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벌 받을 시간이야2022.02.25.
“우리 손주며느리한테 어울릴만한 옷으로 한번 보여주게나. 회사 다니면서 입을 수 있는 거로.”
정순의 말에 매니저는 지안을 빠르게 스캔하고는 말했다.
“피부도 하얗고, 날씬하셔서 아무거나 다 잘 어울리시겠는데요.”
지안은 과한 칭찬이 민망한지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그중에서 사모님께 가장 잘 어울릴만한 것들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얼마 후, 매니저와 직원들이 이동식 행거를 밀고 들어왔다. 옷과 구두, 가방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지안의 눈이 커졌다. 행거에서 옷을 한 벌 꺼낸 매니저는 큐레이터처럼 소개를 시작했다.
“이 제품은 C사 S/S 신상인데요. 페미닌한 감성이 담긴 스타일로, 화이트 레이스 블라우스와 이렇게 전면에 슬릿 디테일이 들어간 블랙 H라인 스커트를 매치하면, 우아하면서도 깔끔한 느낌의 오피스룩으로 활용하실 수 있습니다.”
설명을 마친 매니저가 옷을 지안의 몸에 살짝 대주었다. 전면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던 지안의 시야로 거울 속 도하가 보였다. 유난히 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와 잔뜩 집중한 입매. 아직도 혼자 애틋한 신혼부부 연기를 하는 걸까.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쳐도 그는 피하지 않고, 끝까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안은 그의 집요한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지켜보던 정순이 말했다.
“그냥 보는 거랑 입는 거는 다르단다. 지안아, 어서 한번 입고 나와보렴.”
“……그럴까요?”
지안은 눈앞의 옷을 쓱 바라보며 대답했다. 화려하기보다는 우아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이 그녀의 취향에 잘 맞았다. 지안이 탈의실로 들어간 사이, 매니저가 도하에게 다가와 슬쩍 말했다.
“여자분들은 쇼핑할 때 선택 장애가 오기도 하고, 여러 벌을 입어봐서 앞에 입어본 옷을 잘 기억 못 하기도 하시거든요.”
“…….”
“함께 오신 남편분이나 애인분이 사진을 찍어두면 그렇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사진 말입니까?”
둘 사이를 정말 다정한 신혼부부로 생각한 건지 매니저가 쓸데없는 팁을 줬다. 도하가 살짝 당황한 듯 굳어있자, 옆에서 정순이 부추겼다.
“그래. 도하 네가 찍으면 되겠구나. 할미는 그런 거 할 줄 모르잖니.”
“…….”
도하는 평소 사진 찍는 재미에 대해 조금도 공감하지 못했다. 사진보단 눈으로 간직하는 것을 더 즐겼기에. 하지만 몇 초 후……. 탈의실 문이 열리고, 낯선 차림으로 지안이 걸어 나오는 순간, 저도 모르게 휴대폰 카메라를 작동시키는 자신을 발견했다. 지안은 오랜만에 갖춰 입은 복장이 어색한지 애먼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쭈뼛거렸다. 하지만 어색한 건 그녀의 마음뿐,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완벽했다. 화이트 레이스 블라우스가 조명처럼 그녀의 하얀 얼굴을 더 환하게 만들었고, 날씬하면서도 볼륨감 있는 몸매를 더 부각시켰다. 보폭이 클 수 없게 만들어진 H라인의 스커트는 그동안 펑퍼짐한 옷 속에 감춰져 있던 아름다운 골반 라인과 늘씬한 다리를 제대로 살려줬다. 매니저가 의상과 함께 내어준 구두를 신은 덕에 지안은 한층 더 성숙해 보였다. 오피스룩에 맞게 높이 올려 일자로 묶은 포니테일도 무척 잘 어울렸다. 도하는 그 모습을 모조리 사진에 담았다. 한 장이 아니라 연속된 사진으로 수없이 찍었다. 마치 한순간도, 한 조각의 아름다움도 놓치면 안 되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처럼. 찰칵, 찰칵, 찰칵, 찰칵……. 어디선가 화살처럼 날아드는 셔터음에 지안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그 소리의 근원지가 다름 아닌 도하의 손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도하가 있는 각도로 고개를 돌린 지안은 눈에 한껏 힘을 넣어 그를 응시했다. 그녀의 놀란 눈이 그를 꾸짖듯 말하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하지만 집중한 듯 표정 없는 남자는 어떤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매니저가 적시적기에 끼어들어 지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권 대표님이 정말 스윗하세요. 사모님께서 선택 장애 오실까 봐, 직접 사진으로 기록하고 계신 거예요. 비교하실 수 있게요.”
최상류층만 상대하는 백화점 VIP룸 총괄 매니저. 그녀가 그 자리에 오른 비결은 아마도 빠릿빠릿하고 센스있는 플레이 때문이었을 거다. 정순은 매니저의 활약을 흐뭇하게 지켜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지안을 향해 말했다.
“우리 지안이가 탈의실에서 걸어 나오는데, 하늘에서 선녀가 내려오는 줄 알았지 뭐야?”
정순의 클래식한 칭찬이 지안의 두 뺨의 더 붉게 만들었다. 수줍은 듯 고개를 떨구고, 비교적 차가운 손등으로 두 뺨을 만지고,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넘기고. 그녀의 매 순간, 모든 장면이 생생하게 도하의 카메라 속에 담기고 있었다. 어떤 일을 맡아도 그 이상으로 해내는 권도하다운 모습이었다.
“그럼, 다음 옷도 보여드릴게요.”
이후로도 지안이 입고 나온 옷들은 모두 그녀를 모델로 만든 옷인 듯 몸에 촥 감겼다. 결국엔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오늘 보여준 옷, 가방, 구두 전부 다 우리 집으로 부탁하네.”
정순의 말에 매니저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네. 잘 정리해서 저희가 직접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정순이 매니저와 인사를 나누는 사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지안은 도하에게 낮게 말을 붙였다.
“그런 취미가 있으신 줄은 미처 몰랐네요.”
“뭐?”
“지워 주세요. 제 사진.”
“…….”
도하는 표정 없는 얼굴로 지안의 눈을 바라볼 뿐, 아무 대꾸가 없었다.
“빨리 지워 주세요. 남의 휴대폰에 제 사진이 있는 거 불편해요.”
“……남?”
도하가 건조한 목소리에 힘을 넣어 뱉자, 순간 지안의 눈이 흔들렸다. 아직은 남이 아니지만, 곧 남이 될 테니까, 남이라면 남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다가도, 서릿발처럼 차가워진 그의 눈을 보면 차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도하가 특유의 냉랭한 목소리로 휘갈기듯 말했다.
“시간 들여 힘들게 찍은 걸 지울 이유는 없지.”
“……그래도 지워 주세요.”
“싫어.”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일었다.
“권도하 씨답지 않게 왜 이래요? 제 사진이 있어봤자, 그쪽 휴대폰 용량만 차지할 뿐이라고요.”
“……내 휴대폰 용량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난 분명 싫다고 얘기했을 텐데. 그렇게 억울하면…….”
“…….”
“당신도 나를 찍어. 그럼 똑같아지겠지?”
“이봐요. 권도하 씨.”
지안이 저도 모르게 목청을 높이는데, 뒤에서 정순이 훅 끼어들었다.
“너희들…… 혹시 싸우는 거니?”
놀란 지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
정순의 눈치를 살피던 도하는 단숨에 손을 뻗어 지안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러곤 그녀의 뺨에 붙어 있던 가느다란 잔머리를 쓱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싸우다뇨. 저희가 왜.”
그의 손길은 붓으로 여린 살을 쓸어내리듯 간지럽고 아슬아슬했다. 지안은 그 순간 숨을 꾹 참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숨을 돌리기 무섭게, 그는 다른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아 자기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지안의 한쪽 허리가 그의 단단한 몸에 완벽히 밀착됐다. 도하는 그녀의 허리를 굳세게 붙잡은 채 말했다.
“이렇게 사이가 좋은걸요.”
그러곤 태연히 웃으며 지안의 얼굴을 내려다봤다. 비스듬히 내려온 시선, 흑요석처럼 짙은 눈동자에서 흘러나오는 오묘한 빛이 잘게 떨리던 그녀의 눈가로 한가득 쏟아졌다. 지안은 깊은 현기증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제 허리를 감싼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 한쪽 허리에 닿은 그의 단단한 몸, 저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뜨거운 시선까지. 그 모든 것에 속절없이 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반달눈이 되어 두 사람을 바라보던 정순이 나직이 뱉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원이 없다, 이 할미는 이제 원이 없어.”
***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든 세준은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반면, 하린은 물 만난 고기처럼 백화점 매장 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한참을 앞서 걷던 하린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저만치 뒤처져 있는 세준을 불렀다.
“빨리 좀 와. 세준 씨.”
“……가고 있어.”
세준은 퉁명스럽게 말하곤, 하린이 등을 보이자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사치벽이 있는 하린은 틈만 나면 쇼핑에 그를 대동했다. 그렇게 반나절 이상 쇼핑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의 몫은 사은품으로 받은 쓸모없는 물건, 아니 쓰레기 몇 개가 다였다. 사귄 지 얼마 안 됐을 때, 하린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따라갔던 게, 이제는 당연한 일이 되어 그를 괴롭혔다. 하린은 세준의 존재를 잊은 듯 일반 매장을 지나 VIP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신상이 들어왔다는 소식에 마음이 분주하기만 했다. 한참 걸음을 옮기던 그녀의 걸음이 어느 순간 우뚝 멈추어 섰다. VIP룸 쪽에서 보이는 익숙한 실루엣. ……도, 도하 씨? 그리고 그 옆에 정순이 함께 있었다. 하린은 그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잊고, 그저 혼자만의 반가움에 속아 달려가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탈의실에서 나온 또 한 명의 일행을 보곤 다리에 제동이 걸렸다. 저번에 저택에서 봤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의 여자. 서지안이라고 했던가. 촌닭인 줄만 알았던 여자가, 제대로 차려입으니 제법 봐줄 만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지안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린은 낯설기만 한 도하의 모습에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손가락에 모터를 단 듯 촬영 버튼을 연달아 누르는 남자. 무엇을 그리도 담고 싶은 건지, 무엇을 그토록 남기고 싶은 건지. 그의 손가락은 한시도 멈추지 않았다. 도하가 잠시 팔을 내렸을 때, 그의 눈에 일렁이는 낯선 빛이 믿기지 않았다. 저, 저 눈빛은……. 도하는 단 한 번도 하린을 그렇게 바라봐 준 적이 없었다. 따사로움, 애틋함, 어떤 진심 같은 게 가득 담긴 눈빛.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도하는 여자의 얼굴에 붙어 있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고, 허리에 팔을 감아 제 곁으로 데려오기까지 했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보려 해도, 그의 행동은 하린이 아는 권도하의 모습이 아니었다.
“하린아, 아직도 더 볼 데가 남았어?”
짜증 섞인 세준의 목소리에 화가 욱 치밀었지만, 하린은 꾹 누르고 말했다.
“아니야. 다 봤어. 세준 씨, 우리 이만 가.”
*** 옷 정리를 마친 지안은 도하의 병실로 내려갔다. 노크를 해도 아무런 대답이 없자, 지안은 슬그머니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서자 눈을 감고 있는 도하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벌써, 잠든 건가.’
그녀가 침대 쪽으로 가까이 다가갔을 때, 도하는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잠시 그의 안색을 살피던 지안이 조용히 곁을 지나치려는데, 도하의 손에 꾹 쥐어진 무언가가 보였다. 어. 3년 전 모델로 멈춰 있는 그의 휴대폰. 잠들기 전까지 휴대폰을 보고 있었는지, 액정에 아직도 환한 불빛이 들어와 있었다. 전자파가 건강에 안 좋다는 걸 모르나. 지안은 프로 간병인답게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조심스레 그의 손 쪽으로 다가가 휴대폰을 빼냈다. 다행히 깊이 잠들었는지 그는 뒤척이지도 않았다. 지안은 그의 손에서 꺼낸 휴대폰을 대수롭지 않게 한번 쓱 봤다. 무심결에 시선이 향한 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그녀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낯선 오피스룩 차림을 하고 수줍게 서 있는 바로 저 자기 모습. 도하가 열심히 찍어대던 수많은 사진 중 한 장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전신 샷으로 찍은 사진이, 무슨 까닭에선지 얼굴 부분만 크게 확대되어 있었다.
‘뭐야…… 왜, 남의 얼굴을 이렇게 확대한…….’
속으로 투정 어린 목소리를 뱉는 순간, 무언가 크고 묵직한 것이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터억. 어! 감겨 있던 도하의 눈꺼풀이 스르륵 열렸다. 평소보다 더 가라앉아 울림이 큰 남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때렸다.
“누구 마음대로 내 휴대폰에 손을 대지?”
당황한 지안의 입에서 횡설수설 정리 안 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게 아니고, 도하 씨가 휴대폰을 이렇게 손에 꾹 쥐고, 전자파가 몸에 안 좋으……!”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던 말, 벌써 잊은 건가.”
“……!”
“분명 경고했을 텐데.”
“……!”
“또 한 번 함부로 행동했다간…… 그땐, 위험한 벌을 받게 될 거라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잡고 있던 지안의 손목을 더 거칠게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억센 힘에 그녀의 몸이 그대로 기울어졌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은 몸이 그대로 도하가 누워 있는 침대 방향으로 쓰러졌다. 놀란 지안의 고개가 도하의 얼굴로 속절없이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