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 여자를 알고 싶다2022.01.31.
“권도하 씨와 제 사이에 그런 호칭은 좀…….”
지안이 말하기 무섭게 도하가 말을 뚝 끊었다.
“또 권도하 씨.”
“……!”
“민하린 앞에서 습관처럼 나를 또 권도하 씨라고 부르면 어쩌려고.”
“……그건.”
“평소에 입에 잘 붙도록 불러두는 게 좋을 거야. 실수하지 않으려면.”
“……꼭 그렇게까지.”
지안이 머뭇대자 이번에도 도하가 불쑥 끼어들었다.
“응.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해. 당신이 그러지 않았나?”
“……?”
지안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도하를 응시했다. 도하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 남편이라고.”
“……그건!”
지안의 입술이 잠시 허공에서 겉돌았다. 어디 내놔도 할 말을 다 하는 똑순이라며, 할머니의 예쁨을 독차지하던 지난날의 서지안은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에게 여지를 주면 안 됐다. 권도하라는 남자는 여지를 주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정신을 아뜩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이건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이 그녀의 잘못이었다. 왜 책임지지도 못할 말을 해서는. ‘우리 남편’ 이란 어울리지 않을 단어를 쓴 대가가, 그를 ‘여보’라고 불러야 하는 참극이라니.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왜 괜히 남의 애정사에 끼어든 걸까. 다른 사람의 애정 문제에는 절대 끼어드는 거 아니라던데. 평소엔 평정심을 잘 유지하다가도, 안 좋은 장면을 보면 쉽게 지나치지 못하는 게 문제였다. 오래전 도하의 사고 현장에 뛰어들었을 때도 그랬고, 조금 전에도 그랬다. 그러고 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의 일에 끼어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것. 3년 전, 그의 사고 현장을 발견한 대가로 그와 말도 안 되는 부부가 되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는 그의 애정 문제에 끼어들었다가, 그를 낯 뜨거운 호칭으로 불러야 할 상황에 놓였다. 역시 권도하라는 남자와 엮이면 곤란해진다. 하지만 그걸 깨달은 지금은 너무 늦은 후였다.
“자, 한번 불러보겠어?”
“……네?”
“불러보라고.”
“……!”
“허공에 대고 하는 연습보다, 상대가 있는 게 나을 테니까.”
지안은 허공이든, 그의 앞에서든 ‘여보’라고 부를 마음이 없었다.
“됐어요.”
“왜, 여보라는 호칭이 마음에 안 드나?”
그럼, 그게 마음에 들 리 있어요?
“그럼…… 이건 어때?”
“…….”
지안은 관심 없는 소리라고 여기면서도 저도 모르게 귀 기울였다.
“……자기.”
도하의 묵직한 입술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었다. 그 순간 지안은 뭔가가 목에 걸린 것처럼 사레들린 기침을 터뜨렸다. 하얗던 얼굴이 삽시간에 벌겋게 익어갔다. 놀란 도하가 물었다.
“괜찮아?”
“괜찮…… 콜록콜록.”
“전혀 괜찮지 않아 보이는데.”
“아뇨…… 콜록…… 괜찮.”
지안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삼키며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른기침 소리는 복도 쪽으로 점점 멀어졌지만, 한동안 계속 들려왔다. 지안이 뛰쳐나간 문 쪽을 보던 도하의 입가에 피식 웃음 새어 나왔다. 알면 알수록 종잡을 수 없는 여자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하린을 몇 마디 말로 단숨에 제어하는 강단 있는 모습. 여보, 자기라는 호칭에 놀라서 소녀처럼 도망치는 모습까지. 너무도 다른 두 모습 중 어떤 게 본래 서지안의 모습일까. 아니면 그 모든 게 다 서지안이라는 여자일까. 도하는 그녀에게 또 어떤 면이 있을지 사뭇 궁금해졌다. 지안이 지나간 자리를 바라보는 도하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빛났다. ***
‘내 팔십 가까이 살아보니, 결국 모든 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더구나. 그러니, 지금을 마음껏 누리렴. 금세 눈앞에서 다 흩어져버리기 전에.’
세단 뒷좌석에 탄 세준의 눈이 저열하게 빛나고 있었다.
‘망할 노인네. 자기가 뭘 안다고 그래, 제자리? 이게 원래 내 자리야. 이게 제자리라고!’
세준은 자동차 창문을 향해 주먹을 거칠게 휘둘렀다. 쾅. 그 소리에 운전석에 있던 기사가 순간 움찔 몸을 웅크렸다.
“괜찮으십니까, 대표님.”
“……괜찮냐고? 하아. 김 기사, 지금 그 속도로 가면서 괜찮냐고?”
세준의 말에 김 기사는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그리고 몸에 밴 습관처럼 액셀 페달을 꾹 눌렀다. 세준은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도로 위 난폭한 레이스를 지시했다. 앞 차를 추월하지 못하면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김 기사는 생각했다. 치타처럼 빠른 배송을 선도하는 딜리버리 그룹, 치타맨. 그 이름의 영문 약자, CTM의 수장답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추월하라는 그의 말에, 김 기사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페달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얼룩진 김 기사의 눈이 룸미러 너머 그의 안색을 훑고는 빠르게 지나갔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던 세준의 재킷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었다. 세준은 거칠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얼른 액정을 살폈다. [민하린] 그녀의 이름을 본 세준의 눈가가 절로 일그러졌다. 도저히 전화를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받지 않으면, 하린은 수십 통의 부재중을 남기며 피곤하게 굴 게 뻔했다. 세준은 마지못해 깊은 한숨을 내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어, 하린아.”
-전화를 왜 이렇게 늦게 받아?
“미안, 업무 중이어서.”
-업무? 회사에 전화했더니 퇴근했다던데. 무슨 업무? 세준 씨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야?
세준은 휴대폰을 그대로 내동댕이치려다가 겨우 참았다.
“내가 말했을 텐데. 회사엔 사적으로 전화하지 말라고.”
세준의 목소리에 다정함은 사라지고 사늘한 냉기가 흘렀다.
-뭐야, 세준 씨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알면 그만하고 끊으라고, 윽박이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직은, 아직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화낸 거 아니야. 좀 피곤해서 그래.”
-피곤하면 그렇게 짜증스러운 말투로 전화 받아도 돼?
후우. 세준은 잠시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뜨거운 숨을 내보냈다. 어떻게든 꼬투리 잡아 괴롭히는 걸 보면, 그녀에게 심사가 뒤틀리는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세준은 화를 애써 억누르며 말했다.
“미안. 곧 집에 도착하니까 가서 이야기하자.”
그러곤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화가 났는지. 화가 난 하린은 무엇으로도 달래지지 않았다. 3년을 넘게 함께 한 사이라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녀에게 분명 안 좋은 일이 있었을 거라는 걸. 그럴 때마다 세준은 하린의 광대이자, 상담가가 되어 그녀를 어르고 달랬었다. 하지만 이젠 더는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3년이나 참았으니 지칠 만도 했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세준은 알고 있었다. 도하에게 다른 여자가 생겼다는 걸 알게 돼서일까. 서지안이라는 여자를 직접 보고 잠깐의 대화를 나눈 것 때문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하린과 비교가 됐다. 과장되지 않은 상냥함과 은은한 미소. 낮고 단정한 음성이, 다소 신경질적인 하린과는 많이 달랐다. 꾸밈없이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특유의 분위기는 하린이 옷과 메이크업, 각종 치장으로 꾸며도 따라갈 수 없는 것들이었다. 아주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서지안이라는 여자가 남긴 여운은 길었다. 세준은 재킷에서 곱게 접어진 쪽지 하나를 꺼냈다. 그 사람의 인상을 닮아 반듯하고 정갈한 글씨체. 세준은 그것마저 탐나는지 손끝으로 글씨를 따라 훑었다. 그러곤 휴대폰을 들어 쪽지에 적힌 번호를 누르기 시작했다. ***
“지안이, 이리 와보렴.”
정순이 거실에서 환자복을 개고 있던 지안을 불렀다.
“네?”
“잠깐, 잠깐이면 돼.”
정순은 제 방 테라스로 지안을 데려갔다.
“할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
지안이 커다래진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물었다. 정순은 크흠, 목을 가다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봤지? 민하린이.”
“아. 네. 대문 앞에서 우연히 만나 같이 들어왔어요.”
“그래. 지안아, 오해는 마려무나. 다 끝난 인연이니까.”
“네?”
“우리 도하가 전에 만났던 아이인 건 맞다만.”
“…….”
지안은 가만히 정순의 얼굴에 집중했다.
“도하가 사고 난 후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너도 알지?”
“……네. 저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어요.”
“아직 젊고 창창한 나이에 갑자기 남자 친구가 사고로 의식불명이 됐으니, 얼마나 두려웠겠어. 그 아이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정순이 잠시 말을 멈추자, 지안은 숨죽이고 기다렸다.
“도하를 보러 오지 않은 건 백번 양보해 이해한다 치자, 하지만 도하 녀석의 제일 친한 친구랑 놀아난 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니?”
“……!”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하린을 대하던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차갑고 냉랭했던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몰랐어요.”
“……나도 몰랐다. 그런 짓을 하는 인간들이 있을 줄은. 애인이, 친구가 죽어가는데. 자기들끼리. 쯧.”
정순의 말을 듣던 지안이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도하 씨 충격이 무척 컸겠어요.”
반사적으로 도하를 먼저 걱정하는 지안의 모습에 정순은 잠시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도하는 사고 전부터 하린이를 정리할 생각이었다더구나. 그래서 그 애가 누굴 만나든 상관없었다고. 하지만 제 가장 친한 친구랑 그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민하린 씨도 민하린 씨지만, 그 친구라는 사람도 정말 너무하네요. 아무리 사랑이 좋다지만, 의식불명인 친구의 여자 친구를…….”
지안은 그러다 불현듯 생각난 게 있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친구라는 사람, 혹시 저도 본 적 있을까요?”
지난 3년, 종종 도하의 지인들이 병문안을 왔었다. 오고 가는 사람 중에 혹시 그 친구가 있진 않았을까. 당연한 궁금증이었다. 정순은 대답 대신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어떻게…… 어떻게 가장 친한 친구라는 사람이.”
지안은 도하가 느낄 배신감에 공감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 그녀의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울기 시작했다.
“어, 잠시만요. 할머님.”
지안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낯선 번호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기울인 채 고민하다 천천히 통화버튼을 눌렀다.
“네. 서지안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지안 씨? 아까 낮에 뵀던 사람입니다. 액정 깨진 휴대폰이요.
지안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