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같이 잘래요2022.02.28.
한 시간 전. 지안이 옷 정리를 하러 간 사이, 도하는 홀로 병실에 남아 있었다. 맛있는 음식, 멋진 풍경, 아름다운 인물……. 도하는 여태껏 그것들을 사진으로 남기는 심리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 이유를 그저 남에게 과시하거나 자랑하기 위함이라고만 여겼다.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처음 깨달았다. 사진으로 남기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아름다움이라는 게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그에게도 그런 순간이 찾아오니 손이 절로 날아다녔다. 오피스 룩을 입고 피팅 룸에서 걸어 나오던 서지안. 평소와 사뭇 다른 그녀의 모습에 도하는 온몸의 신경과 감각이 급격히 예민해지는 걸 느꼈다. 우아한 느낌의 하얀 레이스 블라우스는 여리여리하고 청순한 그녀의 얼굴을 더욱 빛나게 했고, 하체를 바짝 감싼 H라인 스커트는 감춰져 있던 아름다운 라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 아래 한 줌에 잡힐 듯 가는 종아리는 왠지 지켜줘야만 할 것 같은 남자의 보호 본능을 깨웠다. 정제된 옷차림만큼 그녀는 평소보다 훨씬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 수줍은 미소와 멋쩍은 듯 연신 얼굴을 만지는 가느다란 손가락까지. 어느 것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평소와 다르게 높게 올려 묶은 헤어 스타일이 꽤 잘 어울렸다. 늘 머리카락으로 가려져 있던 흰 목선이 완전히 드러나자 왠지 모를 섹시함까지 풍겼다. 그녀의 길고 매끈한 목선에 살포시 입술을 가져다 붙이면…… 어떤 느낌일지……. 잠시 남자의 불순한 욕망이 깃든 것도 사실이었다. 도하는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자신이 건강한 남자로 돌아왔음을 확인했다. 그걸 확인시켜준 게 바로 서지안이라는 여자였다. 그녀를 생각하자, 문득 다시 그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얼마 뒤면 옷 정리를 마친 지안이 내려와 실물을 보게 될 테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참을성 없는 남자였던가. 도하는 이런 스스로가 낯설었지만, 그렇다고 제게 찾아온 변화를 딱히 외면하고 싶진 않았다. 3년이라는 긴 시간, 제 심장이 뛰는지 멎었는지도 모르는 세월을 보냈다. 이제 비로소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고, 살아 있다는 걸 매 순간 느끼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도하는 휴대폰을 들어 사진첩을 열었다. 사진첩 첫 화면이 전부 지안의 사진으로 가득했다. 아껴서 보지 않아도 될 만큼 많은 장수에 괜히 마음이 넉넉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게 뭐라고……. 들뜬 마음을 달래려 대수롭지 않은 척했지만, 실수로 전체 삭제 버튼이 눌릴 뻔하자, 그의 손가락에선 핏기가 싹 가셨다. 겨우 진정을 되찾은 도하는 천천히 사진을 넘겨나갔다. 긴장했는지 아랫입술을 살짝 문 채 앞을 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 칭찬을 들었는지 민망한 듯 슬쩍 짓는 미소. 고개를 돌려 무언가를 발견하고 놀라 한껏 커진 눈. 그리고 다음 장은 실수로 잘못 찍힌 동영상이었다. 노이즈가 섞인 영상 속으로 중간중간 매니저의 목소리와 정순이 호응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배경으로, 지안이 카메라 쪽을 정통으로 노려보며 눈썹과 눈썹 사이를 한껏 좁힌다. 동그란 눈망울에 힘을 잔뜩 넣은 걸 보아, 카메라를 들이밀고 있는 그에게 찍지 말라고 항의하는 듯했다. 잔뜩 일그러뜨린 얼굴이 그녀 딴에는 겁을 주려는 의도인 듯했으나,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영상을 보던 도하의 입꼬리가 조금씩 휘어졌다. 실수로 찍힌 영상일 뿐인데, 생동감이 살아 있는 그녀의 표정이 그 어떤 영화보다 재미있게 느껴졌다. 도하는 족히 100장이 넘는 사진을 넘기고 또 넘기다가, 나중엔 그녀의 얼굴을 조금씩 확대해 봤다. 별다른 것 없는 눈코입인데,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사람의 시선을 끄는 건지, 왜 자꾸 보게 만드는 건지 알고 싶었다. 사진을 확대한 그는,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얼굴. 그 얼굴이 주는 묘한 편안함과 아늑함에 조금씩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3년 동안 저를 간병해 준 여자가 사진으로나마 저를 바라봐주고 있으니, 더 쉽게 눈이 감기는 건지도 몰랐다. 도하는 잠든 제 입가에 미소가 스며든 것도 모른 채 그렇게 잠이 들었다. 길진 않았지만, 피로가 풀릴 만큼 질 높은 잠이었다. 그가 잠에서 깬 건, 제 곁으로 다가온 누군가의 익숙한 향기, 그리고 손길 때문이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가 손에 꼭 쥐고 있던 무언가를 톡 꺼내 갔다. 처음엔 꿈인가 싶었지만, 너무도 생생한 감각이 그를 완전히 깨웠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눈앞에서 지안이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게 보였다. 백화점에서 사진을 지워달라고 매달리던 목소리가 귓가에 되살아났다. 도하는 힘들게 얻은 사진을 지울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손안에 두고 마음껏 볼 수 있는 기회를 이대로 놓칠 수 없었다. 낮게 가라앉았던 목소리를 힘껏 끌어올려 뱉었다.
“누구 마음대로 내 휴대폰에 손을 대지?"
놀란 눈이 마구 흔들리는 게 보였다. 그와 함께 놀란 입술이 채 정리되지 않은 말들을 마구 쏟아냈다.
“……그게 아니고, 도하 씨가 휴대폰을 이렇게 손에 꾹 쥐고, 전자파가 몸에 안 좋으……!”
해명하려고 쩔쩔매는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여워서, 더 보고 싶어져서. 무엇보다 겨우 잔잔히 다스려놓은 심장을 다시 또 이렇게 자극하니까, 참을 수 없어서 내뱉었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던 말, 벌써 잊은 건가.”
“……!”
“분명 경고했을 텐데.”
“……!”
“또 한 번 함부로 행동했다간…… 그땐, 위험한 벌을 받게 될 거라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잡아당긴 것도, 그녀의 고개가 속절없이 제 얼굴 위로 떨어진 것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우연한 사고로 일어난 일이라기엔, 포개어진 두 입술의 각도가 원래 한 쌍이었던 것처럼 꼭 맞았다. 뜨겁고 아찔한 촉감, 연신 더운 숨결이 거칠게 입술을 붙들자, 지안은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그 순간 제 아래에 있던 도하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놀란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뛴다. 한쪽 팔이 깔리듯 닿아 있는 그의 가슴팍에서도 저와 비슷한 박동이 느껴졌다. 두 심장이 같은 속도로 함께 뛰고 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지안은 자신을 둘러싼 공간이 핑 도는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비로소 정신을 차린 그녀가 입술을 떼려고 몸에 힘을 넣는 순간, 그의 커다란 팔이 그녀의 몸을 막았다. 살포시 떼어졌다 다시 붙은 두 입술. 낯선 마찰이 주는 찌릿한 전율과 열기에 여린 살이 익을 듯 부풀어 올랐다.
그가 조금 더 속도를 내려는 듯 입술을 움직이는 순간. 똑똑. 등 뒤에서 들려온 노크 소리에 지안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비틀었다. 이번에는 그도 미처 힘을 쓰지 못했다. 지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한 뒤 뱉었다.
“네.”
그녀의 목소리에 문 너머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렸다.
“사모님, 회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정순의 호출을 전하러 온 메이드였다. 지안은 아직 채 진정되지 않은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말했다.
“네. 지금 바로 가도록 할게요.”
*** 지안이 노크하자, 잠옷 차림에 돋보기안경을 쓴 정순이 웃으며 그녀를 맞았다.
“그래, 지안아. 잘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할머님.”
진심이었다. 이미 잠은 싹 달아난 상태였으니까. 예기치 못한 사고. 그와 나눈 키스 때문에 심장이 아직도 미친듯 파닥거렸다. 정순이 그때 부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지. 그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섰다. 얼이 빠진 듯 지안이 멍때리고 있자, 정순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피곤한 아이를 내가 억지로 불러 앉힌 거 아니니?”
“아니에요. 할머님, 저 정말 괜찮아요.”
“……그래. 다른 게 아니고.”
정순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잠시 뜸을 들였다. 지안은 눈을 똑바로 뜨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처음엔 지안이가 도하 비서로 출근한다니 마냥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슬슬 걱정이 되는구나.”
“……걱정이요?”
“도하에겐 지안이 네가 옆에 있는 게 좋은 일이다만, 지안이 너한테는 글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도하가 평소에도 무뚝뚝하고 차가운 구석이 있는 건 너도 잘 알지?”
지안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일할 땐 더 칼 같은 녀석이라, 혹여 지안이 너한테 상처를 주진 않을지 염려스럽구나.”
“……아.”
지안도 조금은 우려하고 있던 부분이었다. 상사가 된 권도하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무서워질지. 심각해진 지안의 얼굴을 보며, 정순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한테는 도하만큼 지안이 너도 중요하단다. 지안이가 상처받는 건 이 할미가 못 봐.”
정순의 깊은 마음이 느껴져 지안은 가슴이 뭉클했다. 이렇게 자신을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벅찬 일이었다. 지안은 두 팔을 벌려 정순의 굽은 어깨를 쓱 보듬었다.
“할머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보기보다 강해요. 상처도 잘 안 받고요.”
정순이 씨익 미소 지으며 지안의 마른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도하가 힘들게 하면, 이 할미한테 다 일러. 내가 아주 혼쭐을 내줄 테니까.”
“……네. 그럴게요.”
정순은 지안의 손을 연신 쓰다듬다가 시계를 보곤 말했다.
“늦었다. 어서 가서 자야지. 도하가 목 빠지게 기다릴 텐데”
도하가 목 빠지게 기다릴 텐데……. 그 말이 지안의 귀에 무섭게 박혀 들어왔다. 그가 기다리고 있다고? 잠시 잊고 있던 조금 전의 사고. 그 뜨겁고 아찔했던 순간이 머릿속을 훅 덮쳐왔다. 처음 몸의 균형을 잃고 넘어져 입술이 겹쳐진 건 분명한 사고였다. 하지만 그다음은 단순한 사고라 볼 수 없었다. 뜻밖의 접촉이라는 작은 불씨를 잽싸게 꺼버리지 못하고,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어 활활 타오르게 한 건 두 사람이었다. 낯선 촉감에, 벗어날 수 없는 뜨거운 감각에 굳어버렸던 그녀가 비로소 정신을 차려, 멈춰보려 했을 때도 그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거침없이 몰아붙이던 키스와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몸을 힘껏 감싸 안던 그 손길의 의미는. 젊은 남자라면 누구나 있을 자연스러운 욕정? 잠시 생각에 잠겼던 지안은 아니라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매사 철두철미하고 냉철한 그가 단순히 욕정에 휩쓸려 그런 행동을 할 리 없었다. 뜨거운 키스가 정신없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후, 눈을 떴을 때 분명히 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 깊게 빛나던 그의 까만 눈동자를. 그 눈빛은 단지 욕정에 사로잡힌 남자의 것이 아니었다. 대체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지안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실 권도하라는 남자도 남자이지만,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자기 자신이었다. 대체 왜 그렇게 휩쓸려갈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 정말 멈출 수 없었던 것인지, 아니면 멈추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닌지.
“지안아?”
지안이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자, 지켜보던 정순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어! 네, 할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니?”
“아, 아니에요. 할머님. 아무것도.”
“녀석, 싱겁긴. 늦었다. 어서 가서 자려무나.”
“저……할머님. 그게, 저 오늘 하룻밤만 할머님이랑 같이 자면 안 될까요?”
“뭐?”
“할머님 옆에서 자고 싶어서요.”
정순은 잠시 생각하다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지안이, 친할머니 생각났구나.”
“……!”
지안은 뜨끔한 표정을 지으며,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 미안. 불효녀가 되고 싶진 않은데, 요즘 이상한 남자 때문에 좀처럼 정신이 없었어. 그래서 할머니 생각을 통 못 했어. 이 못난 손녀를 용서해 줘.’
정순은 침대 옆자리에 지안이 누울 자리를 만들어줬다. 지안은 나이트 스탠드 불을 끄면서 정순에게 인사했다.
“할머님, 좋은 꿈 꾸세요.”
“그래. 우리 지안이도 잘자.”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락함. 세상에서 가장 의지하는 정순의 옆자리에 등을 붙이고 눕자, 마음이 편안했다. 그래서일까. 불을 끈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르르 잠이 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벽녘, 문밖에서 들려온 성난 노크 소리에 잠을 깨지 않았다면. 독수공방을 거부하는 무서운 남자의 두드림이 이어지지 않았더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