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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철벽 수비 (42/110)


42화. 철벽 수비
2022.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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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린은 엄지손톱을 물어뜯으며 어젯밤 확인했던 CCTV 화면을 생각했다.

확대된 화면 속을 가득 채우던 지안의 얼굴이 떠오르자, 불퉁한 입꼬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다 우연히 시선이 닿은 거울 속 제 얼굴을 보고는 화들짝 놀랐다.

밤새 분한 마음에 잠을 설쳐서 눈 밑으론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고, 피부도 푸석푸석했다.

이 모든 게 꽃뱀 같은 한 여자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위장이 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지난번 첫 만남에서 시원하게 쏘아붙여 주지 못한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나이도 저보다 어린 주제에, 예의를 지키라며 가르치려 들던 오만한 것!

당장 서지안을 만나서 어제 일을 따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린은 휴대폰을 들어 도하와 연인 시절 알아뒀던 저택 전화번호를 찾았다.

도하 모르게 서지안이란 여자를 불러내, 그 잘난 면상과 멘탈을 갈가리 갈아줄 생각이다.

따르릉.

한동안 통화 연결음이 들려오다 어느 순간 연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달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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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한남동입니다.

메이드로 추정되는 사람이 전화를 받자, 하린은 목소리 톤을 가증스럽게 바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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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서지안, 지안이 집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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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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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 지안이 친구인데, 지안이가 전화를 안 받아서요. 급히 전할 이야기가 있는데. 전에 지안이가 이 번호를 알려준 적 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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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경우가 처음인지 수화기 너머에서 한동안 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전화를 받던 메이드가 저보다 경력이 많은 누군가에게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소곤소곤 묻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얼마 후 메이드가 다시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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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안 사모님께선 지금 출근 아, 아니 부재중이시라 메모 남겨드리겠습니다.

메이드가 실수처럼 뱉은 말에 하린의 눈썹이 하늘 방향으로 높게 치솟았다.

출근?

바로 부재중이라고 정정했지만, 분명 그 앞에 ‘출근’이라고 말했었다.

그러고 보면, 어제 CCTV 화면 속 서지안의 복장은 영락없는 커리어우먼 스타일이었다. 회사에서 갓 퇴근한 직장인의 모습.

하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려 메이드를 떠보듯 넌지시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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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맞다. 지안이 얼마 전부터 출근 시작했죠. 케이원 사무실 번호 알려줬었는데. 제가 잠깐 까먹고 있었네요.”

출근이라는 건 메이드가 먼저 제공한 정보이니 그대로 차용했고, 케이원 사무실은 회사를 떠보기 위해 던진 미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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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럼 그쪽으로 직접 걸어 보십시오.

메이드가 바보같이 미끼를 덥석 물자, 하린의 입꼬리가 높게 휘어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높이 올라갔던 입꼬리가 가파르게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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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도하 씨 옆에 붙어 있는 거로도 모자라, 이제 회사까지 쫓아나갔단 말이야? 꽃뱀 같은 게 도하 씨 주변에 아주 제대로 똬리를 틀었네!"

하린은 급히 외출 준비를 한 뒤, 집을 나섰다.

오랜만에 와 보는 케이원 그룹 사옥은 3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웅장하고 멋스러웠다.

미래 도시를 테마로 한 CTM 사옥도 세련되고 감각적이었지만, 역사와 전통이 느껴지는 케이원만의 독보적인 아우라를 따라갈 순 없었다.

한때 그녀는 이곳의 안주인이 되는 꿈에 부풀었던 적이 있었다.

도하의 갑작스러운 사고로 그 계획에 차질이 생겼고, 지금은 말도 안 되는 꽃뱀의 등장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지만.

하린은 마른 입술을 잘근 씹으며 로비로 들어섰다.

그 순간, 새까만 장정 두어 명이 다가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두 사내 중 비교적 체격이 호리호리한 남자가 하린을 향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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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오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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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아니 지인을 만나러 왔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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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원분과 미팅 예약이 되면, 출입 예약 확인 문자가 갔을 텐데, 한번 보여 주시겠습니까?”

생각지도 못한 까다로운 절차에 하린은 당황한 듯 눈을 연신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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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 문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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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못 받으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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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요한 확인에 하린은 살짝 불쾌해졌다.

3년 전만 해도 그녀가 로비에 들어서면, 데스크 직원들이 90도 폴더 인사를 하며 다가와 VIP 전용 통로로 안내했었다.

케이원을 제집처럼 드나든 게 불과 어제 일 같은데, 입구 컷 위기에 처하자 황당하다 못해 감정이 북받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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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내가 누군지 몰라서 이러나 본데…….”

하린은 날카롭게 쏟아내다 말문이 막혀 잠시 끝을 흐렸다.

저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권도하 대표의 엑스 여자친구라고 말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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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는 모르는 분 같은데, 선생님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호리호리한 남자 옆 덩치 큰 사내가 묻자, 하린은 눈가에 힘을 바짝 넣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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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을 당신들이 알아서 뭐 하게? 하, 진짜. 별꼴이야. 당신들 지금 실수하는 거야. 나 도하 씨, 그러니까 권도하 대표님과 아주 각별한 사이라고!”

두 남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조금 따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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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하루에 많게는 대여섯 분 정도 오셔서요. 그럼 대표님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 선생님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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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 이 사람들이!”

하린이 기가 찬 듯 소리치자, 남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자기 할 말만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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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하지 않으시면, 밖으로 강제 퇴장되실 수 있습니다.”

하린은 마지못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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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린! 도하 씨한테 전해 줘. 민하린이 왔다고!”

원래 계획은 도하가 아닌, 지안을 만나려던 것이었지만, 이 회사에서 권도하만큼 존재감이 크고 확실한 이름은 없었다.

로비를 통과하려면 도하의 이름을 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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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린 씨라고요? 잠시 여기서 대기해 주시면 금방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두 장정은 데스크 쪽으로 걸어가 직원과 잠시 모니터 화면을 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하린은 갈고리눈으로 그들을 쏘아보며 거칠어진 숨을 다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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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면 도하 씨한테 다 이를 거야.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모니터 화면을 보던 남자들이 하린이 서 있는 쪽을 힐끗 보고는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얼마 후 남자들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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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하린 씨?”

전보다 심각해진 두 사내의 표정을 보고 하린은 확신에 찼다.

건드리면 안 되는 사람을 건드렸으니, 후회막심할 수밖에.

그녀는 고개를 꼿꼿이 들고 그들을 향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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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렀으면 말하세요!”

그때 덩치 큰 남자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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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당장 나가 주셔야겠습니다!”

뜻밖의 소리에 하린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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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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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나가지 않으시면, 저희가 물리적으로 도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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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당신들 도하 씨한테 확인해 본 거 맞아?”

남자들은 대답 대신 하린을 강제로 끌어냈다.

출입문 밖까지 끌려 나간 하린은 끝까지 빽빽 소리를 치며 발버둥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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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두 장정이 확인하고 간 데스크 모니터 화면 위로 여전히 하나의 화면이 켜져 있었다.

[대표님 직접 지시 사항]

1. 회사 입구 및 로비 CCTV 추가 설치 및 철저한 경비 강조

2. 방문객 사전 예약제 시행. 예약등록 확인 메시지를 받지 않은 자는 출입 금지.

3. 출입 금지 명단 : 민하린, 지세준.

***

양손에 커피용 캐리어를 든 지안은 로비 쪽에서 들려오는 소란한 소리에 잠시 고개를 돌렸다.

웬 여자와 경호원으로 보이는 남자들이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지?

커다란 장정들의 덩치에 가려져 여자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얼핏 보이는 실루엣이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누구지?

저도 모르게 골똘해지려다가 캐리어에 든 아이스 커피를 보고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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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 녹으면 안 되는데!"

대회의실에서는 도하가 복귀 후 처음으로 소집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지안은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에게 음료를 대접하는 막중한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움직이는 중이었다.

애먼 곳에 한눈을 팔다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 커피로 직원들 머릿속에 이미지가 각인되긴 싫었다.

지안은 걸음을 재촉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가 회의실이 있는 층으로 점점 올라갈수록 커지는 숫자만큼 심장이 배로 뛰었다.

회의실에 들어가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될 한 사람.

어젯밤, 예고도 없이 훅 들어온 고백으로 밤잠을 모두 앗아간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지난밤은 다시 생각해도 정말 아찔했다.

가뜩이나 좁은 침대 위에서 지안은 그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매달리다시피 해 잠을 청했다.

잠든 그가 조금만 뒤척여도 심장이 함께 일렁이는 탓에 한시도 눈을 붙일 수 없었다.

대담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선수 기질이 있다고 해야 하나.

그는 그런 뜨거운 고백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은지 홀로 숙면 중이었다.

지안은 그런 그가 야속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했다.

본인은 가슴에 담고 있던 감정을 풍선 터뜨리듯 터뜨려서 가뿐할지 모르지만, 그 감정의 풍선을 고스란히 전달받은 누군가는 심장이 자꾸만 부풀어 올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순간이었다.

잠든 도하의 입술 사이로 희미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귀에 잘 들리지 않는 주파수처럼 어슴푸레 흘러나온 소리.

세상이 곤히 잠든 새벽이 아니었다면, 그녀도 듣지 못했을 그런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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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안.’

제 이름이 이렇게 가슴 떨리는 말인 줄 지안은 그때 처음 알았다.

꼭 감긴 두 눈과 일정한 숨소리가 그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꿈결에 뱉은 이름. 그게 다른 사람 아닌 그녀 자신의 이름이었다.

지난밤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엘리베이터 안이 후덥지근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엘리베이터 숫자 알림판이 빨리 바뀌는 것 같은 건, 다 기분 탓일까.

지안은 살짝 상기된 얼굴로 심호흡을 했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지안은 회의실 앞에서 노크한 뒤, 천천히 문을 열고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한 줄기 빛처럼 저를 향해 고정된 뜨거운 시선 하나가 느껴졌다.

지안은 그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정신없이 음료를 날랐다. 손과 몸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머리와 심장은 저를 향해 고정된 그의 시선을 의식한 채 바보처럼 굳어 있었다.

정신없는 몇 분이 지나고, 모든 임무를 마친 그녀가 돌아서려던 그때, 뒤통수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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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다음부턴 회의실 들어올 때 음료는 각자 준비해오는 거로 합시다. 비서분이 음료를 배달하는 구시대적인 관습은 우리 케이원이 먼저 바꿔 보자고요.”

생각지 못한 배려, 저를 위한 마음 씀이 느껴져서 가슴 한곳이 저릿해졌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회의실 밖으로 나온 지안은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댄 채 생각했다.

쿵쾅쿵쾅.

이렇게 심장이 멋대로 뛰어도 괜찮은 걸까.

***

케이원 사옥 밖으로 쫓겨난 하린은 사나운 숨을 몰아쉬며,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가방에서 짧은 진동음이 들렸다.

거칠게 휴대폰을 꺼낸 그녀의 눈에 사진 파일 하나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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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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