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남자의 촉 (35/110)

35화. 남자의 촉2022.04.01.

도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지안과 남자가 서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도하를 알아본 남자가 용지 상자를 내려두고는 꾸벅 인사했다.

16548870178223.jpg“안녕하십니까. 대표님.”

16548870178228.png“…….”

도하는 비딱한 얼굴로 그를 쓱 응시하다 말했다.

16548870178228.png“총무과는 많이 한가한가 보죠. 근무 시간에 이렇게 선심 쓸 시간도 있고.”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냉랭한 목소리에 남자는 덩치에 맞지 않게 얼어붙었다.

16548870178223.jpg“아닙니다. 대표님. 전 그저 비서분 혼자 들기에 무리일 것 같아서요.”

내 여자 걱정은 당신 소관이 아니야. 도하는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그대로 뱉으려다 잠시 필터링을 거쳤다.

16548870178228.png“내 여…… 내 비서 걱정은 총무과 윤주승 대리 소관이 아닙니다. 앞으론 나서지 마세요.”

당황한 남자의 두 눈이 잠시 흔들렸다. 지안은 저를 기껏 도와준 사람을 도하가 다그치자,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도하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16548870178228.png“뭐 합니까. 어서 내려가 보지 않고.”

남자는 다시 한번 꾸벅 인사하고는 천천히 뒤돌아 나갔다. 지안은 미안한 마음에 그를 따라 문 쪽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을 순순히 넘길 도하가 아니었다.

16548870178228.png“서 비서!”

뒷덜미에 날카롭게 꽂힌 낯선 호칭. 이번에는 그녀도 한 번에 알아들었다. 지안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도하는 냉큼 그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무언가를 와락 낚아챘다.

1654887017828.jpg“어!”

명함보다 작은 크기의 식권 세 장.

16548870178228.png“뭡니까. 이건.”

영문을 알 수 없는 도하의 행동에, 지안은 평정심을 잃고 퉁명스럽게 뱉었다.

1654887017828.jpg“보면 모르세요. 식권이잖아요.”

16548870178228.png“그니까, 이게 왜 당신 손에 있냐고.”

점점 더 이글거리는 눈빛. 마치 그의 눈빛은 도둑맞은 당첨 복권이 다른 사람 손에 있는 걸 발견했을 때의 눈빛 같았다. 식권을 도둑맞은 트라우마라도 있는 건가. 지안은 고작 식권 가지고 이러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16548870178228.png“갑자기 이게 어디서 난 건지 묻잖습니까.”

1654887017828.jpg“……윤주승 대리님이 첫 출근 축하한다고 주셨어요. 구내식당 음식이 제법 맛있다고.”

16548870178228.png“……언제 봤다고 축하야.”

도하가 혼잣말처럼 구시렁대자, 지안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1654887017828.jpg“제가 다른 직원들과 원만하게 지내는 게 그렇게 못마땅하신가요?”

16548870178228.png“…….”

1654887017828.jpg“아깐 사내 괴롭힘을 걱정하지 않으셨나요? 이건 괴롭힘이 아니고 호의이고 선의인데. 이것도 마음에 안 드세요?”

지안의 말을 듣기나 하는 건지, 도하는 식권을 뚫어지게 응시할 뿐 아무 대꾸가 없었다. 한동안 식권을 보고 있던 그의 눈에 예리한 빛이 번쩍였다. 도하는 천천히 식권을 뒷면으로 돌렸다. 직원식당 운영 시간이 적혀 있는 식권 뒷면에 웬 손글씨가 보였다. 산적 같은 덩치와 달리 깨알같이 꾹꾹 눌러 쓴 메모. [예쁘세요^^ 010-321-5678 / 윤주승 ] 남자의 뾰족하고 예리한 촉이란. 도하의 두 눈이 한참 가늘어지다가 매서운 빛을 띠고 지안을 응시했다.

16548870178228.png“내 직원이 다른 직원들과 원만히 지내는 걸 반대할 이윤 없어.”

도하가 한 걸음 더 바짝 붙어오자, 지안은 그대로 굳었다.

16548870178228.png“다만, 남편이 있는 직원에게 추파 던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는 거야.”

지안은 무슨 뜻이냐는 듯 눈썹을 높이 치켜들었다. 도하는 그녀의 손을 홱 잡아 둥글게 말린 손가락을 하나하나 일일이 펼치더니, 그 위에 식권을 툭 내려놨다. 식권 뒤에 적힌 전화번호를 그제야 발견한 지안의 눈이 잠시 크게 흔들렸다. 그저 친절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을 뿐, 다른 낌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힐끗힐끗 저를 보던 시선은 그저 새로 온 직원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인 줄 알았다. 한데, 이렇게 연락처를 남겼을 줄이야. 벙쪄 있는 지안을 뒤로하고 돌아선 도하가 나직이 내뱉었다.

16548870178228.png“심부름 하나를 제대로 시킬 수가 없군.”

16548870228601.png

  *** 승훈은 조금 전 제 눈으로 보고 들은 것들을 믿을 수 없었다. 남의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그래서 종종 냉혈한이라는 오해를 사곤 하는 상사가 일개 비서의 일에 크게 흥분하다니. 도하가 일 이외 다른 문제로 눈에 쌍심지를 켠 건, 승훈이 아는 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연스레 그의 시선이 하얀색 파티션 너머로 어렴풋이 보이는 지안을 향했다. 승훈은 제 앞에 앉아 서류를 보는 도하와 지안을 번갈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쳐갔다. 혹시……. 그때, 서류를 보고 있던 도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16548870178228.png“그러니까, 내 사고 이후 미국 쪽 투자가 일제히 무산되었단 이야기지요?”

16548870178223.jpg“네. 미국 쪽 투자자들은 다른 걸 본 게 아니고, 그저 대표님을 신뢰해 투자 결정을 내렸다고 했습니다. 한데, 대표님의 건강이 불투명해진 상태에선 투자 결정을 철회할 수밖에 없다고…….”

16548870178228.png“다시 그들을 만나봐야겠는데.”

금세 경영인의 눈빛으로 돌아온 도하의 까만 눈동자가 절실하게 빛났다.

16548870178223.jpg“잠시만요.”

승훈은 태블릿 PC를 바쁘게 터치하다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16548870178223.jpg“아, 시간이 조금 밭긴 하네요.”

16548870178228.png“그게 무슨 얘깁니까?”

16548870178223.jpg“곧 미국에서 홈 딜리버리 박람회가 열립니다. 배달 사업 관련 각종 바이어가 참관할 예정이고요. 박람회에 참가기업으로 들어가 여러 바이어들과 미팅을 하면, 투자유치가 더 수월할 것 같은데.”

승훈의 이야기에 도하의 눈이 반짝였다.

16548870178228.png“당장 박람회 준비팀을 꾸려 진행하면 문제없는 거 아닙니까?"

도하가 강한 의지를 보이자, 승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잠시 멈칫했다.

16548870178223.jpg“기업 부스 신청이야 주최 측에 잘 얘기하면 지금이라도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미국 출장을 가시기에 아직 대표님 몸 상태가…….”

16548870178228.png“갈 수 있습니다.”

도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16548870178228.png“오는 바이어들 중 나를 알거나, 내가 아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겁니다. 와튼 스쿨에 다닐 때부터 딜리버리 사업을 준비하느라 그쪽 관계자들과 꾸준히 접촉했으니. 다른 사람보다 내가 가는 게 유리합니다.”

16548870178223.jpg“당연히 대표님이 직접 가시는 게 가장 좋지만, 저는 솔직히 염려됩니다. 무리하시다가 또 몸이 안 좋아지실까 봐서요.”

16548870178228.png“……걱정 마세요, 한 팀장. 제 전담 주치의와 훌륭한 간병인을 대동할 테니.”

그 말을 하며 도하는 저만치 먼 곳에 떨어져 있는 지안을 힐끗 눈에 담았다. 3년을 기다려온 두 남자의 회의는 쉬이 끝나지 않았다. 지안은 시계를 한 번 보고, 다시 두 남자가 회의 중인 소파로 시선을 돌리기만 벌써 30분째였다. 오후 6시 30분. 신입사원의 육시 칼퇴근은 강력한 퇴사 어필이나 다름없다던 친구의 푸념이 떠올랐다. 차라리 할 일이라도 많으면, 무료하지 않을 텐데. 오늘 출근해서 그녀가 한 일이라곤 복사 용지를 가지러 간 것뿐이었다. 온종일 인수인계 파일을 보고 또 봐서, 이제는 파일을 보지 않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잠시 승훈이 전화를 받으러 나간 사이, 도하는 그녀를 불렀다.

16548870178228.png“서 비서!”

지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1654887017828.jpg“네.”

16548870178228.png“먼저 퇴근하세요. 나는 회의가 길어질 것 같으니.”

경험 부족 병아리 신입사원은 잠시 고민했다. 먼저 가라는 상사의 말을 어디까지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 지안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1654887017828.jpg“아닙니다. 혹시 시키실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서류를 보고 있던 도하가 천천히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대표의 위엄이 서린 눈빛이 그녀의 얼굴로 고정되었다. 도하는 잠시 침묵하다 다시 입술을 뗐다.

16548870178228.png“앞으로 많이 바빠질 거야. 그러니까 미리 쉬어두라고.”

1654887017828.jpg“저는 괜찮아요. 다만 도하 씨, 아니 대표님이 걱정이죠. 강 박사님께서 아직 야근은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지안의 말에 도하의 눈동자가 순간 반짝였다.

16548870178228.png“혹시 방금 그거. 내 걱정하는 건가?”

1654887017828.jpg“……네?"

16548870178228.png“아니. 그냥, 듣기 좋아서.”

1654887017828.jpg“네?”

16548870178228.png“…….”

도하는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16548870178228.png“그거면 충분해.”

1654887017828.jpg“……그게 무슨.”

16548870178228.png“걱정할 필요 없다는 소리야. 오랜만에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오히려 몸에 활력이 도는 것 같다고.”

1654887017828.jpg“하지만…….”

16548870178228.png“나보다 당신 안색이 더 안 좋은 것 같은데? 많이 피곤해 보여.”

지안은 고개를 돌려 유리창에 비친 제 얼굴을 봤다. 첫 출근을 한다는 생각에 밤잠을 설친 탓인지 눈이 퀭하고 피로해 보였다.

16548870178228.png“어서 먼저 가 쉬고 있어. 나도 늦지 않게 갈 테니.”

지안은 잠시 고민하다 나직이 대답했다.

1654887017828.jpg“절대, 무리하시면 안 돼요.”

16548870178228.png“그래. 그렇게 할게.”

  *** 대표실을 나와 걷는데 가방에서 진동음이 들렸다. 지안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확인했다. [최 기사한테 연락해 뒀으니 곧 데리러 올 거야. 조심히 들어가. – 권도하 -] 겉으론 차갑게 굴다가도 무심한 척 은근히 챙겨주는 남자. 지안은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휴대폰 액정 속 짧은 메시지를 연신 눈에 담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데, 8층에서 남자 직원들이 우르르 올라탔다. 한순간에 구석으로 몰린 지안은 작은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서 있었다. 아직 닫히지 않은 엘리베이터 문밖으로 ‘개발팀’이라는 푯말이 보였다. 개발팀 직원들이구나. 만원 지하철 안처럼 꽉 찬 공간이라 작게 수군거리는 소리도 크게 들렸다. 바로 옆에서 시작된 푸념은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자꾸만 귓가에 꽂혔다.

16548870178223.jpg“이러다 우리 개발팀 해산하게 생겼어.”

16548870178223.jpg“정 주임도 오늘 사표 수리됐다며. 그럼 벌써 일곱 명째인가.”

16548870178223.jpg“인력 부족해서 죽겠어. 이제 프로그램 좀 다룰 줄 안다 싶으면 쏙쏙 다 빼가니까.”

16548870178223.jpg“솔직히 한 팀장도 CTM이 스카우트 제안하면 갈 거잖아? 연봉부터 복지까지. CTM이 아주 공격적이라고 업계에 소문이 자자하던데.”

16548870178223.jpg“그건 스카우트 받아봐야 알지.”

16548870178223.jpg“내가 CTM 스카우트 못 받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고, 솔직히 지 대표 좀 너무한 거 아냐? 자기가 다니던 회사 직원들을 쏙쏙 다 빼가고.”

16548870178223.jpg“그건 그래. 권 대표랑 절친 사이라던데. 상도덕은 기본이고 우정까지 국 말아 드셨나.”

야외 쉼터가 있는 3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개발팀 직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엘리베이터에 혼자 남은 지안은 이전과 달리 골똘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여러 개의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한데 모으고 있었다.

1654887017828.jpg‘지 대표? CTM의 지 대표라면?’

얼마 전, 케이원 호텔 로비에서 우연히 부딪혔던 남자. 휴대폰비를 변상하러 만난 자리에서 갑자기 취업 제안을 했던 그 남자가 분명했다. 그 사람이 도하 씨 절친이라고? 지난 3년간 간병하면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데……. 그 생각이 든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젠가 정순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16548870333064.png‘도하를 보러 오지 않은 건 백번 양보해 이해한다 치자, 하지만 도하 녀석 제일 친한 친구랑 놀아난 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니?’

잇따라 지세준이라는 남자가 했던 의미심장하던 말도 기억 속을 비집고 나왔다.

16548870333069.png‘제 친구 녀석 하나가 그랬거든요. 늘 승승장구하고 잘나가던 녀석이었는데,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죠. 인생이 한순간에 바뀐 거예요.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 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는 걸.’

그러니까…… 도하 씨를 배신한 친구가 바로 CTM의 지세준 대표? 지안은 그에게 직접 스카우트 제안까지 받았던 터라 마음에 확신이 섰다. 로비를 지나, 회사 밖으로 나간 그녀는 생각에 잠긴 채 최 기사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만치서 자동차 경적이 들렸다. 빵빵. 지안의 고개가 자연스레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갔다. 어? 낯선 디자인의 흰색 고급 세단. 최 기사가 운전하는 차가 아니었다. 그때 세단 운전석 쪽 창문이 스르르 내려가더니, 누군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16548870333074.jpg“서지안 씨?”

운전자의 얼굴을 본 지안의 눈이 한껏 커졌다.

16548870333077.jpg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