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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위험한 벌 (21/110)

21화. 위험한 벌2022.02.11.

바위처럼 무겁고 단단한 목소리가 지안의 심장을 무자비하게 때렸다. 더…… 더한 거라고? 심장박동이 급격히 빨라졌다. 손잡는 것보다 더한 거라면……! 바보가 아닌 이상 그 말뜻을 모를 리 없다. 지안은 몸을 제멋대로 휘감은 긴장감에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불현듯 조금 전 지세준이라는 남자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16548867286972.png‘인생은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어쩌다 보니, 무심코 흘려보낸 그 말이 지금 그녀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해주는 말이 되었다.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마른 장작처럼 생기 없던 남자의 손이 이렇게 뜨겁게 작열할 줄을. 그녀 없인 아무것도 할 수 없던 아이 같은 존재가, 멀쩡하게 일어나 이렇게 위압적인 표정으로 저를 향해 경고할 줄은.

16548867286977.png“다시 한번 말하지. 또 지금처럼 말도 없이 위험한 행동을 하면, 그땐 똑같이 위험한 벌을 받게 될 거야.”

위…… 험…… 한…… 벌…….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지안의 심장으로 깊이 박혀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도 해명하고 싶은 부분이 있었다. 지안은 잠시 머뭇거리다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8867286983.jpg“밤늦게 이야기도 없이 나온 건 잘못했지만…… 그렇다고 이게 위험한 행동까진 아닌…….”

순간 도하의 고개가 지안의 얼굴로 훅 다가왔다. 서로의 코끝, 숨결이 닿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거리. 심장이 내려앉기에, 충분한 그런 거리였다. 지안은 놀라 눈꺼풀조차 깜빡이지 못한 채 그대로 굳었다. 도하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가오자, 지안은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도하는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 그녀 너머로 보이는 커피숍 쪽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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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그곳에 세준이 머무르며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매섭고 사늘한 빛을 띠었다. 수초가 흘러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지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도하는 한걸음 물러서며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곤 눈빛만큼이나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로 말했다.

16548867286977.png“어때, 이건 좀 위험해 보였나.”

16548867286983.jpg“……!”

16548867286977.png“또 오늘 같은 일이 생기면, 그땐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위험한 벌이 싫어서라도, 위험한 일 근처엔 얼씬 못 하게 만들 거니까.”

지안은 답답했다. 대체 뭐가 그리 위험한 일이라는지. 지금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두고두고 억울할 것 같았다.

16548867286983.jpg“……저기요.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전 그저 휴대폰 수리비를 치르러 나온 거예요. 보다시피 장소도 사람 많은 대로변 커피숍이고요. 딱히 위험하다고 하기에는…….”

그녀가 말을 채 다 잇기도 전에 도하가 날카롭게 말을 잘랐다.

16548867286977.png“낯선 남자 손에 손목이 잡힌 걸 당신 남편이 봤어. 만약 그때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후에 무슨 짓이 벌어졌을지 어떻게 장담하지? 근데 이게 위험한 게 아니라고?”

충혈된 것처럼 붉은 기가 도는 도하의 눈을 보자, 지안은 더는 대꾸할 수 없었다. 그의 말이 모두 맞아서라기보다, 걱정이 앞서서였다. 겉으론 그 누구보다 건강하고 튼튼해 보이지만, 지안의 눈에 그는 여전히 보살펴주어야 할 환자였다. 화를 내고, 찬 바람을 쐬는 게 회복 중인 사람에게 좋을 리 없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 사람을 놀라게 했으니. 이렇게 그의 이마와 목, 몸 구석구석에 핏대가 서게 만들었으니, 먼저 사과할 수밖에.

16548867286983.jpg“……그래요. 미안해요. 내 잘못이에요.”

지안이 가만히 고개를 숙이자 도하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사과받기 위해 한 말은 아니었다. 단지, 다신 그녀가 조금 전과 같은 일을 겪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 게다가 조금 전 그녀의 앞에 있던 남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지세준이었다. 어쩌면 세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이성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이 가득한 커피숍도, 아직 밝은 가로등 불빛도 모두 어둠으로 바뀌고, 그저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만 보였는지도. 세준에게 잡힌 손목을 빼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서지안의 얼굴. 그 장면이 도하에겐 가장 충격적이고, 위험한 모습이었다. 카페 안 사람들과 아직 밝은 조명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어두운 그녀의 얼굴과 불안해 보이는 다갈색 눈동자만 보였었다. 세준과 그녀가 휴대폰으로 엮인 일도 그에겐 단순한 우연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평소보다 흥분했던 것일지 몰랐다. 도하는 힘주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천천히 풀었다.

16548867286977.png“늦었어, 이만 돌아가지.”

그러곤 그녀보다 앞장서 주차장으로 향했다. 주차장에 들어선 지안은 낯선 차 앞에 선 도하를 가만히 바라봤다. 평소 최 기사가 운전하는 세단이 단정한 패밀리카라면, 도하가 끌고 온 차는 SF영화에서 본 것처럼 매끈하고 섹시한 느낌의 세단이었다. 왠지 모르게 차갑고 어려운 느낌이 드는 차가 주인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하가 자연스럽게 운전석이 있는 쪽 차 문을 열자 지안은 반사적으로 물었다.

16548867286983.jpg“운전해도 괜찮아요?”

도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16548867286977.png“……올 때도 몰고 왔는데, 뭘.”

순간 지안의 앞이마가 구겨졌다. 얼마나 급했으면. 3년 전, 처참했던 교통사고 현장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자동차가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고, 희뿌연 연기와 고통 어린 신음으로 가득했던 그 장면이. 그 정도 사고를 당하고, 3년이나 의식 없이 누워 있었다면 트라우마 때문이라도 쉽게 운전하지 못할 거다. 그런데, 이렇게 차를 몰고 나왔다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다급한 마음과 걱정이 느껴져서 지안은 괜스레 미안해졌다. 조수석에 탄 그녀가 안전띠를 하려다 말고 말했다.

16548867286983.jpg“제가 할까요?”

16548867286977.png“뭐?”

16548867286983.jpg“운전 말이에요.”

도하는 커다란 눈을 반짝이는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는 줄도 모르고.

16548867286983.jpg“싫다는 거죠? 그 표정은.”

지안이 의기소침한 목소리를 내자, 도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16548867286977.png“운전할 줄 알아?”

16548867286983.jpg“할 줄 알죠. 다만, 좀 오래되어서…….”

16548867286977.png“얼마 만인데?”

16548867286983.jpg“……한 7, 8년쯤 됐을 거예요. 도로 주행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16548867286977.png“……!”

그녀의 말에 도하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거칠게 시동을 켰다. 그러곤 낮게 뱉었다.

16548867286977.png“위험한 여자야, 당신.”

  *** 세준은 여전히 커피숍 안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꿈을 꾼 듯 멍했다. 권도하를 이렇게 다시 보다니. 도하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건강해 보였다. 아니, 사고를 당하기 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까맣고 단단한 눈동자도, 냉기가 철철 흐르는 목소리도, 상대를 압도하는 몸짓도. 도하가 깨어났다는 소식에, 그래도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오려면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산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이 아닌 권도하라는 걸 왜 간과하고 살았을까. 누구보다 강한 정신력과 의지를 가진 사람. 그래서 늘 앞서가는 재수 없는 녀석. 태어날 때부터 가진 게 많아, 조금 느리게 걸어도 좋을 법한데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걷던 녀석. 세준은 늘 도하의 뒤에서 앞서 걷는 그의 그림자를 지켜봤었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준의 공허한 두 눈이 빛바랜 기억을 떠올리며 깊어졌다. 20년 전.

16548867338802.jpg‘세준아, 얼른 나와서 불고기 먹어.’

엄마 은선의 들뜬 목소리에 열네 살의 세준은 방문을 열고 나왔다.

16548867286972.png‘웬 불고기야?’

16548867338802.jpg‘회장님댁에서 가져왔어. 도하 도련님 식탁에 올린 건데, 손도 안 댄 거래. 청소년기에는 잘 먹어야 키도 쑥쑥 크잖아…….’

16548867286972.png‘엄마! 엄만 왜 이런 걸 들고 와! 내가 거지야? 왜 남의 밥상에 올라갔던 걸 주워다 먹냐고?’

16548867338802.jpg‘어머, 얘 좀 봐. 손도 안 댄 거라는 말 못 들었어?’

16548867286972.png‘손을 댔든 안 댔든!’

16548867338802.jpg‘얘가 배가 불렀네, 불렀어. 그럼 먹지 마! 한우 불고기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알고.’

세준의 아빠 석구가 새로 구한 일자리는 하필 도하의 할머니, 황 회장의 운전기사 일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반 친구의 집에서 부모가 일한다는 건,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자격지심을 갖게 했다. 세준은 학교에서 되도록 도하와 모르는 사이로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도하는 유독 세준을 챙겼다. 옆에 가까이 두고, 자기가 얼마나 잘났는지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서였을까. 그게 아니면 흙수저를 향한 금수저의 동정심일까. 세준은 늘 그 생각을 머릿속에 달고 살았다. 늘 열등감에 시달렸지만, 그래도 도하와 같이 다니면 좋은 점도 있었다. 케이원그룹 회장의 손자라는 도하의 배경 때문에 아무도 그를 건들지 못했다. 하지만 뒤에선 늘 이런 꼬리표들이 세준을 따라다녔다. 권도하 옆에 있는 애, 권도하 수행비서, 권도하 빵 셔틀. 제 이름 석 자 대신 그 꼬리표로 평생을 살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 석구가 도하네 운전기사 일을 그만둘 거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고생하고 살지 않아도 된다고 떠들었다. 세준은 그때, 석구가 복권이라도 당첨된 줄 알았다. 그리고 얼추 비슷했다. 오랜 시간, 함께 고생해온 석구에게 도하의 할머니 정순이 오래전, 선물한 주식이 엄청나게 폭등했다고 했다. 석구는 그 돈으로 부동산과 또 다른 주식에 투자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는 부유한 삶이 세준의 눈앞에도 펼쳐졌다. 세준은 부자가 되었으니, 이제 더는 도하에게 열등감 같은 걸 느끼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도하와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만 해도 이제 그와 동등해졌다고 느꼈다. 낯선 나라에서 사귀게 된 새 친구들은 세준을 편견 없이 대해줬다. 그때 확신했다. 이곳에선 도하와 동등하게,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렇게 시작한 유학 생활이 얼마 지나지 않아, 세준은 스코틀랜드계 미국인인 에바와 연인 사이로도 발전했다. 첫 여자친구와의 연애는 세준을 더 큰 행복에 취하게 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세준이 그녀에게 함께 한국으로 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했을 때, 에바는 미안하다며 믿기 힘든 고백을 했다. 사실 그녀가 마음에 담고 있는 건, 세준이 아니라 도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다. 도무지 곁을 내어주지 않는 도하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세준을 택한 거라고. 뼛속 깊숙이 새겨진 열등감이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저에게 접근해온 여자들의 대부분이, 자신이 아닌 도하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곁에만 가도 냉기가 흐르고, 학업 이외의 다른 곳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도하와 가까워지기 위해서, 늘 도하의 곁에 있는 저에게 다가왔다는 걸. 애써 지워보려 했던 열등감이 더 진하게 번져갔다. 오래된 기억을 들춰보던 그의 눈이 요동치듯 흔들렸다. 세준은 어금니를 굳게 물고 생각했다.

16548867286972.png‘이번엔, 이번엔 절대 그렇게 안 될 거야. 난 그때의 지세준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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