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엉큼한 해석2022.03.11.
좋다 혹은 싫다. 호불호에 관해 답하는 건, 그리 어려운 게 아니었다. 지안은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비 오는 날보다 해가 쨍한 날을 좋아하는 사람, TV보다 라디오를 좋아하는 아날로그 감성, 민트향이 나는 아이스크림을 사랑하는 사람, 탕수육 위에 소스를 붓기보다 찍어 먹는 걸 좋아하는 사람, 바다보다 산을 더 좋아하는 사람. 화려한 히어로 영화보다 흑백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 그리고 권도하를……. 저에 대해 술술 말할 수 있고, 좋고 싫음이 누구보다 확실하던 지안은 누군가의 이름 앞에서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그 순간 다시 그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답해, 내가 싫은 건가? 그런 거야?”
도하의 굳은 얼굴에선 지금 이 자리에서 반드시 대답을 듣고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지안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권도하…… 나는 그를 싫어한……아니 좋아…… 그것도 아니. 그제야 세상에 호불호로 나눌 수 없는 마음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도하를 바라보는 그녀 자신의 마음이었다. 그를 싫어하냐고? 싫어하는 사람의 곁을 어떻게 3년간이나 지킬 수 있을까. 본능적으로 그가 싫었다면 그리 오래 곁에 있지 못했을 거다. 그럼 좋아하냐고? 깨어난 순간부터 얼음장처럼 차갑던 말과 행동, 단숨에 저를 제압해버리는 위압적인 분위기. 그의 앞에만 서면 그녀는 평소의 반의반도 제 주장을 펼치지 못했다. 그저 호흡이 가빠지고, 입술이 바짝 얼어붙었다. 그의 앞에선 모든 게 버거워 계속 벗어나고 싶었다. 그와 함께하는 날이 쌓여갈수록, 특히 말도 안 되는 스킨십을 나눈 후부터는 그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힘들어졌다. 저만치 멀리에 있는 그를 발견하기만 해도 심장이 쿵 떨어지고, 온몸이 긴장 상태에 돌입했다. 마치 부품이 고장 난 기계처럼 자꾸만 버벅대는 자신을 발견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낯선 제 모습이 지안은 시간이 지나도 적응되지 않았다. 방법이 없었다. 하루라도 빨리 그의 곁을 떠나는 수밖에는. 골똘해진 지안은 오래 지나지 않아 자신의 감정에 가장 비슷한 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자, 도하가 눈을 맞추며 어서 대답해보라는 눈빛을 보냈다. 지안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저는…….”
“…….”
도하는 그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그녀의 분홍빛 입술을 주시했다.
“그러니까 전, 권도하 씨가…… 그냥 불편해요.”
“……!”
좋다 혹은 싫다. 이지선다형. 두 가지 중 하나의 말이 채택될 줄 알았다. 그녀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오자, 도하는 적잖게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크게 안도했다. 제 곁을 떠나기 위해 벼르고 있는 그녀를 보며, 파도처럼 일렁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대책 없이 뱉은 말이었다. 자신이 싫은 거냐고. 그녀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당신이 싫다는 차가운 대답을 듣게 될까 봐. 하지만 적어도 최악의 대답은 피했다. 불편하다라. 자신이 편하지 않다는 건, 조금씩 편하게 만들면 해결될 문제였다. 적어도 ‘싫다’라는 차단의 말보다는 백 배 나았다. 긴장이 배어나 뒤틀렸던 입꼬리가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갈 즈음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내가 싫은 건 아니란 얘기군.”
“……!”
그의 말에 지안의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높이 치솟았다. 불편하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고, 싫진 않다는 얘기로 받아들이는 이 남자는 대체 뭐지……. 이래서 권도하, 당신이 불편하다는 겁니다! 지안이 속으로 외치던 그때, 도하가 쐐기를 박듯 내뱉었다.
“싫은 게 아니면 됐어.”
“……뭐라고요?”
“그걸로 충분하다고.”
“네?”
“좋아하게 만드는 건 내 몫이니까.”
“…….”
도하의 말에 지안은 어안이 벙벙했다. 이 남자, 대체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나도 알아먹을 수 없어서 불편하고 또 불편하다. 이상한 이야기의 향연 속에서 잠시 잊을 뻔한 게 있었다. 지안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말했다.
“아까 하던 계약서 이야기나 마저 하시죠.”
2개월 동안 그의 곁을 지키면, 이제 모든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계약서. 그녀의 말에 도하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그 계약서 따윈 관심 없어.”
“저기요!”
“하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그렇다면 써주지. 원하는 걸 해줘야 날 조금은 더 좋아해 줄 거 아냐?”
“네? 대체 지금 무슨 말을…….”
“어차피 곧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로 전락하겠지만, 당신이 원하니까 기꺼이 해주겠다고.”
“……!”
계약서가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가 될 거라니. 그는 대체 무슨 근거로, 무슨 자신감으로 이러는 걸까. 지안은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졌다. 왠지 맥이 풀리고, 벌써부터 김이 새는 느낌이었다.
*** 점심 식사 후 정순은 도하를 정원으로 불렀다. 3년간 볕을 쬐지 못했으니, 이제라도 충전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그건 도하를 따로 불러낼 작은 구실에 불과했다. 정순과 도하는 아름드리나무 아래 벤치로 가 나란히 앉았다. 정순은 전보다 훨씬 더 생기가 돋아난 손자의 얼굴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조심스레 말했다.
“도하야.”
“……네.”
“어제 말이다. 지안이랑 대체 무슨 일로 다툰 거니?”
생각지 못한 질문에 도하는 조금 당황했지만 크게 표를 내진 않았다. 새벽녘에 그런 소동을 벌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냥 조금 사소한 문제로…….”
그가 두루뭉술하게 말을 흐리자, 정순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원래 처음엔 다 그렇단다. 큰일로 싸우는 건 별로 없어. 다 별거 아닌 거로 싸우지. 남자와 여자는 사소한 것 하나부터 다른 점 투성이야. 그러니 부딪힐 수밖에 없고.”
“…….”
“게다가 도하 넌, 여자 마음에 대해 잘 모르잖니.”
정순의 말에 도하의 눈이 사뭇 빛났다. 여자의 마음? 그러고 보면, 살면서 딱히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그에게 여자란, 가만히 있어도 늘 먼저 다가와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래서 그가 따로 여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공부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골똘해진 도하를 보며 정순은 말을 이었다.
“여자의 마음은, 남자들처럼 절대 단순하지 않단다. 매우 복잡하고 어렵지. 그러니까 조금 더 섬세하게, 넓은 마음으로 다가가야 한단다.”
그 말을 하는 정순의 눈에 깊은 염려가 묻어났다. 무뚝뚝하고 까칠한 손자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세상에서 가장 아끼는 두 사람이 서로를 잘 보듬을 수 있을지. 누구보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지안이 마음을 모르겠거나 어려울 땐, 이 할미한테 물어보렴. 이 할미가 소싯적엔 연애 상담 박사로 통했으니까.”
정순의 말에 도하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뱉었다.
“제가 뭐 사춘기 소년도 아니고…….”
그 말을 채 마치기 전에 잠시 잊고 있던 목소리가 도하의 귓가를 흔들었다.
‘그러니까, 전 권도하 씨가…… 그냥 불편해요.’
저를 불편하다고 말하는 여자. 그런 여자를 대체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불편하지 않은 존재가 될 수 있을지. 그녀도 저와 같은 마음이 될 수 있을지. 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했지만,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막막했다. 도하는 잠시 생각하다가 천천히 운을 띄웠다.
“할머니, 사실 저 다른 고민이 하나 있습니다만…….”
“……고민?”
도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 보렴. 이 할머니가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정순의 눈동자가 한결 진지해졌다. 도하는 최대한 건조한 말투로 뱉었다.
“제가 이제 회사로 돌아가면, 직원들이 저를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회사에 이미 죽은 사람처럼 각인되어 있을 텐데.”
지안이 저를 불편해한단 얘기를 하기가 멋쩍어 애먼 직원들 핑계를 댔다. 도하는 자신이 이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평소 말도 없고 무뚝뚝해서 거짓말은커녕, 있는 사실도 잘 이야기하지 않던 그였다.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길 꾸며 천연덕스럽게 뱉고 있다니. 3년간의 긴 병상 생활에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강 박사는 왜 이런 후유증에 대해 미리 경고하지 않았던 걸까. 도하의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주던 정순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직원들이 너를 불편하게 생각할까 봐, 그게 걱정이란 거지?”
“……네.”
“그건 말이다, 도하야.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나아지는 부분도 있을 테고, 네가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부분도 있을 거야.”
“……노력이요?”
도하의 까만 눈동자가 크게 빛났다.
“그래. 네가 대표의 권위를 내려놓고, 직원들과 살로 부대끼며 어울리면 불편함 같은 건 금세 가실 거란 얘기지.”
“……살로 부대낀다는 건 어떤?”
“직원들과 그만큼 가까이 지낸다는 거지. 예를 들자면, 직원 단합 체육대회를 열고, 네가 거기에 함께 한다든가 하는.”
“……아.”
“어떻게든 그들과 자주 보고, 자주 살을 부대끼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까워져 있을 거야. 언제 불편했었나 싶을 정도로.”
정순의 말을 듣던 도하의 눈동자에 사뭇 진지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런 그의 귓가로 정순이 나직이 속삭였다.
“보기 좋구나.”
“……네?”
“우리 도하가 건강하게 깨어나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게.”
도하는 엷게 웃으며 먼 곳을 바라봤다. 그때 벤치 뒤편, 저택 쪽에서 메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점심 약 준비해 놓았습니다.”
도하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정순을 봤다.
“벌써 약을 챙겨야 할 시간이네요.”
그의 말에 정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먼저 들어가 보려무나. 난 조금만 더 볕을 쬐다 들어갈 테니.”
“네. 할머니.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도하는 정순을 향해 꾸벅 인사하고는 유유히 정원을 빠져나갔다. 정순은 그런 손자의 뒷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리고 그가 멀어지자, 낮게 혼잣말을 뱉었다.
“녀석. 회사 핑계는. 천하의 권도하가 직원들이 불편해할 걸 걱정한다고?”
정순은 하나뿐인 손자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 크게 파안대소했다.
“누가 저를 불편해한대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녀석이. 거짓말은. 도하 녀석, 우리 지안이가 몹시 신경 쓰이나 보구나.”
*** 병실로 돌아온 도하는 점심 약을 먹고 잠시 소파에 기대앉았다. 계약서 초안을 작성하러 간 지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하루라도 빨리 제 곁을 떠나고 싶은지, 떠날 날을 못박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가 야속하기만 했다. 남의 가슴 속에는 걷잡을 수 없는 불을 질러 놓고. 얼굴을 떠올리고, 목소리를 생각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심장이 미친 듯 뛰는데. 난생처음 겪는 이상 증세에 허덕이는 환자를 두고, 이렇게 무심히 떠나려 하는 간병인이라니. 3년을 내리 정성으로 간병한 그녀가 맞나 싶었다. 그는 잠시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꾹 감았다. 머릿속으로 조금 전 정순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둥둥 떠다녔다.
‘어떻게든 그들과 자주 보고, 자주 살을 부대끼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가까워져 있을 거야. 언제 불편했나 싶을 정도로.’
‘직원’이라고 했던 거짓말에 ‘서지안’을 대입해보면…….
‘어떻게든 그녀와 자주 보고, 자주 살을 부대끼다 보면 어느새 가까워져 있을 거다. 언제 불편했나 싶을 정도로.’
자주 보고, 자주 살을 부대끼다 보면……? 남녀 사이에 살의 부대낌이라면……! 무언가를 떠올린 도하의 얼굴 위로 붉은빛의 달뜬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