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못 참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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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못 참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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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못 참아요!
2022.04.08.
화려하기보다 절제된 실내장식에서 고급스러움이 묻어나는 레스토랑 안.
웅장한 느낌의 조명이 은은하게 내리쬐는 원형 테이블 앞에서 지안은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주로 연인이나 가족들이 오붓하게 식사 중이었다.
남편의 배신자 친구와 단둘이 식사하기엔 필요 이상으로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지안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치미는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 연신 물을 마셨다.
그런 그녀를 향해 세준이 나직이 말했다.
“같이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치레에 지안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감사는요.”
단숨에 그녀와 식사 자리까지 만들게 된 세준은 기대 이상의 진전에 들뜬 듯 뱉었다.
“지안 씨랑 제가 인연은 인연인가 봐요. 하필 그때 미팅 취소 연락이 와서.”
“…….”
“이런 데 여자분이랑 온 거 정말 오랜만이거든요.”
갑자기 그녀를 ‘여자’라 지칭하며 분위기를 묘하게 만드는 것도 모두 철저히 계획된 언행 같았다.
지안은 들고 있던 물잔을 툭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금 저를 여자라고 하셨나요?”
“네?”
“방금 그 말. 왠지 아가씨 적에 많이 들어 본 작업 멘트 같아서요. 인연이다, 여자랑은 처음 와 본다.”
“……!”
당황한 세준의 얼굴이 순간 잿빛이 되어 바짝 얼어붙었다.
지안은 웃음기 없던 얼굴에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서요. 저, 가정이 있는 유부녀거든요.”
세준의 눈이 순간 움찔하며 요동치듯 흔들렸다.
지안은 친절히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아가씨 때는 몰랐는데, 아줌마가 된 후로는 배고픈 걸 못 참겠더라고요. 사실 아까 엄청 배고팠는데, 미쉐린 가이드 이야기하시니까 따라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순순히 제 차에 오르고,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까지 따라올 때만 해도 세준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은.
하지만 세준은 그 말을 모두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그녀가 유부녀인 건 사실이지만, 사랑해서 한 결혼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 앞으로 음식이 서빙되었다.
투박하지만 고소해 보이는 통밀빵과 수제 리코타 치즈가 들어간 샐러드, 조갯살, 양파, 감자 등을 넣어 만든 클램 차우더가 차례대로 나왔다.
세준은 한발 물러서는 척 겸연쩍게 말했다.
“제 말이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저는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이야기는 천천히 하시죠. 우선 식사부터 하고요.”
“…….”
세준은 종잡을 수 없는 그녀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말문이 막혔다. 정말 배고픈 걸 못 참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지. 작디작은 여자의 속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잠시 굳어 있던 그가 휴대폰을 들어 음식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몇 달의 웨이팅 없이는 오기 힘든 레스토랑에 방문했으니, SNS 업로드는 당연한 일이었다.
눈앞의 여자는 제 뜻대로 할 수 없었지만, 사진은 얼마든지 제 뜻대로 찍고 업로드할 수 있었다.
***
고급 빌라 단지를 나온 하린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전조등 불을 켰다 껐다 반복하는 차 한 대가 보였다.
하린은 잰걸음으로 차가 있는 곳으로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었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지난번 한강 변에서 접선한 젊은 남자가 보였다.
하린은 조수석에 올라 방어적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어떻게 됐죠?”
남자는 고개를 좌우로 건들거리며 말했다.
“……일이 좀 복잡하게 됐단 말이죠.”
“그게 무슨 소리죠?”
하린이 앙칼지게 내뱉자, 남자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말했다.
“서지안이라는 여자 아비가 있는 곳을 찾았는데, 접촉이 쉬운 곳은 아니라.”
“……거기가 어딘데요! 설마…… 월북이라도 한 거예요?”
“멀리 가셨다. 월북까진 아니고, 다행히 대한민국 땅에 있긴 있어요. 그곳이 감방이라 문제지.”
“……감방? 그러니까 서지안 아빠가 수감 중이란 말이에요?”
“예. 그렇다네요. 사람을 못 쓰게 만들었다나. 근데 감방에 있으면 그쪽이랑 은밀하게 내통하는 브로커 통해서만 정보를 구할 수가 있단 말이죠.”
“……그럼 구해서 알아보면 되잖아요!”
“고객님 허가가 떨어져야 진행하죠. 이거 하나는 알아두셔야 하는 게, 브로커들이 돈을 보통 많이 받아 처먹는 게 아닙니다.”
결론은 돈을 더 달란 소리였다.
가만히 듣던 하린이 갈고리눈으로 쏘아붙였다.
“그 여자 아빠가 감방에 있다는 걸 내가 그쪽 말만 듣고 어떻게 믿죠? 믿을 만한 증거를 가져와 보세요. 그전에는 한 푼도 못 줘요!”
“……아우. 일 복잡하게 만드시네. 이 일은 다 신뢰로 하는 일 아닙니까? 서로 믿지 않으면 누굴 믿나.”
“……헛소리 말고, 증거부터 가지고 와요. 그럼 브로커 비용을 생각해보든 말든 할 테니까.”
하린은 그대로 조수석을 박차고 나왔다.
이렇다 할 결과물을 가져오지도 않고, 자꾸 추가 비용을 요구하는 남자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다.
그러다 나중에는 그의 말이 사실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지안의 아버지가 죄를 지어 수감 중이길. 죄목이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로 무겁고 중대한 것이기를.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 위로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그때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액정을 살피던 하린의 눈에서 순간 날카로운 빛이 번쩍였다.
“집에는 안 들어오고 또 무슨 SNS 업로드야!”
최고급 레스토랑만의 음식 퀄리티가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연애 초기엔 이런 데도 자주 데려가더니. 요즘엔 자기 혼자 가고 있네!”
하린은 불만 가득한 손놀림으로 빠르게 사진을 넘겼다. 그러다 사진 하나에 우연히 찍힌 뭔가를 발견하곤 미간을 한껏 좁혔다.
음식이 올려진 원탁 테이블 앞에 반쯤 나온 하얀색 레이스 블라우스.
한눈에 봐도 여자 옷이 분명했다.
아까 노 실장에게 전해 듣기론 세준이 저녁 미팅을 모두 취소한 뒤 퇴근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업무상 미팅이 아닌 게 분명한데.
그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잔 대체 누구라는 거야!
어느새 굳게 말린 하린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
레스토랑 입구로 들어선 도하는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분주히 주변을 살폈다.
은은한 조명 탓에 식사 중인 사람들의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더 들어가 안을 살피던 그의 시선 끝에 저만치 먼 창가 쪽에 자리한 원탁 테이블이 들어왔다.
뒤통수만으로도 알아볼 수 있는 오래된 친구. 세준이 분명했다.
조금 더 고개를 돌리자, 그 앞에 앉아 식사 중인 지안이 보였다.
도하는 지체하지 않고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있는 테이블 바로 앞, 높다란 원형 기둥을 사이에 두고 도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기둥 너머에서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정확히는 지안의 목소리였다.
도하는 기둥 뒤에 잠시 몸을 감춘 채 귀를 기울였다.
“지세준 대표님을 검색해보니, 제 신랑이랑 같은 중고등학교 출신에, 같은 와튼스쿨 동기더라고요.”
도하는 살짝 고개를 내밀어 두 사람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 어느 때보다 냉정한 눈빛을 한 지안이, 당황한 듯 시선이 불안정해 보이는 세준을 뚫어지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 그런가요?”
“모르시네요. 이 정도 얘기하면 바로 제 남편 이름을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동기가 한둘이 아니라서 전부 다 기억할 순 없습니다.”
“권. 도. 하."
지안이 제 이름을 거침없이 내뱉자, 도하는 잠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를 부른 게 아니라는 걸, 그저 세준에게 던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심장이 크게 반응했다.
잠시 기둥 뒤에 고개를 감췄던 도하가 다시 천천히 두 사람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세준의 요동치듯 흔들리는 시선이 지금의 난처한 심정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
“아무리 동기가 한둘이 아니고, 사는 게 정신없어도 십수 년을 함께한 절친 이름을 까먹긴 힘들죠.”
“……저, 저기요. 지안 씨.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제 남편, 우리 도하 씨랑 꽤 우정이 깊으셨다고 들었는데. 더 이상 그 우정에 금 가는 행동 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그, 그게 무슨.”
“우리 남편, 아시다시피 죽다 살아난 사람이에요. 겨우 살아난 사람 가슴에 못 박는 행동 자꾸 하시면 제가 못 참아요.”
기둥 뒤, 도하의 눈이 번쩍 커졌다.
3년 만에 다시 눈을 떴던 그 순간보다 더 크고 환한 빛을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조금 전부터 주체할 수 없이 요동치던 심장이 이제는 몸 밖으로 튀어나와 펄떡일 것 같았다.
그녀의 폭주는 시작에 불과한 듯했다.
“금시초문이라는 듯한 그 표정, 정말 마음에 안 들거든요. 정 모르시겠다면 제가 직접 들려드리죠. 그쪽이 제 남편에게 저지른 만행들.”
“……!”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친구를 3년간 단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은 것. 친구를 보러올 시간은 없어도 친구 여자친구를 꼬실 시간은 있었는지, 아픈 친구의 여자친구를 가로챈 것,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친구 회사의 인재들까지 속속들이 빼돌린 것. 그리고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으나, 친구의 아내인 제게 자꾸 우연을 가장해 들이대는 것.”
“…….”
세준의 얼굴이 속수무책으로 일그러져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비싼 밥 잘 먹었습니다. 제가 배가 고프면 더 날카로워져서, 그쪽을 생각해서라도 식사 후에 이야기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거든요.”
지안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다가 불현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얼마 전에 민하린 씨가 도하 씨를 보겠다고 저희 집에 마음대로 들이닥쳤었어요. 다신 그런 무례한 짓 하지 않도록 약혼자분께서 주의 주세요. 그럼 저는 이만.”
제대로 한 방 먹은 세준은 분한 듯 주먹을 불끈 쥘 뿐 안면이 마비된 듯 아무 말도 잇지 못했다.
지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하는 급하게 걸음을 옮겨 레스토랑 밖으로 빠져나갔다.
가슴이 터질 듯 뜨거웠다. 깊은 곳에 응어리져 있던 입에 담기도 힘든 복잡한 감정들이 순식간에 산화되는 느낌이었다.
작은 체구에 투명한 눈동자를 가진 여자가, 그 순간만은 저보다 더 크고 단단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그런 마음이 있는 줄 몰랐다.
누구보다 저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
그녀의 표정 하나, 시선 한줄기에서 느껴지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진심.
그 진심이 도하의 심장을 후벼 파고 들어와 미친 듯 영혼까지 흔들어댔다.
출구로 이어지는 코너 바로 옆, 비상계단 쪽에 서 있던 도하는 지안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또각또각.
조금씩 가까워지는 익숙한 구둣발 소리에 모든 촉각이 곤두섰다.
지안이 비로소 코너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도하가 와락 그녀의 팔목을 낚아챘다.
그리고 바로 옆 비상구로 그녀를 힘껏 끌어당겼다.
“어어!”
“……!”
순식간에 남자의 뜨거운 품에 갇힌 지안이 엷은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 도하 씨?”
도하는 지안의 작은 몸이 바스러질 듯 거세게 끌어안았다.
“숨 막혀요! 도하 씨!”
“가만 있어.”
“…….”
“그러니까 누가 함부로 사람을 감동시키래?”
“……!”
“어떻게 감당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