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나의 작고 소중한, 인간 체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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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나의 작고 소중한, 인간 체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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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나의 작고 소중한, 인간 체온계
2022.04.29.
파일을 누르자 웬 서류를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서류 맨 위에 이런 글씨가 박혀 있었다.
[수용 증명서]
하린이 사진을 확대하려는 순간, 화면이 통화 연결 화면으로 바뀌었다.
지안을 뒷조사하려 몇 차례 접선했던 남자의 번호였다.
하린은 잠시 주변을 살피며 구석진 골목으로 들어가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내가 먼저 전화하기 전에는 전화하지 말랬죠? 흔적 남는 거 제일 싫다고.”
그녀가 앙칼지게 내뱉자, 수화기 너머에서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이코, 죄송합니다. 고객님! 제가 마음이 앞서서 그만.
“쓸데없는 소리 말고 빨리 용건만 말하세요!”
-아, 방금 서지안 아비가 감방에 있다는 증명서 보냈는데 보셨을까요?
“그깟 서류, 위조하는 거 당신 같은 사람한테는 일도 아니라는 거 잘 알아요!”
-그리 말씀하시면 제가 섭하죠. 얼마나 어렵게 빼낸 건데 위조라뇨. 고객님, 저, 이 일 하루 이틀 하는 거 아닙니다. 위조나 하는 놈이면 고객들이 자기 지인들한테 믿고 소개하겠습니까? 고객님도 아주 가까운 분께 저를 소개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래서요! 용건이 뭔데요? 또 돈 달라고?”
-이렇게 나오시면 고객님 손해인데. 이번에 서지안 아비에 대해 알아보다가 정말 굉장한 고급 정보 하나를 발견했거든요. 이거 하나면, 고객님 목표는 모두 이루실 것 같은데. 서지안을 권도하 대표 옆에서 떨어뜨리는 일, 그 집에서 쫓겨나게 하는 일 말입니다.
“……뭐, 뭐라고요?”
-모르긴 몰라도 이 정도면 천년의 사랑이라도 깨져야 정상이거든요.
경계심으로 물들었던 하린의 눈동자가 조금씩 풀렸다.
천년의 사랑도 깨질 만한 고급 정보라는 것에 구미가 당겼다.
“그게 뭔데요. 한번 말 해보세요!”
-……그냥은 안 된다는 거 아실 텐데요. 이번 정보는 스케일이 다르다 보니. 푼돈 받고 넘길만한 게 못 됩니다.
잠시 기대감에 찼던 하린의 안면 위로 사늘한 분노가 번졌다.
“결국은 이거였네. 됐으니까 끊어요!”
-후회하실 텐데요?
“……!”
-큰 거 한 장 준비되시면, 연락하세요. 어차피 주실 거면서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마시고요, 예? 그럼 저는 이만.
뚝.
남자가 멋대로 전화를 끊자, 하린은 허탈한 듯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모를 상황.
케이원에서 당한 수모로 모자라, 제가 고용한 남자에게 무시당하자, 참을 수 없었다.
탁!
하린은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을 바닥으로 사정없이 내동댕이쳤다.
***
회의를 마친 도하가 대표실로 돌아오자, 모니터 화면을 보고 있던 지안의 작은 어깨가 긴장한 듯 굳었다.
어젯밤,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 이후, 지안은 도하와 함께 있는 모든 공기가 어색했다.
숨을 제대로 내쉬기도 힘들 정도로 자꾸 그가 신경 쓰였다.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지안.”
“……네?”
“잠깐 내 자리로 와 보겠어?”
별거 아닌 말 하나에도 가슴이 고장 난 듯 들먹거렸다.
지안은 엷은 숨을 내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파티션 너머 통유리창 앞에 놓인 테이블 쪽으로 다가갔다.
“무슨…… 일이시죠?”
“…….”
도하는 대답 대신 커다란 손을 제 이마로 가져가 비스듬히 대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순간 지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회사에 출근한 이후, 잠시 내려두었던 간병인 본능이 삽시간에 다시 발동했다.
“괜찮아요? 어디 아픈 거예요?”
“오랜만에 소집한 회의라 그런가. 두통이 좀 온 것 같아.”
그러고 보니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했고 입술도 푸른 빛이 돌았다.
놀란 지안은 잽싸게 팔을 뻗어 그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한동안 기다란 속눈썹을 빠르게 깜빡이며 체온을 체크 하는 모습이 제법 전문가다웠다.
“열도 조금 있는 것 같은데. 잠깐만요. 정확히 알아야 하니까, 체온계랑 혈압 측정기 좀 가져올게요.”
지안이 그 말을 하곤 황급히 몸을 돌리려는데, 도하가 와락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니, 그냥 이대로 있어.”
그러곤 그녀의 작은 손을 다시 가져가 제 이마에 붙였다.
“……!”
“이 작은 손이 제법 약손이거든.”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강 박사님 말씀 잊었어요?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오면 바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취하고 있잖아. 지금 이렇게.”
작은 손 하나를 이마에 얹고 있는 게 무슨 조치라고.
지안은 눈살을 구기면서도 바보처럼 뛰는 심장에 어쩔 줄을 몰랐다.
도하는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떠 눈앞의 지안을 바라봤다.
몇 시간 전, 음료를 가져다주러 온 그녀를 본 후부터 애타게 이 시간을 기다렸다.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손길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어서 오기를.
하지만 3년 만에 시작된 회의는 끝날 줄을 모르고 길어졌다.
누군가를 보고 싶은 마음과 기다림은 지독한 두통이 되었고, 대표실로 들어서는 순간 참을 수 없어져 버렸다.
시간이 멈춘 듯 부동자세로 있던 지안이 슬쩍 손을 떼자, 도하는 그 손을 다시 잡아당겨 불시에 제 입술 쪽으로 가져갔다.
“여기도 뜨거워.”
그 말을 하며 지안의 작고 하얀 손등에 뜨거운 입술을 붙였다.
“……!”
참아온 마음을 다 보여주기에 이것만으론 한계가 있었지만, 어제 그녀와 한 약속이 있었다.
그녀만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오라고, 기다리겠다고 했던.
잠시 굳어 있던 지안이 연신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재빨리 손을 거둬갔다.
“이, 있어 봐요. 체온계랑 혈압계 가져올 테니.”
도망치듯 저만치로 달아나는 그녀의 뒷모습이 마치 수줍은 사춘기 소녀 같아 보였다.
도하는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얼마 후 돌아온 지안은 도하를 의자에 잘 기대앉게 한 후 체온과 혈압을 측정했다.
다행히 모두 정상 수치였다.
지안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들었다.
“체온도 혈압도 정상 범위예요.”
그녀의 말에 도하가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며 대꾸했다.
“벌써 끝난 건가?”
그녀의 따듯한 손길을 오롯이 느끼고, 작은 숨결을 가까이서 듣자, 마라톤 회의로 쌓인 피로가 절로 풀리는 기분이었다. 절대 이렇게 찰나의 순간으로 끝나선 안 되는 아까운 시간이었다.
“……네?”
“너무 대충 잰 거 아닌가 해서. 생각보다 빨리 끝난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억지에 지안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원래 늘 이 정도 걸렸었잖아요.”
“……그래? 아닌데. 오늘은 뭔가 대충한 것 같은데.”
“아니에요. 평소처럼 제대로 했어요.”
“체온도 정상이라고? 이렇게 열이 나는데?”
지안은 대답 대신 멀뚱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오류 같군. 체온, 혈압 다시 한번 재 줘.”
“……!”
아이처럼 억지를 쓰는 남자의 모습에 지안은 왠지 모를 싸한 느낌이 들었다.
설마…… 두통이 왔다는 것도 처음부터 다 꾀병은 아니었는지.
그 순간, 그가 그녀의 손을 와락 잡아당겨 다시 제 이마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 체온계보다 당신 손이 더 정확한 것 같으니까, 그냥 이걸로 해 줘.”
그녀의 작은 손을 이마에 얹는 순간 위로 부드럽게 휘는 남자의 입술 곡선.
그 모습을 보자 꾀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지안은 도하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몇 시간 전, 회의실에서 언뜻 봤을 때만 해도, 그는 케이원 그룹의 무게를 두 어깨에 홀로 짊어진 믿음직한 CEO의 모습이었다.
곧고 예리한 시선과 반짝이는 눈동자, 말수는 많지 않아도 핵심을 정확히 간파하는 영리한 입술.
살짝 걷어 올린 셔츠 소매와 그 사이로 드러난 팔이 관능적으로 느껴지던 어른 남자.
그런 남자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꾀병으로 저를 붙들고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얼마 후, 지안이 자리를 뜨려 하자 도하가 나직이 물었다.
“여권 있지?”
“……네?”
느닷없는 질문에 지안의 눈썹이 높이 올라갔다.
“곧 미국으로 떠나야 하거든.”
“미국이요?”
“그래. 미국 출장.”
도하가 스르르 눈을 뜨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내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해 봐서 아는데. 이렇게 좋은 체온계는 미국, 아니 세계 어디에도 없을 거라서.”
“……그게 무슨.”
지안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묻자, 도하가 입술을 뗐다.
“우리 케이원이 미국 딜리버리 박람회에 참가하게 됐어. 당연히 대표인 나도 참석하겠지. 내가 가면, 내 체온계도 당연히 따라가야 하고.”
도하가 지안을 지그시 바라보며 씩 웃었다.
***
도 회장을 만나고 온 세준은 내내 저기압이었다.
‘아류가 되지 않으려면, 내실부터 다져야 할 걸세. 지금 당장은 앞서가고 있다고 해도 원조가 속도를 내면, 아류는 금세 무너지기 마련이라네.’
‘아류가 왜 아류인 줄 아나? 겉모습만 베껴서 그럴싸해 보일 뿐, 속은 빈털터리라서일세. 자네를 만나게 되면 이 이야길 꼭 해주고 싶었네. 그럼, 이만 가 보게나.’
세준은 집무실 테이블 위 제 이름 석 자가 박힌 크리스털 명패를 문 쪽으로 거칠게 내던졌다.
쾅!
“누구 보고 감히 아류래! 뭐 겉모습만 베낀 빈털터리?”
정말 화가 나는 건, 도 회장의 말을 부인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저의 알량한 양심이었다.
그리고 도 회장에게 저에 관한 이야기를 한 게 분명한 정순에 대한 분노가 미친 듯 들끓었다.
‘미친 노인네! 대체 어디까지 얘기한 거야! 어디까지 얘기한 거냐고!’
세준은 언젠가 정순이 지나치듯 했던 말이 뇌리에 박혀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내 팔십 가까이 살아보니, 결국 모든 건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더구나. 그러니, 지금을 마음껏 누리렴. 금세 눈앞에서 다 흩어져 버리기 전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절정에 달하던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대표님, 노 실장입니다.”
세준은 한껏 고조된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말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걸음을 옮기던 노 실장이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명패를 보며 흠칫 놀랐다.
노 실장은 애써 태연한 얼굴로 세준에게 다가가 흰색 봉투 하나를 건넸다.
“대표님, 이게 대표님 앞으로 와 있었습니다.”
세준은 힐끗 봉투를 보며 물었다.
“이게 뭡니까!”
“…….”
노 실장이 잠시 시선을 거두고 난처한 듯 입술을 굳게 닫았다.
“이게 뭐냐고 묻지 않습니까. 노 실장!”
세준이 목청을 키우자, 노 실장은 마지못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3년 전, 그자가 보낸 편지인 듯합니다.”
노 실장의 말에 세준의 충혈된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