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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입술을 조심해 (32/110)

32화. 입술을 조심해2022.03.21.

세단 뒷좌석에 탄 정순의 입가에 해사한 미소가 번졌다.

16548869589189.png‘녀석들, 예뻐 죽겠단 말이지.’

서로에게 조금씩 스며들던 분홍빛 뺨과 떨림이 가시지 않던 눈동자. 생각보다 더 잘 지내주는 손자 내외를 보며 정순은 더 바랄 게 없었다.

16548869589189.png‘그저 지금처럼만, 그렇게 살아주렴. 도하야, 지안아.’

정순은 마치 자신이 사랑에 빠진 꽃띠인 양 웃음을 달고 다녔다. 동양화 갤러리에서 만난 D그룹 도 회장이 정순을 보고 말했다.

16548869589196.jpg“황 회장님,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16548869589189.png“……좋지 않은 일을 꼽는 게 오히려 더 빠르겠습니다. 하하.”

도 회장은 3년간 웃음을 잃었던 황 회장이 다시 밝아진 것이 반가웠다. 다소 딱딱하던 그룹 오너 모임 자리를 유쾌하게 만들어주던 홍일점. 도 회장은 잘 알고 있었다. 웃는 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울상이던 정순이 다시 웃기 시작한 게 모두 도하 때문이라는 것을. 그리고 저번 모임에서 도하의 아내를 보고 정순의 웃음이 전의 두 배가 된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도 회장은 조심스레 물었다.

16548869589196.jpg“권 대표 내외 덕분이죠?”

정순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16548869589189.png“네. 녀석들이 얼마나 예쁜지. 도 회장님도 어서 결혼시키세요. 기쁨이 배가 된답니다.”

16548869589196.jpg“어디 자식이 내 뜻대로 돼야 말이죠. 큰놈은 미국에서 혼자 조용히 살겠다고 하고, 우리 공주, 아니 딸내미는 뭐라더라, 비혼주의자가 되겠다네요.”

도 회장의 푸념에 정순은 세상을 20년 이상 더 산 선배의 입장으로 말했다.

16548869589189.png“제 짝이 나타나면 달라질지도 모르죠. 우리 도하도 이런 결혼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제 짝이 나타나니 어떻게든 이루어지게 되더라 이 말입니다.”

도 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6548869589196.jpg“저도 그래서 우리 애들 짝을 한번 물색해 볼까 합니다.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을 순 없잖습니까?”

16548869589189.png“……그럼요. 저도 우리 지안이 찾아가서 부탁하고, 발로 뛴 시절이 있었답니다.”

16548869589196.jpg“그래서 말인데…… 황 회장님이 보시기에 CTM 지세준 대표 어떻습니까? 우리 딸아이랑 한번 만남을 추진해보고 싶은데 말이죠.”

도 회장의 입에서 세준의 이름이 나오자, 정순의 만면에 가득 찼던 웃음기가 싹 가셨다.

16548869589196.jpg“듣기로, 지세준 대표를 어릴 때부터 보신 분이 황 회장님이시라던데요.”

16548869589189.png“…….”

정순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자, 도 회장은 의아한 듯 눈을 크게 떴다.

16548869589196.jpg“사업적으로는 훌륭하다는 것도 알겠고, 만났을 때 깍듯한 것도 알겠는데, 딸아이를 소개해도 될 만큼 된 사람인가 궁금해서요.”

정순은 잠시 고민했다. 남의 험담을 하거나, 안 좋은 이야기를 하는 건 그녀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가기엔 도 회장과 그의 딸이 걱정되었다. 정순은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16548869589189.png“지세준 대표,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 하던가요?”

16548869589196.jpg“예. 안 그래도 어젯밤에 와인을 같이 하면서 물어봤더니, 일에 몰두하느라 여자친구 사귈 시간조차 없다고 하더군요.”

16548869589189.png“……!”

16548869589196.jpg“아, 결혼까지 생각한 친구가 있긴 했는데, 지 대표가 너무 바빠져서 헤어졌다고 얼핏 그랬던 것 같기도 하네요.”

정순이 아는 것과 달랐다. 세준과 하린이 너무 괘씸하여 정순은 비서를 통해 둘의 소식을 종종 전해 듣고 있었다. 조용히 약혼식을 올린 것이 얼마 안 되었고, 머지않아 결혼식을 올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도하가 깨어난 후로도 미리 마련한 신혼집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이야기도. 그런 세준에게 애인이 없다고?

16548869589189.png“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한번 잘 알아보십시오.”

내내 웃던 정순이 표정을 차게 굳히고 정색하듯 말하자, 도 회장은 왠지 모를 촉을 느꼈다.

16548869589196.jpg“지세준 대표…… 제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른가 보지요?”

16548869589189.png“…….”

정순은 이번에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때론 말보다 침묵이 더 강한 대답이 되곤 했다. 그래도 이 얘기만은 꼭 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동안 도 회장과 쌓아온 친분을 생각하면, 그가 위험한 길을 가게 방관할 수 없었다.

16548869589189.png“도 회장님.”

16548869589196.jpg“……예. 회장님.”

16548869589189.png“도 회장님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16548869589196.jpg“……무얼 말이죠?”

16548869589189.png“도 회장님 죽마고우가 3년간 의식불명으로 누워 있는데, 하필 그때 도 회장님 사업이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겁니다. 그럼 병문안 같은 건 아무래도 어렵겠지요?”

정순의 뼈 있는 질문에 도 회장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16548869589196.jpg“아무리 바빠도 잠은 자고, 밥은 먹고 하잖습니까. 잠자는 시간을 조금 아껴서든, 밥을 굶든 해서라도 잠깐 잠깐씩 들여다봤겠죠. 다른 친구도 아니고 죽마고우라면.”

16548869589189.png“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16548869589196.jpg“…….”

16548869589189.png“죽마고우에게 애인이 하나 있었답니다. 남자친구가 하루아침에 의식불명이 되니, 많이 무섭고 두려웠겠죠. 기댈 사람이 필요해, 애인의 친구에게 잠시 기댔답니다. 그럴 때, 도 회장님은 죽마고우의 애인을 제 여자로 품겠습니까?”

두 가지 질문 속에 상상도 못 한 스토리가 담겨 있었다.

16548869589189.png“사람의 진가는 밝은 빛 가운데 나오는 게 아니라, 어둠 속에 있을 때 나오는 겁니다. 잘 살펴보십시오. 제가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정순은 비장한 목소리를 마감하며, 저만치 앞에 보이는 그림을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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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음 날, 아침. 지안은 며칠 전에 산 오피스룩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드디어 찾아온 첫 출근의 날. 계약 기간을 생각하면, 두 달 조금 안 되게 회사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인턴십보다도 짧은 기간. 그녀에겐 오늘이 인생 첫 출근이었다. 평소 긴장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다는 생각에 잠을 조금 설쳤다. 거울 속 제 모습을 보던 지안의 입가로 은은한 미소가 번졌다. 스물여덟. 또래들처럼 취업해 정상적인 회사 생활을 했더라면, 제법 커리어 우먼의 멋이 묻어날 나이였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옷 덕분인지, 제게도 제법 지적인 커리어 우먼의 느낌이 났다. 지안은 그게 싫지 않은 듯 싱긋 웃으며 휴대폰을 꺼냈다. 이 모습을 꼭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지안은 휴대폰 사진첩을 열어 친할머니의 사진을 불러왔다. 돌아가실 때보다 좀 젊었을 적의 할머니 얼굴이 화면에 가득 찼다. 어린 지안이 매일같이 보고 사랑하던 그 얼굴이. 지안은 사진 속 할머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16548869672762.jpg“할머니, 나 할머니 소원대로 출근하게 됐어. 어때? 제법 회사원 티가 나지?”

할머니는 또래들이 취업을 준비하고, 회사에 나갈 나이에 지안이 간병하느라 제 곁에 붙어 있는 걸 늘 미안해했었다. 그래서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16548869589196.jpg‘지안아, 할미는 괜찮으니까 너도 얼른 취업해서 네 인생을 좀 살아보렴.’

하지만 그때의 지안은 상상할 수 없었다. 할머니가 없는 제 인생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남보다 조금 늦더라도, 곁을 지키고 싶었다. 취업은 마음먹으면 언제든 도전할 수 있지만, 할머니는 마음먹는다고 언제든 곁에 있어 주는 게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지안은 화면 속 할머니의 얼굴을 손으로 가만히 쓸어내리며 속삭였다.

16548869672762.jpg“할머니, 할머니 강아지. 첫 출근 잘하고 올게. 하늘나라에서 꼭 지켜봐 줘요.”

그러곤 화장대 위 시계를 봤다. 8시 30분. 출근 시간 교통체증을 생각하면 서둘러야 할 시간이었다. 지안이 급하게 문 쪽으로 걸어가 방문을 여는 순간.

16548869672762.jpg“……!”

바로 문 앞에 비딱하게 서 있는 도하가 보였다. 어제 미리보기처럼 봤지만, 다시 봐도 여전히 우월한 그의 슈트 핏. 게다가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이마를 드러내자, 이전과 완전히 다른 느낌이 났다. 평소보다 훨씬 더 차갑고, 강해 보였고, 또…… 조금 아니, 조금 많이 섹시했다. 지안이 그의 모습에 압도된 듯 굳어 있는 동안, 그도 지안의 모습을 말없이 눈에 담았다. 백화점에서 이미 오피스룩을 입은 그녀를 봤지만, 오늘은 또 달랐다. 아마도 메이크업 때문인 듯했다. 도하가 뚫어지게 바라보자, 지안은 민망한 듯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 순간 원래도 긴 속눈썹이 더 길어진 건지, 한껏 깊어진 눈매가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음영이 들어간 눈화장과 은은한 볼 터치. 촉촉하게 물든 입술까지. 그녀가 메이크업한 얼굴을 본 적 없기에, 막연히 화장을 안 한 맨얼굴이 더 아름다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낯선 모습에 잠시 머릿속에 버퍼링이 걸렸다. 우위를 정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한참 후, 버퍼링이 풀리고 나서야 비로소 정답을 찾았다. 화장을 해서 또는 안 해서 예쁜 게 아니라, 그냥 원래 서지안 자체가 예쁜 거라고. 다만 하나 걸리는 게 있었다. 도하는 그녀의 앞으로 말없이 다가섰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갔다. 그가 또다시 몸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바짝 붙어 서자, 지안은 온몸이 경직됐다.

16548869672762.jpg“왜…… 왜 그러세요?”

그녀가 굳은 채 버벅거리자, 도하는 픽 웃으며 한쪽 손을 그녀의 얼굴을 향해 올렸다. 그러곤 엄지손가락을 세워 그녀의 붉은 입술로 가져갔다. 아까부터 앵두처럼 싱그러운 입술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원래도 보기 좋게 도톰하고 사랑스러운 입술이지만, 립스틱을 발라 그 존재가 더 부각됐다. 이대로 회사에 가면, 속이 시꺼먼 남자 직원들이 그녀의 입술만 볼 것 같았다. 차라리 눈이나 코를 본다면 몰라도, 입술을 보는 건 참을 수 없다. 아니 정정. 눈이나 코를 보는 것도 그냥 다 싫다. 도하는 그 생각을 하며 엄지로 그녀의 입술을 쓱 문질렀다.

16548869672762.jpg“……!”

간지러우면서 야릇한 느낌. 정수리 끝에서 시작된 찌릿한 느낌이 순식간에 발끝까지 흘러내렸다. 마치 전기가 통한 것처럼. 이건 무슨 상황이지. 지안은 그의 손에 묻어난 붉은 립스틱의 흔적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만져본 게 아니라, 힘주어 닦아낸 게 분명했다. 립스틱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케이원 그룹은 직원들의 메이크업에 엄격한 편인가. 아니야, 21세기에 그런 회사가 있을 리가. 지안은 혹시나 해 눈을 분주히 움직여 주변을 살폈다. 저 모르게 정순이 어디서 보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접촉, 이런 낯선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도하가 낮게 뱉었다.

16548869672787.png“업무 방해는 미연에 방지하자고.”

16548869672762.jpg“……업무 방해요?”

16548869672787.png“미리 경고하지.”

16548869672762.jpg“……네?”

16548869672787.png“그 입술, 조심해.”

16548869672762.jpg“입술이…… 왜.”

16548869672787.png“내 눈에 너무 띄지 않게 조심하라고."

16548869672762.jpg“……!”

16548869672787.png“손이 아니라, 다른 거로 지워버리고 싶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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