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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우리 남편 괴롭히지 마 (17/110)

17화. 우리 남편 괴롭히지 마2022.01.28.

여보. 여보. 여보. 도하의 입술에서 나온 비현실적인 말이 지안의 귓전을 왕왕 울렸다. 잠시 굳은 듯 서 있던 지안은 천천히 상황을 파악했다. 조금 전 민하린이라는 여자가 했던 말과 도하의 입술로 달려들던 행동까지. 분명 두 사람은 애정 문제로 얽힌 사이일 것이다.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하를 응시했다. 그는 지안에게 어서 제 옆으로 오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집요하고 단단한 눈동자가 당연한 것을 요구할 때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16548866424172.jpg‘괜히 다른 사람들 애정 문제에 끼어들고 싶진 않은데. 그게 말도 안 되는 결혼으로 묶인 법적 남편의 일일지라도.’

지안은 턱을 낮게 수그린 채 잠시 생각했다. 그녀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하린이 입을 열었다.

16548866424179.png“도하 씨, 장난치지 마.”

제법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도하가 차갑게 내뱉었다.

16548866424185.png“뭐?”

16548866424179.png“이런 장면, 한국 드라마에서 정말 많이 봤거든. 마음 상한 주인공이 아무 여자나 데리고, 제 애인이라며 진짜 사랑하는 여자한테 선 긋는 장면.”

도하가 기가 찬 듯 하린을 쏘아봤다.

16548866424185.png“드라마랑 현실을 구분할 나이는 이미 지난 것 같은데?”

평소보다 몇 배는 차가운 목소리에 경멸이 묻어 있었다.

16548866424179.png“내가 잘못했어. 도하 씨 아플 때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내가 부족했어. 앞으로 더 잘할게. 그러니까 화 풀어. 으응?”

16548866424185.png“내 아내가 보는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어서 가. 억지로 끌어내기 전에.”

16548866424179.png“도하 씨! 계속 이럴 거야? 말이 안 되잖아.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랑, 도하 씨가 무슨 결혼을 해? 저 여자가 무슨 도하 씨 아내냐고!”

분위기가 더 이상해지자, 지안은 시선을 한곳에 둘 수 없었다.

16548866424185.png“그만해, 민하린!”

16548866424179.png“도하 씨나 그만해. 왜 스스로 추락시키면서까지 나를 내치려 해? 저 여자랑 오빠가 부부라니. 그걸 누가 믿어?”

16548866424185.png“민하린!”

16548866424179.png“도하 씨! 제발 억지 부리지 마. 저 여자가 무슨 아내야!”

그 순간 지안이 저도 모르게 뱉었다.

16548866424172.jpg“아내!”

16548866424179.png“…….”

16548866424172.jpg“맞아요!”

남녀의 애정 문제에 제삼자가 끼어드는 거 아니라지만. 제삼자라고 하기에, 대화의 중심에 그녀가 거론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아내로서가 아니라, 간병인으로서 나선 거였다. 자꾸 언성이 높아지고, 혈압이 올라가다 보면 도하의 건강에 악영향이 될 게 분명했다. 강 박사가 혈압이 올라가면 뇌압도 상승할 수 있다고, 그럼 언제 다시 위험해질지 모른다고 했던 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절대 안정을 해도 모자랄 시간. 전쟁 같은 상황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16548866424179.png“뭐, 뭐라고?”

당황한 하린이 째진 눈으로 지안을 쏘아봤다. 지안은 그 눈빛에 지지 않고 응시하다 차분히 입술을 뗐다.

16548866424172.jpg“유학 생활을 오래 했어도, 한국 드라마를 많이 보셨다니 아실 텐데요. 한국에선 존댓말이 예의의 기본이라는 거. 초면에 말이 짧으시네요.”

16548866424179.png“……뭐, 뭐?”

16548866424172.jpg“예의를 갖춰 주세요. 제가 민하린 씨보다 어릴지는 모르지만, 한 남자의 아내입니다. 어른이란 말이에요.”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 작고 가녀린 체구이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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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린은 잠시 벙찐 듯 입술을 다물지 못했다. 한동안 기다란 속눈썹을 연신 깜빡이던 하린이 천천히 말했다.

16548866424179.png“아까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었나…….”

16548866424172.jpg“……!”

지안의 동그란 눈에 붉은 핏발이 서자, 하린은 어쩔 수 없이 뱉었다.

16548866424179.png“요.”

지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6548866424172.jpg“일하는 사람 맞아요. 이 집에 살면서 집안일도 두루 돕고, 남편 병간호도 하고요.”

16548866424179.png“……하.”

하린은 기가 찬 듯 거친 숨을 내쉬었다.

16548866424172.jpg“우리 남편 안색이 민하린 씨 오고 나서 많이 안 좋아졌어요. 면회는 이 정도로 하고 그만 돌아가 주시죠.”

지안은 하린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허리를 90도로 숙여 인사했다. 예의는 이런 거라고 몸소 보여주듯. 극도로 깍듯한 상대의 예의 앞에서 하린은 마음대로 굴 수 없었다. 지안은 알고 있었다. 막무가내로 구는 사람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할머니와 산다고, 엄마 아빠 없는 아이라고 또래들이 놀릴 때. 그녀는 함께 싸우기보다 그 아이들을 더 걱정해주고, 안쓰럽게 대했다.

1654886647871.jpg‘학원 여덟 개나 다니느라 많이 힘들지? 스트레스 엄청 받을 텐데, 나라도 놀려서 네 기분이 나아진다면 실컷 놀려도 돼. 난 하도 많이 들은 얘기라 아무렇지도 않거든.’

친절하고 다정한 반응을 보려고 놀린 게 아니었던 아이들은 놀라 금세 달아났다. 이상한 애라고. 더는 놀려선 안 되겠다면서. 아주 오래전부터 몸에 밴 대처술을 이런 상황에서 쓰게 될 줄이야. 지안은 불만 어린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가는 하린을 보며 생각했다. 170cm가 넘는 장신의 여자가 나가고 나니 방이 한결 넓어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엷은 미소조차 쉬이 짓지 않던 도하가 처음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지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도하는 그런 지안의 눈을 지그시 응시하다 나지막이 말했다.

16548866424185.png“이래서 지난 3년을 버틴 거군.”

16548866424172.jpg“……네?”

16548866424185.png“아무것도 아냐. 그냥 할머니 안목이 정확했단 얘길 하는 거야.”

지안은 도하의 입가에 스며든 낯선 미소를 한동안 바라봤다. 쉬이 수그러들 것 같지 않은 그런 미소였다. ***

16548866424179.png“뭐, 예의? 어른? 나보다 몇 살은 더 어려 보이는 게!”

저택 현관을 나가던 하린은 분한 숨을 쉭쉭 내쉬었다. 하린은 도하의 상태를 확인하고, 이후의 방향을 잡기 위해 어렵게 여기까지 왔다. 이대로 쭉 세준과 함께할지, 아니면 다시 도하의 곁으로 돌아올지. 하지만 본전도 찾지 못하고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심정이었다. 도하가 저를 밀어내고, 거부할 가능성에 대해 예상 못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의외의 복병이 나타나 예의를 논할 줄은 몰랐다.

16548866424179.png‘서지안……이라고?’

하린은 허공을 향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그 순간 언젠가 들어본 적 있는 음성이 강력하게 날아왔다.

16548866509645.png“네가 감히,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현관에 들어선 정순이 턱을 높게 치켜들고 빽 소리쳤다.

16548866424179.png“하, 할머니.”

16548866509645.png“할머니라고 부르지도 마! 누가 네 할머니야!”

평소 인자하던 정순의 표정은 모두 흩어지고 없었다. 쇠도 녹일 듯 뜨거운 눈빛을 가진 노년의 강인한 여인만 있을 뿐.

16548866424179.png“제가 사정상 미국에서 지내느라 그동안 못 와 봤어요.”

16548866509645.png“안 물었다!”

16548866424179.png“……네.”

하린은 깨갱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가만히 고개 숙여 인사하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정순이 말했다.

16548866509645.png“다신 내 앞에, 우리 도하 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16548866424179.png“…….”

16548866509645.png“또 한 번 내 눈에 띄었다간 그땐…… 너도, 세준이 녀석도 함께 족쳐줄 테니까.”

16548866424179.png“……할머니.”

16548866509645.png“뭐해! 어서 나가지 않고!”

도하에 이어 정순에게 또 한 번 내쫓긴 하린은 말없이 현관문을 넘었다. 문이 채 다 닫히기 전에 어렴풋이 하나의 광경이 보였다.

16548866424172.jpg“할머님, 오셨어요.”

16548866509645.png“그래, 지안아.”

16548866424172.jpg“시장하시죠? 얼른 상 봐 드릴게요.”

16548866509645.png“아냐, 난 괜찮다. 아까 오느라 고생했지? 우리 지안이 덕에 이 할미가 기가 살았잖아.”

원래 한 가족이었던 듯 다정한 두 여자의 모습. 그 광경을 목격한 하린의 눈이 순간 이글거렸다. 정순의 눈에 가득 어린 애정이 가슴 깊은 곳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한때, 그녀도 정순의 애정을 한 몸에 듬뿍 받던 시절이 있었다. 도하의 여자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유학 생활 중인 그녀를 위해 정순은 손수 담근 김치와 반찬을 보내주기도 했었다. 젓갈 냄새가 진동하는 김치는 냉장고에 있다가 그대로 음식물 쓰레기통에 직행하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그때가 나았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찬밥 신세가 된 지금보다는. 저택을 나온 하린의 두 눈 가득 저열한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 귀가한 정순이 욕실로 들어간 사이, 지안은 도하의 병실로 갔다. 갑작스러운 손님의 등장으로, 오후 혈압 체크 시간이 지났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똑똑. 지안은 습관처럼 먼저 노크를 하고 문 앞에 섰다. 안에서 아까보다 안정을 되찾은 도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8866424185.png“서지안?”

평소와 다른 멘트였다. 그는 보통 무감한 목소리로 ‘들어와’라고만 했었다. 그런 그가 평소와 달리 그녀가 맞는지 묻는 건, 아무래도 조금 전 있었던 일 때문이리라. 대수롭지 않게 ‘들어와’라고 했다가, 들어오면 안 될 사람이 방에 들어오게 된 상황. 지안은 그의 의중을 읽고 나직이 뱉었다.

16548866424172.jpg“네. 저예요.”

그러곤 천천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16548866424172.jpg“오후, 혈압 체크 시간을 놓쳐서요.”

말하고 보니, 차라리 지금 혈압을 체크하는 게 다행이었다. 조금 전, 혈압에 무리가 갈 만큼 시끄러운 일이 있었으니. 만일 문제가 생겼다면, 확인해 바로 조치할 수 있을 거다. 지안은 천천히 도하의 팔에 혈압 측정기를 가져갔다. 조심스럽게 혈압계를 작동시키는데, 그가 말했다.

16548866424185.png“연기력이 제법 뛰어나던데?”

지안은 잠시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애써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16548866424172.jpg“혈압 잴 땐, 말씀하시면 안 돼요.”

16548866424185.png“……괜찮아. 덕분에 혈압 다 내려갔으니까.”

16548866424172.jpg“……뭐라고요?”

16548866424185.png“머리끝까지 솟구쳤던 피가, 덕분에 싹 내려갔다고.”

그의 말에 지안의 눈이 순간 동그랗게 커졌다. 혈압을 재던 손도 그대로 멎었다. 왜 부끄러움은 늘 한참 뒤에 승냥이처럼 떼를 지어 몰려오는 걸까. 당시에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해서 아무렇지 않았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조금 지나치게 오버한 것 같기도 했다.

16548866424172.jpg‘우리 남편 안색이 민하린 씨 오고 나서 많이 안 좋아졌어요. 면회는 이 정도로 하고 그만 돌아가 주시죠.’

맙소사. 우리 남편, 우리 남편이라니. 차라리 그냥 ‘남편’이라고만 했으면 나았을까. 그 앞에 붙은 ‘우리’라는 말 때문에 어감이 참 살가웠다. 우린 그런 사이가 아닌데……. 잠시 굳어 있던 지안은 해명하듯 말했다.

16548866424172.jpg“……간병인으로서 제가 나서지 않으면, 권도하 씨 몸에 무리가 올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

당황한 건지 평소보다 말이 빠르게 나갔다. 그녀를 투시하듯 보고 있던 도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 모습에 지안은 바짝 얼어붙었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도하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박혔다.

16548866424185.png“언제까지 나를 권도하 씨라고 부를 생각이지?”

16548866424172.jpg“……네?”

잠시 일자로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붉은 입술이 벌어졌다. 그리고 흘러나온 짧은 한마디.

16548866424185.png“……여보.”

16548866424172.jpg“……!”

16548866424185.png“권도하 씨 말고, 이제 그렇게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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