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각방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2022.03.04.
“이게 무슨 소리라니?”
정순이 몸을 뒤척이며, 깊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지안은 얼른 소리가 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탕. 탕. 조금 전, 꿈속까지 비집고 들어온 굉음이 다시 문밖에서 들려왔다. 어디선가 돋보기안경을 찾아 쓴 정순이 시간을 확인하고는 눈썹 사이를 한껏 좁혔다.
“새벽 3시에 누가…….”
말을 뱉기 무섭게 이 시간에 방문을 두드릴, 가장 유력한 용의자의 얼굴이 스쳐 갔다. 설마, 도하 녀석이? 지안도 같은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침대를 내려간 지안은 얼른 문 쪽으로 다가가 낮게 뱉었다.
“누구……세요?”
얼마간의 침묵 후 문밖에서 비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 열어.”
중저음의 묵직한 울림을 지닌 목소리. 지안의 두 눈이 잠시 흔들렸다. 예상대로 그 사람이다. 성난 노크 소리의 주인공이 도하라는 게 확인되자, 지안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시간에 대체 왜…….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묻고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애써 외면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숨 쉴 수도 없이 뜨겁게 붙었던 두 입술. 그 장면에서 일시 정지된 순간. 생각에 잠긴 그녀의 귓가로 정순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안아, 도하 문 열어주렴.”
지안은 살짝 고개를 돌려 정순을 보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끼이익. 새벽이라 문 여는 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문이 열리고 그 앞에 선 커다란 남자가 보였다. 언제 봐도 크고 단단한 몸. 흐린 조명을 받아 음영이 진 얼굴은 평소보다 더 날카롭고 강해 보였다. 옆으로 길게 찢어진 눈은…….
“어.”
붉게 충혈된 그의 눈을 본 지안은 저도 모르게 짧은 신음을 흘렸다.
‘설마…… 여태껏 못 잔 건가.’
도하는 눈앞의 그녀를 집요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에선 만 가지 감정이 비쳤다. 애써 찾던 누군가를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과 안도감. 멋대로 제 품을 빠져나간 것을 질책하듯 성난 눈빛과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예고하는 짓궂음까지. 지안은 그 복잡하고 미묘한 눈빛을 오래 쳐다볼 수 없었다. 그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혀왔다. 그때 뒤에서 정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하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니? 어디 몸이 안 좋아서 깬 거야?”
정순은 손자의 몸부터 걱정했다. 그런 위급한 문제 아니고선, 꼭두새벽에 이렇게 문을 두드릴 일이 무엇일까. 하지만 도하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얘기가 흘러나왔다.
“서지안.”
“…….”
“제 아내…… 찾으러 왔습니다.”
그의 말에 지안의 두 눈이 순간 커졌다. 정순도 마찬가지였다. 커다래진 지안의 눈 속에 깊은 당혹감이 가득 찼다면, 정순의 눈 속에는 반짝이는 생기가 함께 고였다.
“그러니까, 지안이를 데리러 왔다고?”
정순이 믿기지 않는 듯 한 번 더 되물었을 때도, 도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곤 되레 물었다.
“그게…… 이상한가요?”
그 물음에 정순이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고 지안을 쓱 바라봤다. 지안은 정순의 눈과 입가에 어린 미소를 보곤 당황해서 얼른 시선을 피했다. 잠이 덜 깬 건지, 아니면 이게 다 꿈인 건지. 현실감 없는 상황에 잠시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녀를 향해 도하가 낮게 속삭였다.
“당신, 아무리 우리가 다퉜어도 그렇지. 벌써부터 각방을 쓰면 어떡하지? 부부는 싸워도 각방을 쓰면 안 된다는 말 몰라?”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지안은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정순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둘이 싸웠단 거니? 지안아, 그래서 오늘 하룻밤만 여기서 자고 간다고 한 거였어?”
“아뇨. 할머니 그게 아니고.”
지안이 아니라고 고개를 빠르게 저었지만, 도하가 말을 가로챘다.
“다툰 거 맞습니다. 이 사람이 할머니 걱정하실까 봐 자세한 얘긴 안 한 것 같네요.”
정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지안을 향해 말했다.
“그걸 알았으면 내 여기서 재우는 게 아니었는데. 지안아, 이건 도하 말이 맞다. 부부는 싸워도 절대 각방 쓰는 버릇해선 안 돼. 그럴수록 사이도 멀어지고, 나중엔 회복하기 어려워진단다.”
“……할머님, 그게 아니고요.”
지안이 해명을 해보려 입술을 뗐지만, 이번에도 도하가 조금 더 빨랐다.
“이 사람, 다신 받아 주지 마십시오. 신혼 때 각방 쓰는 버릇이 생기면…… 평생 고치기 어려울 겁니다. 싸워도, 한방을 써야죠. 모름지기 부부라면.”
앞으로의 일까지 미리 차단해 버리는 완벽한 철벽 방어. 도하의 말에 정순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그것도 모르고.”
“할머님, 그게 아니……!”
지안이 재차 해명하려는 순간, 어느 참에 코앞까지 다가온 도하가 그녀의 손목을 와락 그러잡았다.
“할머니 주무시는 거 그만 방해하고 어서 나오지, 그래.”
수면 방해는 당신이 한 거 아닌가요? 지안이 눈에 힘을 넣어 항의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러곤 새벽녘 할머니의 잠을 깨우는 불효 손자의 오명을 지우고, 효자로 신분 세탁까지 하려 했다.
“할머니, 죄송해요. 주무시는 거 깨워서.”
“……아니다.”
“저희 부부 문제로 나중에 할머니가 골머리 앓으실 걸 생각하면, 이번에 잠을 깨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 잘 생각했다. 할미는 그것도 모르고, 지안이가 친할머니 품이 그리워서 내 옆에서 자려는 줄 알았구나. 종종 그러라고 할 뻔했는데. 큰일 날 뻔했지, 뭐야.”
“……네. 앞으론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할머니도 이 사람이 또 그러면, 매몰차게 돌려보내 주십시오.”
이쯤 되니, 지안은 넋이 나가 어떤 해명도 할 기력이 없었다. 아니 한다고 해도, 믿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저, 그의 계략에 완전히 말렸다는 생각뿐이었다. 권도하. 이 사람에게 이런 꼴을 당하려고 그렇게 지극정성 간병했다는 말인가. 허탈함, 억울함, 기막힘. 복잡한 감정이 지안의 안면 위로 뒤섞여 흘렀다.
*** 병실로 돌아오고서야 도하는 꾹 붙들고 있던 지안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둘만 있게 되자, 지안도 조금 전 상황에 대해 따질 여력이 생겼다.
“방금 왜 그런 거짓말을 한 거죠? 우리가 싸우다뇨.”
지안이 차분히 따져 묻자, 도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여유롭게 말했다.
“그럼…… 스킨십을 하던 중에 아내가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다고 할 걸 그랬나.”
여과 없는 그의 말에 지안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봐요. 그건 스킨십이 아니라 사고였다고요!”
“뭐, 사고?”
“네. 사고요.”
“사고라면 더더욱 수습이 필요한 거 아닌가. 수습도 없이 사고 현장을 떠난 건 당신이야.”
“그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습이 필요한 건데요?”
“왜, 이제라도 하려고?”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신체 건강한 남자 입술에, 심장에. 마음대로 불을 질러놓고 수습도 없이 가 버리면 어쩌라는 거지?”
“……네?”
도하가 지안의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하자, 지안은 긴장한 듯 마른침을 삼켰다.
“…….”
얼어 있는 그녀를 향해 그가 다시 말했다.
“당신 때문에, 당신이 말하는 그 사고라는 것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 없잖아.”
“……!”
“그래도 당신이 옆에 있으면, 전처럼 잠이 올 것 같아서. 그래서 데리러 간 거야.”
“…….”
뜻밖의 고백에 놀란 심장이 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됐고, 늦었는데 이만 눕지.”
벙찐 얼굴로 서 있던 지안은 말없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가장 기다리고 있던 말일지도 모른다. 계속되는 놀람과 긴장 속에서 온몸이 노곤하고 무겁기만 했다. 지안은 몸을 틀어 간병인용 침대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보낸 침대가 있는 곳. 눈을 감고 걸어도 찾을 수 있을 만큼 훤한 그곳으로. 발에 모든 걸 맡기고 멍하니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갑자기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낮게 내뱉었다.
“……어!”
변치 않는 그림 속 풍경처럼, 늘 그 자리에 있던 간병인용 침대가 어쩐 일인지 보이지 않았다. 지안의 시선이 간병인용 침대가 있던 빈자리에서 그대로 도하에게로 옮겨갔다. 도하는 그녀의 눈빛을 알아차린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침대가 많이 낡았길래 내다 버리라고 했어.”
“뭐라고요?”
“이제 더는 쓸모없잖아. 나도 깨어났고, 당신도 이제 간병인이 아니라 비서가 되었으니까.”
“하지만…….”
정든 침대를 떠나보낸 아쉬움 때문인지, 잘 곳을 잃은 난감함 때문인지 지안은 잠시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도하의 목소리가 지안의 귓전을 울렸다.
“뭐해, 어서 침대로 오지 않고.”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자 그는 눈짓으로 비어있는 침대 옆자리를 가리켰다. 지안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저는 2층 게스트 룸을 쓰도록 할게요.”
그러곤 그의 대답이 듣고 싶지 않은 듯 잰걸음으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뒤통수로 단말마 같은 비명이 날아왔다.
“흡!”
남자의 둔탁하고 힘겨운 음성에 절로 고개가 돌아갔다. 돌아선 지안의 시선 끝에 한 손으로 왼쪽 가슴 쪽을 부여잡은 도하가 보였다.
“도하 씨!”
지안은 전광석화처럼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괜찮아요? 어디, 어디가 아픈 거예요?”
지안이 왼쪽 가슴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을 잡아 흔드는 순간이었다. 단숨에 지안의 가느다란 손목을 낚아챈 도하가 힘껏 제 쪽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어!”
몇 시간 전처럼 다시 가까이 붙은 두 몸. 마치 시공간이 멈춘 듯 낯선 공기가 지안의 온몸을 휘감았다. 그때 낮게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사고 수습은 마저 해야지.”
“뭐라고요? 아픈 거 아니었어요?”
“아픈 거 맞아.”
“…….”
“당신 때문에 심장이 이상해졌으니까.”
“시, 심장이요?”
도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제 가슴팍에 깊이 파묻으며 속삭였다.
“미친 듯이 뛰는 거 느껴지지?”
“……!”
“당신이 이렇게 만든 거야. 그러니까 당신이 책임져야지.”
도하는 그 말과 함께 지안의 고개를 제 가슴팍 깊숙이로 끌어안았다.
“어.”
속절없이 그의 품에 갇힌 지안은 잠시 꾹 숨을 참았다. 이상했다. 왜 권도하라는 남자에게 이토록 휩쓸리게 되는 것인지. 눈 깜짝할 사이에 또다시 그의 품에 이렇게 안겨 있었다. 게다가 그의 왼쪽 가슴에서 느껴지던 거친 심장 박동이 이제는 제 가슴에도 느껴졌다. 쿵쾅쿵쾅. 몹쓸 전염병에 감염되기라도 한 것일까.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한데, 이상하게 시야가 조금씩 흐려졌다. 자다 깬 탓인지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그의 품이 쓸데없이 포근하다는 점도 한몫했다. 이 상황에서, 이 불편한 자리에서 이토록 졸리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지안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도하는 전과 다른 느낌에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평소였다면,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을 그녀가 미동도 없이 얌전히 안겨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안정되고 고른 숨소리.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여자였다. 도하는 금세 잠든 지안의 얼굴을 깊어진 눈으로 가득 담았다. 아기처럼 잠든 얼굴이 투명하리만치 희고 맑다. 쌔근쌔근 일정하게 들려오는 숨소리는 아침에 듣는 새의 지저귐처럼 평화롭고 듣기 좋았다. 옆에서 느껴지는 은은한 향기와 따스한 온기까지. 도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생각했다. 뜻밖의 사고로 나누게 된 키스. 그 시간 이후로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던 심장이 비로소 그녀의 곁에서 조금씩 평화를 찾고 있다고. 어쩌면 자신보다 더 제 심장을 잘 컨트롤할 지도 모를 여자. 그게 바로 제 품에 고이 잠든 그녀였다. 그저 옆에 이렇게 누워 온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충만한 감정을 주는 여자. 뜨거운 키스와 함께 잠시 깃들었던 불순한 남자의 욕망조차 미안하게 만드는 사람. 아이처럼 순수하게 잠든 지안을 보며, 도하는 태어나 처음 느끼는 낯선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이 사람을, 이 작은 여자를 이렇게 꼭 안아주라고 긴 잠에서 깨어난 건 아닌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이런 마음일까. 한 여자를 좋아한다는 건……. 도하는 잠든 지안의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잘자. 서지안.”
4시가 가까워진 깊은 새벽, 그는 그제야 미뤄둔 잠을 다시 청했다. 그녀가 옆에 있으니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이 감겼던 그의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툭. 어! 묵직하게 그의 복근을 내리친 무언가. 스르륵 열린 도하의 눈에 들어온 건 지안의 팔이었다. 어느 참에 몸을 돌려 누워 잠든 그녀가 한쪽 팔을 뻗어 그의 상체를 감싸 안고 있었다. 그리고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 사이로 알아듣기 힘든 잠꼬대가 들렸다.
“할……무……니.”
그의 몸을 감고 있는 작은 팔에 꾹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