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내가 싫어?2022.03.07.
통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이 무더운 계절이었다. 지안은 자신을 덮친 후끈한 열기에 조금씩 잠이 깼다. 비로소 눈을 다 뜬 순간, 눈앞을 꽉 막은 시야에 몸이 움찔거렸다. 코앞에 벽처럼 크고 단단한 게 시야를 완전히 가로막고 있었다. 조금 더 정신을 추스르고 보자, 벽이 아니라 누군가의 널따란 몸이었다. 시신경이 깨어나자, 다른 감각들도 잇따라 기상했다. 제 몸에 바위처럼 무겁게 닿은 남자의 단단한 몸. 그리고 저 또한 그의 몸 위에 팔과 다리를 올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리기까지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60cm가 조금 넘는 아담한 몸과 185cm가 거뜬히 넘는 장대한 몸이 꽈배기처럼 서로에게 감겨 있었다. 서로의 가슴이, 갈비뼈가, 온몸이 구석구석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완벽히 밀착된 상태였다. 이게…… 대체……. 초점을 잃은 지안의 눈동자가 좌우로 위태롭게 떨렸다. 그렇다고 마음대로 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정교하게 엉킨 몸 때문에 조금만 움직여도 느낌이 전해져 그가 깨어날지 몰랐다. 이 상태로 그가 눈을 뜨면, 그건 정말 최악이다. 지안은 잠든 도하의 얼굴을 힐끗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아직 깨면 절대 안 돼.’
지난 3년간 매일같이 먹었던 마음과 완전히 배치되는 마음이었다. 3년간 지안은 기약 없이 잠든 그를 보며, 딱 한 번만 눈을 떠주면 안 되겠냐고 수없이 말을 걸었었다. 하지만 그 간절한 기도가 무색하게, 지금 이렇게 그를 향해 아직 눈 뜨지 말라고, 제발 그래 달라고 기도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던 지안은 다시금 도하의 얼굴을 지그시 눈에 담았다. 3년 동안 지겹도록 본 얼굴인데, 이상하게 잠든 그의 얼굴이 낯설기만 하다.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처럼. 지안은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지난 3년간 그녀가 곁을 지켰던 도하는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 눈을 마주칠 수 없고, 목소리조차 들을 수 없는. 그저 한자리에 그대로 있는 나무 같은 존재였다. 그를 잘 안다고 했지만, 그녀가 아는 건 혈압이나 체온, 맥박 같은 수치였을 뿐, 진짜 권도하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가 눈을 떠 매섭게 저를 바라봐주었고, 냉랭한 목소리일지언정, 소리 내 이름을 불러주었다. 함께 밥을 먹고, 나란히 정원을 거닐 수도 있었다. 이제야 비로소 껍데기가 아닌 진짜 권도하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눈앞의 남자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게다가…… 어젯밤엔……. 지난밤 뜨겁게 젖어 들었던 두 입술. 불의의 사고를 떠올리던 지안의 두 뺨에 뜨거운 홍조가 올라왔다. 짙은 눈썹, 길게 찢어져 예리한 눈매, 베일 듯 날카로운 콧날과 그 아래로 붉은 기가 도는 도톰한 입술까지. 지안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저 바라본 것뿐인데,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지안은 몸의 낯선 반응에 잠시 당황해 저도 모르게 몸을 뒤척였다. 그 순간이었다. 도하의 얼굴에 미세한 떨림이 일더니 이윽고 그가 눈을 떴다. 기다란 눈꺼풀이 조금씩 열리더니 그 안에 감춰져 있던 새까만 눈동자가 그녀를 가득 담았다.
“……!”
우려했던 일이 기어코 벌어지자 지안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르고, 지안이 태연한 척 먼저 말을 걸었다.
“……일어났어요?”
“…….”
도하는 아무 대꾸 없이 그저 무감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말을 할 때보다 지금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그저 말없이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가 더 무서운 남자. 지안은 지금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었다. 저를 지그시 보고 있는 시선이,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이 어색한 공기가, 무엇보다 여전히 엉켜있는 두 몸이 못 견디게 불편했다. 더는 이대로 있을 수가 없었다. 지안은 실타래처럼 얽힌 몸을 먼저 풀어보기로 했다. 그의 몸에 얹어진 제 다리와 팔을 차근차근 아래로 내렸다. 이제 그도 똑같이 해주면 된다. 그럼 이 민망하고 낯 뜨거운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셈이었다.
“저기요…… 이것 좀.”
지안은 도하를 향해 제 몸에 감긴 커다란 팔과 다리를 풀어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지안이 다시 한번 말했다.
“이것 좀 풀어주시라고요.”
“…….”
여전한 침묵. 잠이 덜 깬 건가. 그건 아닌데. 초점이 또렷한 눈동자가 저를 이렇게 뚫어지게 보고 있지 않은가. 지안이 생각에 잠겨 연신 눈을 깜빡이던 그때였다. 터억. 그녀의 등 뒤에 감겨 있던 그의 단단한 팔이, 한없이 작은 몸을 거칠게 끌어안아 제 가슴팍에 깊이 붙였다. 지안의 고개가 홀연히 도하의 가슴팍에 파묻혔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깊은 곳에 갇힌 그녀의 목소리가 뭉툭하게 울렸다. 도하는 다른 팔로 그녀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받혀선 제 가슴에 더 깊이 붙였다.
“이봐요! 권도하 씨!”
깊은 곳에서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그저 작은 울림에 불과했다. 지안을 품에 꼭 안은 도하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팔다리 풀어주면 또 마음대로 도망치려고?”
“…….”
“먼저 저질러 놓고 도망치는 게 당신 특기인가.”
“……이봐요, 숨 막힌다고요.”
“내 몸에 먼저 팔을 감고, 다리를 올린 건 당신이야.”
“……!
“이번에는 당신이 한번 당해 봐.”
지안을 품에 가득 안은 도하의 안면으로 해사한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 조금 전, 강 박사의 노크 소리가 울리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도 그 무서운 벌이 현재 진행 중일지 모른다. 지안의 얼굴은 여전히 뜨거운 열기로 얼룩져 있었다. 터질 듯 요동치던 심장은 비교적 가라앉았지만, 맥은 여전히 널을 뛰는 중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침대 위에서의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각종 약물과 치료제 때문에 도하의 몸에서는 늘 병원 냄새가 났었다. 하지만 조금 전 그의 품에 고개를 묻었을 때, 그에게선 처음 맡는 낯선 향기가 났다. 향수라고 하기에는 전혀 인위적이지 않은 내음. 은은하면서 묵직하게 파고드는 향은 오히려 타고난 살 냄새에 가까웠다. 어쩌면 건강하던 시절 그에게서 나던 본연의 체향은 아닐지. 맡을수록 자꾸만 깊이 들이마시고픈 욕구가 들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그의 가슴팍에 갇힌 상태에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다, 그 향기 덕분이었다. 지안의 코끝에선 여전히 도하의 향기가 돌고 있었다. 멍한 그녀의 귓가로 강 박사의 음성이 들려왔다.
“괜찮으세요? 얼굴이 많이 상기돼 보이는데.”
늘 도하의 건강을 걱정하던 강 박사의 시선이 이번엔 저를 향하자 지안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네? 저 말씀이세요?”
“네. 도련님은 오늘 안색이 아주 좋아 보이시는데, 지안 씨 아니 사모님 낯빛은…….”
지안은 쓱 도하의 얼굴을 살폈다. 강 박사의 말마따나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더 여유롭고 생기 있어 보였다. 간병인으로서는 반가운 일이었지만, 여자 서지안으로선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번진 생기와 여유가, 조금 전 제 것을 모두 잡아먹어 배가 되었다는 걸 알기에. 강 박사가 다시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저한테 자문할 게 있으시다고 전화 주셨죠?”
자문? 지안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새벽녘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한 남자 때문에, 아침부터 혼을 쏙 빼놓는 사람 때문에 겨우 어제 일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골똘히 생각하던 지안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가 강 박사에게 자문을 부탁한 건, 계약서 때문이었다. 일상에 정상적으로 복귀하게 되면, 관계를 청산해주겠다던 그의 말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육안상으로는 이미 정상인이나 다름없는 그가, 언제쯤이면 완전히 회복될지 강 박사의 의견을 듣고 싶었다. 그리하여 계약서에 대략적인 계약 기간을 기재하는 게 그녀의 목표였다. 그렇지 않으면, 어쩌면 오래도록,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었기에. 지안은 기다리고 있는 강 박사를 향해 말했다.
“남편 건강 관련해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말씀하시죠.”
지안은 고개를 돌려 도하를 잠깐 응시한 뒤 말을 이었다.
“도하 씨, 그러니까 저희 남편. 언제쯤이면 사고 전 몸 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아직은 주의해야 하는 단계라고 하셨잖아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가만히 주시하고 있던 도하의 눈이 순간 흔들렸다. 그 또한 잠시 잊고 있었던 얘기였다.
‘계약서를 써 주세요. 계약 기간과 내용이 정확히 들어간 정식 계약서 말이에요.’
당돌하게 외치던 목소리가 도하의 귓가에 되살아났다. 지안의 이야기에 당황한 건 강 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의사로서 가장 난감한 질문을 받은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글쎄요.”
강 박사는 곤란한 질문에 잠시 생각이 많아진 얼굴이었다. 지안은 그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듯 덧붙였다.
“저도 잘 알아요. 건강 회복이라는 게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거. 그리고 여러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는 거. 그렇지만 대략적인, 통계학적인 기간은 있을 것 같아서요.”
그녀의 말에 강 박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확실히 언제라고 장담할 순 없지만, 통계학적인 접근은 가능하지요.”
그의 말에 옆에서 방관하듯 듣고 있던 도하의 눈이 순간 진지해졌다.
“지금 도련님의 상태로 봐서는…….”
강 박사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차트를 바삐 넘겼다. 그리고 한참 뒤 말했다.
“아직 젊고, 재활 경과도 좋고. 적어도 두 달 안에는 사고 이전 몸 상태로 완전히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예상해 봅니다.”
‘두 달’이라는 말에 지안의 안면 위로 짙은 화색이 번졌다. 같은 이야기를 들은 도하의 얼굴에는 그녀와 반대로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
“그래도 언제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 늘 주의하고 몸 상태를 체크하셔야 합니다.”
강 박사가 돌아가고, 지안은 한결 밝아진 얼굴로 떠들었다.
“이봐요. 제 이야기 듣고 있어요? 일단 제가 계약서 초안을 작성해 볼 테니…….”
도하가 그녀의 말허리를 싹둑 자르며 뱉었다
“그렇게 끝내고 싶은 건가.”
순간 지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어서 빨리 관계를 청산하고 싶어 안달이 난 거냐고!”
냉기가 흐르는 목소리에 지안은 목구멍이 콱 막혔다. 집요한 시선이 대답을 내놓으라며, 날카로운 빛을 쏟아내자 그녀는 입술을 뗄 수밖에 없었다.
“……그건 이미 다 말씀드린 거로 아는데요.”
그 순간 무섭게 날아온 물음.
“내가 싫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지안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대답해, 서지안. 당신은 내가 싫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