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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전지현은 아니지만 (33/110)

33화. 전지현은 아니지만2022.03.25.

빌딩 숲 사이에서도 가장 높고 웅장한 유리 벽 건물. 그 위에 ‘케이원’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지안은 차창 너머로 보이는 고고한 회사 외관이 마치 도하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지난 3년간 서너 번 정도, 정순의 부탁을 받고 온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회사를 눈에 담은 적은 없었다. 앞으로 출근할 곳이라고 생각해서일까, 느낌이 전과 많이 달랐다. 도하는 차창에 달라붙어 회사를 구경하는 지안을 보곤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이 마치 처음 서울 구경에 나선 시골아이처럼 말갛고 순수해 보였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보다 보니 문득 미안한 감정이 몰려왔다. 여느 또래들처럼 한창 사회생활을 할 나이에, 3년이나 답답한 병실에 갇혀 있었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여러 핑계로 그녀를 여기까지 이끌었지만, 이곳에서의 생활이 그녀에게 새로운 활력이 되길, 인생의 값진 경험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때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에 도하의 눈이 잠시 커졌다. [오랜 기간 직장 내 괴롭힘을 당하던 20대 여성이 서울 중구에 위치한 사옥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도하는 안타까운 소식에 이마가 절로 구겨졌다. 요새 비슷한 소식이 자주 들려온다는 걸 깨닫고선 걱정이 깊어졌다. 한 회사를 책임지는 경영인으로서 당연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바로 옆자리에 회사 생활의 고단함을 아직 모르는 출근 1일 차 병아리가 함께 있는 터라, 더 그랬다. 도하는 한참을 생각하다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16548869775597.png“서지안.”

지안은 창가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도하 쪽으로 슬며시 돌렸다.

16548869775602.jpg“……네?”

16548869775597.png“혹시, 혹시라도 말이지.”

16548869775602.jpg“…….”

16548869775597.png“회사에서 누가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면 나한테 바로 얘기하도록 해.”

지안은 심각해진 도하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16548869775602.jpg“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잘할 테니까.”

뭘 알아서 잘하겠다는 건지. 도하는 사안의 심각함을 모르는 그녀가 답답했다.

16548869775597.png“알아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게, 한 사람을 완전히 무력하게 만드는…….”

그때 지안의 목소리가 도하의 목소리를 뚫고 들어왔다.

16548869775602.jpg“직장은 아니지만, 학교에서 많이 겪어봤거든요.”

16548869775597.png“……!”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도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놀라 커진 그의 두 눈이 하염없이 흔들렸다. 그런 고백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할 줄이야. 차 안으로 갑자기 정적이 흐르자, 지안은 몇 마디 말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16548869775602.jpg“그런 표정으로 보지 말아요. 그런 표정 지으라고 한 얘긴 아니니까.”

16548869775597.png“…….”

16548869775602.jpg“할머니 손에 자란 건 권도하 씨나 저나 마찬가지이지만. 그쪽은 부르주아고, 저는 서민 중에서도 완전 하층 서민이잖아요. 아이들이라고 모르는 게 아니더라고요. 애들 주제에 가난의 흔적을 얼마나 기똥차게 찾아내는지. 학년 올라갈 때마다 따돌림은 그냥 우유 당번처럼 늘 제 담당이었어요.”

아무렇지 않게, 심지어 엷은 미소까지 지으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도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픈 기억을 아무렇지 않게 말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이었을지. 태연한 목소리가, 구김 하나 없는 얼굴이 더 안쓰러웠다. 도하가 생각에 잠긴 사이, 지안이 뭔가 생각난 듯 목청을 키워 말했다.

16548869775602.jpg“회사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저는 딱 한 사람만 조심하면 될 것 같아요.”

그녀가 대상을 특정해 말하자, 도하는 관심을 보였다.

16548869775597.png“누구지, 그 사람이?”

누가 감히 그녀를 괴롭힌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권도하의 여자, 서지안을.

16548869775602.jpg“……대표님이요. 회사 다 왔으니까 이제 권도하 씨보다 대표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겠죠?”

16548869775597.png“……뭐, 나?”

16548869775602.jpg“네. 제가 아는 중엔 그분이 가장 좀…….”

16548869775597.png“……!”

도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모르는 척하는 건지, 정말 모르는 건지. 지안은 도하의 황당해하는 표정이 더 황당했다. 아침만 해도 그렇다. 느닷없이 다가와 남의 입술을 짓궂게 문지르는 나쁜 손. 입술을 조심하라고, 다음엔 손이 아닌 다른 곳으로 지워줄 거라는 이상한 경고. 상대의 얼굴이 붉게 익고, 심장이 폭주하는 모습을 눈에 담으며 즐기는 취미라도 있는 건지. 짓궂은 말과 행동을 일삼으며, 사람 심장을 주무르는 사람이 괴롭힘을 논할 건 아닌 것 같았다. 현재로서, 그녀를 가장 많이 괴롭히고 한시도 심장을 가만두지 않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권도하. 이제는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남자. 그 사람만 조심하면 된다. 지안의 눈에 경계 어린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

16548869796804.png“누가 출근했다고요?”

아침 보고를 듣던 세준의 눈이 순간 이글거렸다.

16548869796807.png“서지안 씨가 권도하 대표의 비서로 함께 출근했다고 합니다.”

16548869796804.png“…….”

노 실장은 보고 후 가만히 세준의 눈치를 살폈다. 세준이 생각보다 격한 반응을 보이자 조금 의아한 눈빛이었다. 도하의 아내가 그의 비서로 출근한 게, 세준이 이만큼 놀랄 일인가 싶었다. 세준은 얼마 전 지안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다. 그가 건넨 명함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되돌려주며 단호하게 거절하던 여자.

16548869796804.png‘겨우 권도하 밑으로 들어가려고 내 제안을 거절한 거야?’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뱉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제법 총명함이 느껴져 똑똑한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한데, 업계 1위 CTM을 마다하고 겨우 선택한 게 권도하 비서라니. 세준은 입안에 감도는 쓴맛을 삼키며 말했다.

16548869796804.png“이따 저녁 약속 취소하세요. 먼저 가봐야 할 곳이 있으니.”

16548869796807.png“……대표님, 강 사장님과 저녁 약속은 두 달 전부터 어렵게 잡은 일정입니다.”

16548869796804.png“방금 취소하겠다는 말 못 들었습니까!”

세준이 윽박을 쳤지만, 노 실장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차분히 대꾸했다.

16548869796807.png“대표님 일정은 제가 다 꿰고 있습니다. 강 사장님 약속보다 먼저 가봐야 할 곳은 없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만.”

16548869796804.png“노 실장님! 사람 말 못 알아들어요? 아니면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건가!”

16548869796807.png“……아닙니다. 대표님. 저는 그저.”

16548869796804.png“취소하세요! 지금 당장!”

세준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뚫고 나가 복도까지 쩌렁쩌렁 울렸다. 도하의 복귀 소식 이후, CTM 대표실 안에서는 줄곧 큰소리가 멎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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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안은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 같은 장면을 목격하고는 잠시 말을 잃었다. 도하가 회사 로비로 들어서자, 출근 중이던 직원들이 하나같이 옆으로 물러서며, 그가 지나갈 자리를 만들어줬다. 이런 건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지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도하의 뒤를 따라 유유히 걸었다. 곳곳에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지자, 조금 걸음을 늘어뜨려 도하와 거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뒤를 돌아본 그가 팔까지 뻗어 그녀를 불렀다.

16548869775597.png“뭐 해, 빨리 오지 않고.”

차에서 나눈 대화의 뒤끝인지 그의 목소리가 제법 사늘했다. 도하의 차갑고 냉랭한 말투에 지안을 향하던 여자 직원들의 날이 선 눈빛이 조금씩 사그라들었다. 그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먼저 타 있던 직원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90도 폴더인사를 했다.

1654886984897.jpg“안녕하십니까. 대표님.”

16548869775597.png“안녕하세요.”

괜히 그의 뒤에 서 있던 지안도 얼떨결에 그 인사를 받고 말았다. 직원들이 고개를 든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개중에는 그녀의 아버지뻘이 될 정도의 남자도 있었다. 그 직원과 눈이 마주치자, 지안은 난처한 듯 얼른 시선을 피했다. 그녀가 시선을 돌린 곳에서는 도하의 옆얼굴이 한눈에 보였다. 지안은 힐끗 그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저택에 있을 땐 미처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가 이렇게 큰 회사와 이 많은 직원을 책임지는 수장이라는 것을. 그렇게 생각하니 곧게 선 그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든든하게 보였다. 장소만 바뀐 것뿐인데, 그의 얼굴이 집에서와는 사뭇 다르게 보이는 건 혼자만의 착각일까. 아니면 회사 조명을 특별한 걸 쓰기라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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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동. 지안이 생각에 잠긴 사이,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울렸다. 도하는 뒤를 돌아 직원들을 향해 인사했다.

16548869775597.png“그럼, 다들 수고하십시오.”

1654886984897.jpg“네. 대표님.”

도하가 앞장서 내리고, 지안은 그보다 반 박자 늦게 따라 내렸다. 가는 곳, 마주치는 사람마다 파도타기 하듯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해대는 통에, 그녀도 인사를 하느라 허리를 제대로 펼 틈이 없었다. 예전에 절친 소진이 첫 직장에 출근한 후 들려준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16548869848991.jpg‘신입사원은 딱 세 개만 잘하면 돼!’

16548869775602.jpg‘뭔데?’

16548869848991.jpg‘삼사.’

16548869775602.jpg‘삼사? 그게 뭐야?’

소진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설명했었다.

16548869848991.jpg‘첫째 인사, 둘째 복사, 셋째 식사 메뉴 정하기’

지안은 그게 뭐냐고 피식 웃었지만, 그중 하나를 지금 알 것 같았다. 태어나서 이렇게 인사를 많이 해본 건 처음이었다. 대표의 옆에 있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일인 걸까. 앞서 걷던 도하가 복도 끝 가장 프라이빗한 곳의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묻지 않아도 그곳이 대표실이라는 걸 직감했다. 지안은 문을 열고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16548869775602.jpg“저, 잠깐 화장실 다녀올게요.”

모든 게 다 처음이라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한 것 같았다. 도하가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낮게 내뱉었다.

16548869775597.png“그래. 길 잃지 말고.”

길을 잃을 리가. 누구를 애로 보나. 지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조금 전 걸어갔던 곳을 지나쳐 엘리베이터 옆쪽에 있는 직원 화장실로 갔다. 그녀가 화장실 칸에 들어가 문을 잠그는 순간, 밖에서 우르르 직원들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생한 수다.

16548869848991.jpg“권 대표는 정말 그대로더라. 잘생긴 건 물론이고 여전히 섹시해.”

16548869848991.jpg“그니까. 3년간 누워 있었으면 몸매도 다 망가져야 정상 아니야? 근데 여전히 탄탄하던데. 너 허벅지 봤어?”

16548869848991.jpg“당연하지. 그걸 어떻게 안 봐. 난 근데 허벅지보다 태평양 같은 그 어깨가 더 좋더라.”

16548869848991.jpg“근데, 그 뒤에 여자는 누굴까? 권 대표 뒤를 졸졸 따라가던 여자.”

16548869848991.jpg“몰라. 새로 온 비서겠지.”

16548869848991.jpg“그런가. 그나저나 저번에 회사에 퍼졌던 소문 있잖아. 권 대표 결혼했다는 소문. 그거 진짜는 아니겠지?”

16548869848991.jpg“그게 말이 돼? 그동안 의식불명이었다는데 어느 참에 만나, 언제 결혼까지 했겠어.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도하 씨가 나한테 말도 안 하고 결혼할 리 없다고.”

16548869848991.jpg“야, 너 그 정도면 상상 연애병 말기야.”

16548869848991.jpg“뭐? 이게.”

16548869848991.jpg“아무튼 결혼 소문, 사실로 밝혀지면 울 회사 여자 직원들 한바탕 뒤집힐걸. 권 대표 사고 나고 여직원 퇴사율 수직으로 상승한 거 알지?”

16548869848991.jpg“그니까. 암튼 혹시라도, 만약, 정말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면, 상대가 전지현 정도면 인정. 그 이하면 나는 절대 노 인정.”

16548869848991.jpg“뭐, 전지현 정도면 어쩔 수 없긴 하다. 쩝.”

저, 전지현? 화장실 안에서 직원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안의 눈이 한껏 가늘어졌다. 공공장소에서 누군가의 외모를 마음대로 희롱하고, 배우자까지 저울질하는 게, 도하의 법적 배우자로서 지안은 유쾌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그녀는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은 절대 전지현이 아니라는 걸. 이어지는 시끄러운 수다를 가만히 듣던 지안이 천천히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세면대 쪽으로 가까이 오자, 직원들이 화들짝 놀라 굳었다. 지안은 빈 세면대로 가 말없이 손을 닦았다. 그러곤 직원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가 종이 타월을 뽑으며 말했다.

16548869775602.jpg“전지현이라도,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남을 희롱하면 안 될 것 같은데.”

16548869848991.jpg“……희, 희롱이라뇨?”

16548869775602.jpg“섹시하다, 탄탄하다……. 남의 몸을 멋대로 평가하는 게 희롱이 아니면, 대표님이 아셔도 무방할까요?”

싱긋 웃는 얼굴로 똑 부러지게 말하는 지안의 모습에 두 직원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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