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땀 흘리는 남자는 언제나 옳다2022.02.04.
저택 지하 1층에 마련된 운동공간은 웬만한 피트니스센터 못지않았다. 거대한 유리벽 너머로 타이트한 운동복 차림의 도하가 보였다. 바벨 벤치에 누운 도하의 눈빛은 바벨의 냉기를 닮아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조금씩 바벨의 무게를 늘려나가던 그의 뇌리로 조금 전 받은 한 통의 전화가 스쳐 갔다. 3년 전, 그가 사고를 당하기 직전까지 함께 일했던 승훈의 연락이었다. 승훈은 도하가 처음 딜리버리 사업을 준비할 때, 옆에서 살뜰히 도왔던 직원이었다. 도하의 사고 이후에도 그는 케이원 그룹 딜리버리 사업팀 팀장직을 맡아 일해왔었다. 하지만 도하의 빈자리에 사업은 휘청했고, 승훈은 그 책임을 지고 올해 초 퇴사했다고 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한 팀장이 뭐가 죄송합니까?’
-대표님이 얼마나 힘들게 준비한 사업인지 제가 잘 알잖습니까. 어떻게든 대표님 빈자리를 채워보려 노력했는데 그게 쉽지 않았습니다.
‘한 팀장은 충분히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니까 죄송하단 말 하지 마세요.’
-……저, 대표님.’
승훈은 꺼내기 어려운 말이 있는지 잠시 숨을 골랐다.
‘무슨 일입니까. 한 팀장.’
-대표님 그렇게 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개발팀에 있던 지세준 팀장이 퇴사를 했었습니다.
‘…….’
-사내에선 지 팀장이 대표님의 절친이라, 충격이 커서 퇴사했다고 소문이 났었지만…….
도하는 침착하게 말했다.
‘계속하십시오.’
-조금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대표님과 저, 그리고 지 팀장이 따로 만나 나눴던 회의 자료들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제가 따로 저장해뒀던 것까지 모조리요.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딜리버리 사업과 비슷한 콘셉트의 ‘CTM’이라는 스타트업이 등장했습니다.
거대한 바벨을 들어 올리며 통화 내용을 떠올리던 그의 이마로 굵은 핏줄이 섰다. 뉴스에서 처음 세준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미 예상한 시나리오였다. 크게 놀랄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이번만은 자신의 예상이 비껴가길 바랐었다.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긴 침묵이 오갔다. 도하는 한참 후 말을 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게 맞다면, 정말 그런 거라면 원래대로 되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도하의 말에 승훈은 염려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아직 일선으로 복귀 전이시라 잘 모르실 수 있습니다만, 업계에선 역전은 불가능하다고. 이미 승자독식의 구조가 자리 잡혀 버렸다고들 하고…….
승훈의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분함의 단계를 지나, 체념에 도달한 감정이 느껴졌다. 도하는 그런 부하직원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한 팀장, 그런 이야기 들어봤습니까?’
-어떤…… 이야기 말씀이시죠?
‘아류는 절대 원조를 이길 수 없다.’
도하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깊었다.
-대표님.
‘겉은 흉내 낼 수 있어도 본질은 따라올 수 없는 법입니다. 한 팀장은 알 텐데요. 개발팀에 있을 때, 지세준이 이 사업을 얼마나 단순하게 생각했는지.’
도하의 말에 승훈은 얼른 호응했다.
-기억합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대표님 절친만 아니었으면 저랑 수도 없이 부딪쳤을 겁니다. 기본도 안 된 그런 사람이 지금 저렇게 된 거 보면 가끔은 세상이 불공평하단 생각도 들고요.
승훈의 푸념을 듣던 도하가 단호하게 내뱉었다.
‘출근하세요. 한 팀장.’
-네?
‘복귀하시라고요. 나랑 같이 한번 해봅시다.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푸념이나 늘어놓으며 살기엔 한 팀장이 가진 재능이 너무 아깝습니다.’
-대표님!
‘나도 최대한 빨리 일선으로 돌아갈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니 한 팀장이 먼저 돌아와 바로 스타트할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대표님, 하지만 저는…… 대표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해 지금 케이원에선 평판이 아주 바닥입니다.
‘내가 압니다. 한 팀장 능력. 평판 따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고요. 됐습니까?’
도하의 이야기에 승훈은 전보다 많이 자신감을 되찾은 듯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렇게 믿고 불러 주시는데 제가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도하는 가장 무거운 무게의 바벨을 가슴 높이 올렸다 내려놓았다. 땀에 흠뻑 젖어 번뜩이는 몸 위로 탄탄하고 두텁게 갈라진 근육이 사악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몸과 얼굴에선 더 이상 환자의 병약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사냥터에 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냥꾼의 비장함만 가득할 뿐.
*** 얇은 카디건을 걸쳐도 밤은 여전히 쌀쌀했다. 차에서 내린 지안은 건너편에 보이는 커피숍을 확인하곤 횡단보도를 건넜다. 사실 전화를 받고 조금 당황스럽긴 했다. 보통은 계좌번호를 알려준 뒤 수리비용을 청구하지 않나. 하지만 휴대폰 주인은 끝까지 만나서 상의할 게 있다고 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순 없어 하는 수 없이 약속을 잡았다. 커피숍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쓱 주변을 살폈다. 늦은 시간에도 제법 사람들이 많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지안의 시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블랙 슈트 차림에 단정히 올려 넘긴 머리 스타일. 지적인 느낌의 안경. 낮에 마주친 남자가 분명했다. 지안이 그를 발견한 순간, 그도 그녀를 알아본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는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수습하느라 미처 못 봤는데, 일어선 남자의 키가 상당히 컸다. 정확히는 몰라도 도하와 비슷하거나 조금 작은 수준이 아닐지 지안은 생각했다. 도하를 떠올리자, 아까 집을 나오다 우연히 그와 마주친 게 떠올랐다. 몸에 완전히 핏된 운동복 차림의 남자. 늘 여유 있는 환자복을 입고 있어서 또 잊고 있었다. 그의 몸이 어떤 모습인지. 타이트한 운동복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장대한 기골과 몸의 굴곡. 지안은 그 앞에서 저도 모르게 숨을 꾹 참았었다. 눈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던 순간이 떠오르자, 다시금 귓불이 붉어졌다.
“서지안 씨?”
낯선 목소리를 듣고서야 지안은 정신이 들었다. 그가 있는 테이블로 간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자리에 앉았다. 남자가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물었다.
“제가 너무 늦은 시간에 연락드렸죠?”
“이해합니다. 휴대폰을 빨리 고쳐야 일상에 지장이 없으실 테니까요.”
하나를 말하면 셋, 넷까지 이해하는 지안의 모습에 세준의 입꼬리가 위로 크게 휘어졌다.
“지세준이라고 합니다.”
그가 갑작스럽게 자기소개를 하자 지안의 눈이 커졌다.
“네?”
“아, 이것도 인연인데 서로 통성명은 해야죠. 그리고 저는 서지안 씨 이름도 알잖아요.”
“아, 네.”
잠시 잊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조금 독특한 남자였다는 걸. 느닷없이 네일은 안 하냐고 묻더니, 답을 하니 휑 가버렸던 장면이 머릿속에 되살아났다. 지세준? 그가 말한 이름을 곱씹던 지안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았다. 흔한 이름인가? 그건 아닌데. 골똘해진 지안의 앞으로 세준이 무언가를 휙 들어 보였다.
“어.”
놀란 지안이 눈에 그레이 컬러의 새 휴대폰이 보였다.
“휴대폰은 이미 새 제품으로 구입했습니다.”
지안은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전화로 수리비를 청구하지 않은 건, 휴대폰을 고치지 않고 이참에 완전히 바꿨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면 바꿀 때가 다 되었는데, 잘되었다고. 그가 그런 말을 했었던 것도 같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언짢아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주변을 살피지 않고 무작정 뛰었던 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지안은 옆에 내려둔 가방 속에 손을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얼마인가요?”
지안의 말에 세준은 픽 웃으며 대꾸했다.
“휴대폰비는 됐습니다.”
휴대폰 수리비 건으로 마주한 자리에서 그건 됐다니. 지안은 그게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세준을 응시했다.
“됐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
세준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휴대폰비 말고 다른 걸 상의드리고 싶어서 뵙자고 한 겁니다.”
“……다른 거요?”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지안은 두 눈을 연신 빠르게 깜빡였다. *** 도하는 운동 후 샤워를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 충분히 수분을 섭취한다고 했지만, 빠져나간 수분이 더 많은 건지 자꾸만 갈증이 났다. 물로도 가시지 않는 갈증에 언젠가 지안이 내어주었던 은은한 차가 떠올랐다. 온몸이 스르르 이완되고, 갈증까지 말끔히 사라지던 차. 옆에 앉아 몸에 좋은 거라며, 끝까지 마시라고 재잘대던 목소리. 차를 생각하던 도하의 의식은 금세 지안을 향하고 있었다. 아까 전, 운동을 하러 가던 길에 그녀와 잠시 마주쳤었다. 운동복을 입은 제 모습이 낯설었는지, 그녀는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하고 쫓기는 사람처럼 눈을 피했었다. 그러다 귓불까지 붉어져 당황해하던 얼굴. 그 모습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잠시 집 앞에 살 게 있어서 나갔다 오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거실에도, 복도에도, 병실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돌아왔어도 벌써 돌아올 시간인데. 도하는 이상함에 퍼뜩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간 그가 지나가던 메이드 하나를 불러 세웠다.
“서지안, 아니 내 와이프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글쎄요. 사모님이 아까 최 기사님 차 타고 나가시는 건 봤는데.”
고작 집 앞에 나가는데 차를 타고 나갔다고? 도하의 사고체계가 빠르게 움직였다. 대체 어딜 간 거지? 급히 지안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무슨 일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혹시 또 집을 나간 건가. 그럴 리가. 마지막에 본 그녀의 얼굴은 약간의 당황스러움이 번졌을 뿐, 집을 나갈 사람 같지 않았다. 점점 더 이상한 느낌이 그의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도하는 분주히 다른 번호를 눌렀다. 다행히 그녀를 데리고 나간 최 기사와 바로 연결이 되었다.
“최 기사님, 지금 어딥니까? 서지안, 내 아내도 옆에 있습니까?”
-사모님은 지금 휴대폰 주인 만나고 계시고요. 저는 차에서 대기 중입니다.
“휴대폰 주인?”
-아, 모르셨군요. 아까 낮에 사모님이 회장님 심부름 때문에 나갔다가, 어떤 남자분과 부딪혀서 그쪽 휴대폰이 파손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분께 연락이 와서 수리비를 치르러 가셨습니다.
최 기사의 이야기를 듣던 도하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럼 이 밤에, 서지안 혼자 누군지도 모르는 그 남자를 만나러 갔단 말입니까?”
-그, 그게. 제가 같이 가드리려 했지만, 사모님이 혼자 다녀오겠다고 하셔서…….
“거기가 어딥니까!”
도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장 현관문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