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찌릿하고 아찔한2022.02.07.
세준은 명함 한 장을 지안의 앞으로 내밀었다. 지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명함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식회사 CTM 대표 지세준] CTM? 명함에 박힌 회사명을 보던 지안의 동공이 잠시 커졌다. 요새 온라인상에서 가장 인기 있는 회사였다. 치타맨의 빠른 배송은, 무엇이든 자고 일어나면 받아볼 수 있는 혁신을 만들어냈다. 지안도 오래전 도하의 체온계가 갑자기 고장 나는 바람에, 급히 CTM에서 환자용 체온계를 주문한 적이 있었다. 도하의 컨디션이 좋지 않던 때라, 조마조마했었는데 빠른 배송 덕에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회사의 대표가 제 눈앞에 앉아 있다니. 그 사실이 놀라웠지만 지안은 차분한 성격답게 티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낮게 물었다.
“갑자기 저한테 명함을 주신 이유를 여쭤도 될까요?”
보통은 흥분한 목소리로 아는 회사라고, 만나 봬서 영광이라고들 했었다. 세준은 명함을 보고도 호들갑 떨지 않는 지안의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더 강한 자극을 느꼈다. 흔들림 없는 여자를 제 손에 넣고 멋대로 흔들어보고 싶은 자극을. 게다가 그게 권도하의 여자라면 더더욱. 세준은 마음 깊은 곳에서 새어 나오는 흑심을 감추며,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서지안 씨를 우리 회사에 특별 채용하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돌아오자, 찻잔을 들어 올리던 지안의 손에 순간 힘이 들어갔다.
“뭐라고요?”
되묻는 그녀의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세준은 한 통의 전화를 떠올렸다. 그녀와 약속을 잡기 전, 세준은 노 실장의 전화를 받았었다.
-대표님, 서지안이라는 여자를 조사하다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뭡니까?’
-얼마 전 혼자 로펌을 찾아갔다고 합니다. 권 대표가 깨어나고 얼마 안 되어서요.
‘로펌? 로펌에는 무슨 일로…….’
-혼인무효소송에 관해 상담했다고 하더군요.
‘혼인무효소송?’
-권 대표가 살아날 거라곤 생각지 못하고 저지른 결혼이라 수습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서로 좋아서 한 결혼도 아닐 테니까요.
‘그럼, 그 소송은 진행하기로 된 겁니까?’
-아뇨. 서지안 쪽에선 권 대표를 떠나 지내려고 집까지 알아봤던 것 같은데, 권 대표가 붙잡은 모양입니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도하가 그녀를 붙잡았다는 이야기에 세준의 동공에선 불꽃이 피어올랐다. 혼인무효소송과 나와 살 집까지 찾던 여자가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 세준은 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그게 혼수상태에서 이제 막 깨어난 남자를 사랑해서일 리 없다. 단지, 자립할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어서 일 테지. 그럼, 그녀에게 일자리를 준다면? 세준에게 그 정도 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그녀를 CTM에 두면 가까이에서 매일 볼 수 있을 거다. 툭.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세준은 지안이 찻잔을 내려두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지안은 여전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세준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제 비서가 급히 일을 그만두게 되었거든요.”
그의 말을 가만히 듣던 그녀가 내뱉었다.
“CTM 대표분의 비서 자리라면, 입사 지원 사이트가 마비될 정도로 인재가 몰릴 텐데요.”
그녀다운 대꾸에 세준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시네요. 맞습니다. 한 시간만 올려둬도 이력서 수천 통쯤은 거뜬히 받을 수 있겠죠. 하지만…….”
그가 말끝을 잠시 흐릴 때도 지안은 여전히 그를 주시했다.
“눈앞에서 인재를 발견했는데, 돌아갈 필욘 없잖습니까? 명색이 빠른 배송으로 일어선 기업의 대표가. 빠른 길을 두고 굳이 느린 길을 갈 이유가…….”
지안은 그의 말이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되지 않았다. 저를 언제 봤다고 ‘눈앞의 인재’라고 하는 건지. 느린 길이 아니라 ‘빠른 길’이라고 장담하는 건지. 지안은 석연치 않은 마음에 눈썹 사이를 좁히며 물었다.
“저를…… 아시나요?”
그녀가 눈을 똑바로 뜨고 응시하자, 살짝 당황한 듯 세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곤 한참 뒤 겨우 입을 열었다.
“알죠.”
“……어떻게 아시는데요?”
의심 때문인지 급속도로 차가워진 그녀의 목소리에 세준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까 로비에서 부딪혔을 때, 서지안 씨가 대처하는 걸 보고 알았습니다. 빠르게 수첩에 번호를 적어 넘기더군요. 요즘 같은 세상에 수첩과 펜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흔치 않죠.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
“그리고 제가 밤늦게 보자고 무리한 부탁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본인이 입힌 피해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나왔고요.”
“……!”
“저는 민첩하고 현명한 비서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이 흔치 않다는 것도 잘 알고요. 그게 바로 서지안 씨라는 것도 압니다.”
“잠시만요.”
지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휴대폰 수리비를 치르러 나온 자리에서, 갑자기 취업 제안을 받게 되다니. 하지만 여전히 이상했다. 지안은 낮고 곧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저를 구직자라고 생각하시죠?”
이번 물음은 세준도 쉽게 넘어갈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세준은 마치 자신이 그녀에게 면접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통과해야만 하는 그런 면접을. 세준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아까 우리가 부딪힌 시간이, 정상적인 직장인이라면 업무 보느라 정신없을 시간이었죠. 그런데 서지안 씨는 회사에 온 사람 복장 같지도 않았고. 사원증 같은 것도 목에 걸려 있지 않았죠. 나이는 스물 중후반 정도 돼 보여서 당연히 구직자라고 판단했습니다.”
그의 말이 제법 설득력 있었는지, 의심으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눈동자가 한 꺼풀 가벼워졌다. 그 모습을 본 세준이 자신 있게 덧붙였다.
“그리고 설령 직장을 다니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회사의 가치를 믿고 제안드렸습니다.”
“…….”
그 말에 지안의 눈동자가 살짝 커졌다.
“제 입으로 이런 얘길 하면 없어 보일 테지만, 구직자가 뽑은 입사 희망 기업 5위 안에 우리 CTM이 있습니다. 서지안 씨가 어떤 조건의 회사를 다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상으로 모셔올 생각으로 제안 드린 겁니다.”
한 기업을 이끄는 대표들의 뇌 구조는 일반인들의 것과는 다른 것일까. 그 짧은 순간에 대체 무얼 보았기에 이런 제안을 하는 건지 여전히 의심스러웠다. 좋게 봐준 것은 고맙지만, 처음 본 사람을 자기 기준에서 마음대로 판단하는 태도도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았다. 그리고 그의 말을 모두 믿는다고 해도, 당분간은 취업 생각이 없었다. 우선은 도하가 건강을 완전히 회복할 때까지, 그의 곁에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유종의 미라는 말을 이런 경우에 써도 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3년을 맡아왔던 환자가 완전히 일어서는 모습을 제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그리 머지않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지안은 경계심으로 굳었던 표정을 천천히 풀고 나직이 말했다.
“저를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일을 맡고 있어서요. 다른 일을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말을 맺으며 지안은 명함을 다시 세준의 앞으로 돌려주었다. 정중하면서도 간결한 대답이 그의 가슴에 더 큰 미련을 안겼다. 세준은 무언가에 쫓기듯 말했다.
“명함은 받아두시죠!”
그의 목소리 볼륨이 갑자기 올라가자, 지안은 두 눈을 크게 떴다.
“……!”
그녀가 조금 놀란 것 같자 세준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말했다.
“인생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 친구 녀석 하나가 그랬거든요. 늘 승승장구하고 잘 나가던 녀석이었는데,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죠. 인생이 한순간에 바뀐 거예요.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는 걸.”
이야기를 하는 세준의 머릿속으로 도하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지안은 조금 무서워졌다. 장황한 이야기까지 늘어놓으며 저를 붙잡으려 하는 모습이 집착과 다를 바 없어 보였기에. 그때마다 입가로 한마디 말이 맴돌았다. 나를 언제 봤다고 이러는 걸까. 지안은 어서 이 자리를 정리하고 나가고 싶었다. 그러려면 깔끔한 마무리가 필요했다. 지안은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그의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휴대폰 값이에요. 새 휴대폰이 얼마인지 정확히는 몰라서 우선 이렇게 치르겠습니다. 모자란 건, 문자 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그녀가 급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세준이 갑자기 팔을 뻗어 지안의 손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잠시만요!”
어! 놀란 지안은 순간 그대로 얼어붙었다.
“서지안 씨, 아직 제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뒤에서 세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 놓으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입술까지 굳어버린 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빼내려고 지안이 안간힘을 쓰는 순간이었다. 커피숍 입구 쪽에서 묵직한 울림의 음성이 날아왔다.
“그 손 놔!”
지안은 천천히 그쪽으로 눈을 옮겼다. 도하 씨. 커피숍 안 사람들의 눈길을 전부 사로잡기에 충분한 비주얼의 남자. 지안은 저만치 떨어진 곳의 그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그의 키가 지세준이라는 남자와 비교할 수 없이 훨씬 더 크다는 걸. 막 운동을 마친 몸은 그 어느 때보다 크고 단단해 보였다. 도하는 긴 다리로 금세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 앞까지 다가왔다. 그러곤 단숨에 지안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세준의 손을 내쳤다. 도하는 얼마간 쇠도 녹일 것 같이 뜨거운 눈빛으로 세준을 쏘아봤다. 이 순간,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무엇으로도 꺼트릴 수 없는 불, 불붙은 그의 눈빛이 모든 이야기를 대신해 주고 있었다. 세준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놀라 굳었다. 현실을 부정하고픈 눈동자만이 파도처럼 일렁일 뿐. 도하가 깨어났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귀로 들은 소식과 실제로 보는 건 완전히 달랐다. 알 수 없는 불안이 뱀처럼 세준의 온몸을 휘감았다. 도하는 한동안 세준을 녹일 듯 쏘아보다 지안을 향해 나직이 내뱉었다.
“이만 가지.”
세준과 해야 할 이야기가 많고 많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지안이 있는 곳에서 나눌만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도하는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그곳을 빠져나갔다. 커피숍 밖으로 나왔을 때도 그의 손은 그녀를 꼭 붙들고 있었다. 의식 없던 도하의 차가운 손만 기억하던 지안은 많이 낯설었다. 타오르는 장작처럼 뜨거운 그의 손. 그 손과 닿는 순간부터 온몸으로 퍼진 찌릿하고 아찔한 전율. 이제 그만…… 이제 그만 놓고 싶다. 그러지 않으면, 후끈 치미는 이 열기에 온몸이 타들어 가 그만 사라질 것 같았다. 지안이 그의 커다란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를 쓰자 그가 우뚝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
“그대로 얌전히 있으라고.”
“…….”
도하는 그녀를 붙잡은 손에 좀 더 힘을 넣었다. 달빛을 받은 지안의 다갈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런 그녀의 앞으로 도하가 한 걸음 더 바짝 다가서며 낮게 말했다.
“이제 내 허락 없인 아무 데도 가지 마."
“…….”
“또 그랬다간…….”
도하는 붙잡은 손을 쓰윽 가볍게 들어 보이며 말했다.
“그땐 이것보다 더한 걸 하게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