찐 채 서 있던 지안은 병을 줍기 위해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민망함과 멋쩍음에 온몸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도망가는 쪽이 더 이상해 보일 거다. 지안은 천천히 소독제 병을 주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꿋꿋하게 병실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방해해서 죄송해요. 손님분, 손 소독을 하고 병실로 들어가셨어야 했는데, 제가 그걸 놓쳐서요.”
지안은 두 사람의 시선을 피해 딴 곳을 보며 말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하가 나직이 뱉었다.
“이쪽은 이제 갈 거라 소독은 필요 없을 거 같고."
“……아, 네."
지안이 의기소침하게 고개를 떨구는 순간이었다.
“들어와.”
낮고 묵직하게 파고 들어오는 목소리. 그 소리에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네?”
“인사하게 들어오라고.”
인사? 지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도하를 응시했다. 하린도 마찬가지였다.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과 갑자기 무슨 인사? 그때 도하가 나직이 말했다.
“뭐해, 어서 들어오라니까."
도하의 재촉에 지안이 어쩔 수 없이 병실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민하린, 여기까지 왔으니 인사나 하고 가.”
“……저 여자가 대체 누군데, 자꾸 인사를 하래?”
도하는 말없이 지안을 쓱 바라본 뒤 낮게 말했다.
“내 아내, 서지안.”
'아내'라는 말에 하린의 두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아, 아내라니?”
도하는 하린의 목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지안을 향해 말했다.
“뭐해, 여보. 가까이 오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