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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대표실은 위험하다 (34/110)

34화. 대표실은 위험하다2022.03.28.

165488699813.jpg“다신 안 그럴게요. 대표님께 보고하지만 말아 주세요.”

165488699813.jpg“죄송합니다.”

머리를 조아리며 용서를 구하는 두 직원을 보며 지안은 잠시 고민했다. 마지막으로 쐐기를 박듯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밝혀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꺼내지 않기로 했다. 그가 결혼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면, 상대가 누구인지 더 많은 관심이 쏠릴 게 분명했다. 두 달 후면 끝나게 될 부부 사이인데, 불필요한 관심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도하는 그냥 이 회사의 대표에 지나지 않고, 뭇 여직원들의 로망이었다. 제가 아무리 도하의 법적 아내라고 해도, 그들의 로망을 함부로 깨부술 자격은 없었다. 듣기 힘든 희롱이라면 지금처럼 지나치지 못할 테지만. 지안은 차가운 빛을 띤 입술을 떼어 천천히 말했다.

16548869981314.jpg“공공장소에서는 조심해 주세요. 물론 공공장소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신체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희롱하지 마시고요. 남의 입에 그런 주제로 오르내리는 걸 반가워할 사람은 어디에도 없을 거예요.”

165488699813.jpg“네.”

165488699813.jpg“네.”

두 직원이 숙연한 표정을 지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16548869981314.jpg“그럼.”

지안은 유유히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또각또각. 그녀의 목소리만큼이나 차갑고 단호한 구둣발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두 직원은 숙이고 있던 허리를 바로 세웠다. *** 대표실 문은 여태껏 그녀가 당겨본 문 중에 가장 무거웠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그런 건가. 금박이 박힌 기다란 문손잡이에서도 위엄 같은 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전면 통유리창 너머로 탁 트인 한강이 보였다. 한강 뷰를 배경으로 라이트 그레이 컬러의 소파 네 개가 마주 보게 놓여 있었고, 소파 바로 뒤에 기다란 집무용 책상이 보였다. 그 앞에 도하가 앉아 있었다. 그새 업무에 몰두한 듯 서류를 살피는 그의 눈빛이 제법 진지하고 예리했다. 지안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슬쩍 살피다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이트 톤의 파티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또 다른 사무용 책상이 보였다. 아마도 그게 비서용 자리인 듯했다. 지안이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도하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16548869981332.png“길 잃지 말라니까.”

16548869981314.jpg“……네?”

도하가 턱짓으로 벽시계를 가리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구나. 화장실에서 만난 직원들과 예정에 없던 공공장소 에티켓에 대해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꽤 흘러버렸다. 지안은 그곳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16548869981314.jpg“회사가 커서 생각보다 길 찾는 게 어렵더라고요.”

그녀의 말을 가만히 듣던 도하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16548869981332.png“당신 전담 비서를 하나 붙여줄까?”

16548869981314.jpg“……네? 저, 전담 비서요?”

회사 생활 1일 차 병아리이지만, 비서에게 비서가 있다는 건 한 번도 듣지 못했다. 아니 경험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됐다. 당황한 그녀의 귓가로 도하가 말을 이었다.

16548869981332.png“회사 생활에 익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당신 전담 수행비서가 있으면 수월할 것 같아서.”

웃음기 없는 눈빛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럼 진담이라는 건데. 지안은 말도 안 된다는 듯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48869981314.jpg“아뇨. 비서한테 수행비서가 있다는 건 좀…….”

16548869981332.png“무늬만 비서이지, 당신은 진짜 비서가 아니잖아.”

16548869981314.jpg“……?”

16548869981332.png“대표 아내지.”

대표 아내. 여전히 생경한 단어였다. 그리고 절대로 들켜서는 안 되는 단어이기도 했다. 뭇 여직원들의 로망을 지켜주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머지않아 남이 될 사이인데, 괜히 회사에 대표 아내가 출근 중이라는 소문이 퍼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러려면 비서의 수행비서 같은 이상한 그림은 만들지 않는 게 당연했다. 지안이 생각하는 사이, 도하는 사내 전화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얼마 후 낮고 묵직한 음성이 지안의 귓가로 들려왔다.

16548869981332.png“강 실장. 나예요. 지금 당장 대표실로 수행비서 한 명을…….”

놀란 지안이 단숨에 튀어 나가 그의 손에서 수화기를 뺏어 내려놓았다. 타악. 순식간에 벌어진 일. 그녀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비로소 시선을 내렸을 때, 조금 전 급박했던 상황이 남긴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 손보다 두 배는 더 큰 남자의 손을, 그의 손등을 꾹 감싸고 있는 작은 손. 그걸 의식하기 시작하자 얼어 있던 감각마저 깨어났다. 손에서 전해지는 따듯하고 찌릿한 감각. 그때 귀 뒤에서 바로 속삭이듯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16548869981332.png“뭐 하는 거지, 지금?”

귓속말만큼이나 가까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순간, 코가 닿을 듯 아슬아슬한 거리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마치 아이가 엄마 다리 위에 포개어져 앉듯, 제 몸이 의자에 앉아 있던 도하의 하체에 가지런히 앉혀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지안이 일어나려고 몸을 드는 순간, 그가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완전히 감쌌다. 그녀의 등이 그의 품에 더 가까이 닿고, 두 다리도 더 바짝 붙었다. 앉은 채 백허그. 실로 낯 뜨거운 자세에, 얼굴이 붉게 익은 그녀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16548869981314.jpg“이거 놔줘요.”

16548869981332.png“싫다면?”

16548869981314.jpg“……빨리요.”

벗어나려 꿈틀대봐도, 저를 붙들고 있는 단단한 팔과 바짝 밀착된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굳센 힘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그때 귀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16548869981332.png“내 회사에 온 걸 환영해. 서지안.”

16548869981314.jpg“……!”

이런 환영은 사양이라고 그녀가 쏘아붙이려는데, 도하가 고개를 그녀의 어깨에 올리며 낮게 뱉었다.

16548869981332.png“환영의 카퍼레이드는 못 태워주지만, 내 다리 위 정도는 얼마든지 태워줄 수 있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안은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와 함께 있으면, 이런 상태가 무한히 반복되곤 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잘 대처해야 한다. 지안은 호흡을 고른 후 천천히 말했다.

16548869981314.jpg“제가 대표 아내라는 게 회사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요. 비서가 수행비서를 달고 다니면, 분명 말이 나올 거예요.”

16548869981332.png“……그 말은 당신과 내 관계를 비밀로 하잔 건가.”

16548869981314.jpg“네.”

도하는 가만히 생각하다 나직이 말했다.

16548869981332.png“……비밀 만들기를 좋아하나 봐.”

16548869981314.jpg“좋아해서 그러는 게 아니고.”

그는 단숨에 지안의 허리에 감고 있던 한쪽 팔을 풀어, 그녀의 턱을 가볍게 쥐어서는 제 얼굴 쪽으로 쓱 돌렸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16548869981332.png“원한다면, 더 많은 비밀을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그리고 조금씩 가까이, 더운 열기를 머금고 다가오는 입술. 한 층을 통으로 차지하고, 복도 끝에 동떨어져 있는 프라이빗한 대표실. 넓고 안락하다고만 생각했던 공간이 금세 폐쇄적이고 위험한 곳으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지안은 본능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전에 경험해본 적 있어서 아는 감각. 후끈한 열기와 두 입술의 아찔한 마찰감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 순간. 똑똑. 문밖의 소리가 훅 끼어들었다. 지안은 화들짝 놀라 몸에 힘을 줬고, 잠시 방심하던 그의 손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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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얼른 머리칼을 만지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문 쪽으로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지안이 문을 열자 그 앞에 웬 퀭한 몰골의 남자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16548869981314.jpg“……?”

지안이 눈을 크게 키우자, 그가 말했다.

165488699813.jpg“대표님을 뵈러 왔습니다. 한승훈 팀장이라고 전해 주세요.”

16548869981314.jpg“아, 네.”

지안은 고개를 끄덕이곤, 얼른 몸을 돌려 도하에게 말했다.

16548869981314.jpg“한승훈 팀장님이 오셨는데요.”

그녀의 말에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들려오는 태연자약한 목소리.

16548869981332.png“들어오라고 하세요.”

지안은 차분하다 못해 사무적인 그의 목소리에 살짝 눈을 흘겼다. 대표실 안에 들어선 한 팀장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혼잣말처럼 뱉었다.

165488699813.jpg“비서실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와 버렸네.”

그 말을 들은 지안의 눈이 흠칫 커졌다. 그녀가 무슨 얘기냐고 물어보려던 찰나, 한 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165488699813.jpg“대표님! 비서실이 사라져서 잠시 헤맸습니다. 비서분 자리를 대표실 안으로 옮기셨군요.”

쓸데없이 정확한 한 팀장의 팩트 체크에 도하는 살짝 당황한 듯 크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말했다.

16548869981332.png“비서실과 거리가 있다 보니, 소통이 잘 안 되는 것 같아 변화를 줬습니다.”

직장 생활 경력이 있었다면 속지 않았을 텐데. 지안은 비서실이 대표실 안에 있는 게 이상한 건지도 몰랐다. 오랜 간병 생활 때문에도 그의 옆에 있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한데, 원래 다른 곳에 있던 비서실을 한 공간으로 옮겼다니. 대체 왜. 무슨 꿍꿍이로. 도하는 생각에 잠긴 지안의 눈동자가 분주히 움직이는 걸 보고는 냉큼 뱉었다.

16548869981332.png“저기, 서 비서?"

낯선 호칭 탓인지 지안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를 부르는 건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16548869981332.png“서 비서? 서지안 씨!”

제 이름 석 자를 듣고서야 그녀가 겨우 고개를 돌렸다. 도하는 한 팀장이 가져온 서류를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16548869981332.png“이거, 회의 자료 좀 복사해다 주겠어?”

출근 후 첫 업무. 소진의 말처럼 신입사원이 잘해야 할 ‘삼사’ 중 하나인 복사가 그녀가 처음으로 맡은 업무였다. 사뭇 비장한 기운이 지안의 얼굴로 흘러내렸다.

16548869981314.jpg“네. 알겠습니다.”

지안은 서류를 받아서 대표실 한편 사무용 기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인수인계 파일에 적힌 순서대로 복사기기를 작동시켰다. 호기롭게 시작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는데 복사기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16548869981314.jpg“어?”

놀란 눈으로 복사기 화면을 응시하자, ‘용지 없음’이라는 붉은 글씨가 보였다. 주변을 싹 다 찾아봐도 용지가 보이지 않았다. 인수인계 파일을 뒤지던 그녀의 눈에 이런 문구가 보였다. [A4용지 및 기타 용지가 떨어질 시, 총무과에 내려가서 받아오도록.] 지안은 인수인계 자료를 참고해 얼른 총무과로 내려갔다.

16548869981314.jpg“저, 복사 용지가 떨어져서 왔는데요.”

그녀가 총무과 입구에 앉아 있는 직원에게 말하자, 직원은 모니터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누군가를 불렀다.

165488699813.jpg“윤 대리. 용지 받으러 오셨잖아.”

165488699813.jpg“네. 차장님.”

저만치 안쪽에서 보디빌더처럼 몸이 우락부락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목에 ‘윤주승’이라는 사원증을 건 남자가 지안을 보며 씩 웃었다. 커다란 몸과 달리 입가에 달린 수줍은 미소가 인상적인 남자.

165488699813.jpg“어떤 걸 드릴까요?”

16548869981314.jpg“복사 용지가 다 떨어져서요. 아, 대표실에서 왔습니다.”

지안은 인수인계 파일에 꼭 소속을 밝혀야 한다는 문구를 떠올리며 말했다.

165488699813.jpg“아, 대표실 새로 오신 비서분이시구나.”

남자는 지안을 한 번 더 빠르게 스캔하고는 셔츠 팔 부분을 걷어 올렸다.

165488699813.jpg“몇 상자 드릴까요?”

지안은 가만히 생각하다 손가락 두 개를 폈다. 흐린 카키색 캐비닛에서 용지가 든 박스 두 개를 가볍게 내린 남자가 지안의 야윈 팔을 보더니 말했다.

165488699813.jpg“대표실이면, 너무 먼데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16548869981314.jpg“아뇨. 괜찮아요. 저 혼자 들 수 있어요.”

165488699813.jpg“아니에요. 그러다 비서분 그 극세사 팔, 다 부러져요.”

  *** 도하는 한 팀장과 회의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주변을 살폈다. 조금 전 어딘가로 나가던 지안이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게 내심 신경 쓰였다.

165488699813.jpg“그래서 대표님 의견은 어떠신지…….”

16548869981332.png“…….”

165488699813.jpg“대표님?”

한 팀장이 그의 옷소매를 살짝 흔들자, 그제야 도하가 정신을 차렸다.

16548869981332.png“뭐라고 했습니까?”

165488699813.jpg“그게 지금보다 인력을 분산시켜서…….”

그때 저만치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도하는 얼른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지안이 들어오는가 싶더니, 그 뒤에 웬 낯선 얼굴도 함께 따라 들어왔다. 운동을 얼마나 한 건지, 산적같이 우락부락한 몸에, 의도한 듯 셔츠 단추 서너 개를 느끼하게 풀고, 힘줄이 불끈 선 팔을 훤히 오픈한 남자. 무거워 보이는 박스를 양손에 가뿐히 든 산적 아니 도적이, 지안을 음흉하게 곁눈질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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