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너를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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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너를 닮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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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너를 닮아서
2022.05.06.
우드톤의 중후한 인테리어에 어두운 조명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바 안.
세준은 그곳에 홀로 앉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귓가를 울리는 아름다운 재즈 선율도, 높은 도수의 술도 온몸에 퍼진 불안감을 지워주진 못했다.
허공을 향해 파르르 떨리는 시선. 잔을 든 손등에 불끈 솟아난 힘줄이 당장 누구라도 붙잡고 포악을 부릴 듯 위험해 보였다.
세준은 뒤틀린 입술을 굳게 물고는 재킷 안에서 발신인 없는 편지를 꺼냈다.
회사에서 편지를 꺼내 본 후,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단박에 밀려온 초조, 불안, 공포.
도저히 맨정신으로 다시 볼 자신이 없어 독한 알코올의 힘을 빌려야 했다.
붉게 충혈된 눈동자가 천천히 눈앞의 편지를 다시금 읽어 내려갔다.
[지세준 대표님께,
대표님, 오랜만입니다. 뉴스에서 종종 대표님 소식을 전해 듣고 있습니다. 고개를 높이 치켜들어야 볼 수 있는 곳까지 승승장구하셨더군요. 대표님이 이뤄낸 많은 것들에 경의를 표합니다.
대표님께선 제 소식 따위 궁금하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제 얘기를 안 할 수 없지요.
저는 이곳에서 벌써 세 번째 여름을 맞았습니다.
환기가 잘 안 되는 환경이라 같은 감방 녀석들의 꿉꿉한 살 냄새, 땀 냄새를 벗 삼아 먹고 자고 하루하루를 전쟁처럼 버티고 있답니다.
뭐, 그런 건 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견딜 수 없는 건,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와 있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한 번쯤 저를 만나러 오셔서 어떤 해명을 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뉴스를 보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것 같아 그런 기대는 진작 내려놓았습니다.
바쁜 분 대신 제가 직접 찾아뵙는 것이 더 빠르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약속을 잡으려고 연락드렸습니다.
대표님은 바쁜 몸이시니, 미리 선약을 잡지 않으면 뵙는 것조차 힘들겠지요?
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마주 앉아 시원한 냉커피 한잔하실까요. 아니면, 피로회복제 한 병이라도.
그땐 들어볼 수 있겠지요?
대체 그날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제가 왜 여기에 이렇게 있어야 했는지 말입니다.
다시 만날 그날까지 건강하시고, 무탈하시길 기원합니다.]
마침표를 읽은 세준은 끝나도 끝나지 않은 이야기에 치를 떨며, 힘없는 편지지를 와락 구겨 손안에 꾹 쥐었다.
그러곤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왠지 모를 싸한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저를 둘러싼 공기가 왠지 낯설기만 했다. 마치 누가 몰래 훔쳐보고 있을 것만 같은 불안감이 차올랐다.
아무리 둘러봐도 저를 신경 쓰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저를 괴롭히는 건, 어딘가에 숨어서 저를 노리고 있을 누군가가 아닌, 진실이 밝혀질까 겁먹은 자신의 양심이었다는 걸.
세준은 지나가는 웨이터를 붙잡고 외쳤다.
“같은 거로 한 잔 더!”
***
“그러니까 대표님 혼자 서지안 씨, 아니 사모님을…….”
도하가 사적인 이야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기에, 승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도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긴 잠을 자고 깨어나 보니, 내 옆에 웬 아내라는 여자가 기다리고 있던 겁니다. 황당하고 어색하고 불편한 와중에…… 어이없게도, 그 여자가 예뻤습니다.”
냉혈한, 철옹성이라는 별명을 가진 상사의 낯선 고백에 승훈은 흥분한 듯 말했다.
“그럼 대표님께서 첫눈에 반하신 겁니까?”
“……한 팀장.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로 보입니까?”
“……아,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하하.”
“예쁘다고 반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예뻤다는 겁니다. 평소의 나였다면, 내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은 모두 없던 거로 만들고도 남았을 텐데.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더라고.”
“……!”
승훈은 생각도 못 했던 상사의 러브스토리에 쉽게 빠져들었다.
“그래서 몸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간병을 더 부탁했습니다. 처음엔 얼굴만, 눈에 보이는 외모만 예쁜 줄 알았는데. 함께 있을수록 느꼈습니다. 사람 자체가 예쁘다는 게 어떤 건지. 그냥 그 여자가, 서지안이라는 사람 자체가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 없게 된 겁니다.”
“……얼굴이 아니라 사람 자체가 예쁘다. 제가 들어본 러브스토리 중에 가장 로맨틱한데요?”
“……러브스토리라고 할 수도 없죠. 혼자 좋아하는 반쪽짜리도 러브스토리가 될 수 있습니까?”
도하가 살짝 의기소침하게 말하자, 승훈은 습관적으로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회의를 할 때마다 도하가 아직 부족한 점, 보완해야 할 부분을 지적하면 승훈은 금세 답을 찾아내 놓곤 했었다.
조금 다른 문제를 두고도 승훈은 비슷하게 접근했다.
승훈은 안경을 추켜 올린 뒤, 컴퓨터를 프로그래밍하듯 테이블을 빈 손가락으로 두드리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이번 미국 박람회가 회사에도, 대표님께도 아주 중요한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승훈의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던 도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사업이 좀 더 공고히 입지를 다지게 되면, 아내도 저를 더 믿게 되겠지요?”
도하의 해석에 승훈이 빠르게 도리질하며 말했다.
“아뇨, 대표님. 제 이야기는 그 뜻이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제가 전에 제 와이프랑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말씀드린 적이 있을까요?”
“……유럽 배낭여행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습니다! 낯선 여행지, 이국땅은 생각만으로도 새롭고 낭만적인 느낌이잖습니까? 그 분위기를 잘 이용해서 감정을 발전시키면 됩니다.”
“분위기를 잘 이용해서 감정을 발전시키라…….”
“그리고 낯선 곳에 가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더 의지하게 되는 게 있단 말입니다. 사모님 옆자리를 잘 사수하면서, 잘 챙겨주시면 한국에서보다 더 쉽게 마음을 열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한 팀장의 말에 도하의 눈동자에 조금씩 빛이 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그래도 이런 쪽엔 잡다한 지식이 많다 보니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 팀장의 너스레에 도하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한 팀장만 믿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아, 미국도 미국이지만 한국에서도 평소에 조금씩 노력하셔야 합니다.”
“노력이요?”
승훈은 상체를 도하 쪽으로 기울여 그의 귓가에 나직이 무언가를 속삭였다.
***
화장대에 앉아 메이크업을 지우던 지안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는 지세준이라는 사람이, 또 다른 날은 그의 약혼녀가 불쑥 나타나 정신을 어지럽혔다.
하루하루 전쟁 같기도 하고, 또…….
제 의사와 상관없이 듣게 된 아버지라는 사람의 근황이 그녀도 인간인지라 신경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말이었다.
‘어머 모르셨구나. 그쪽 아버지, 지금 죄짓고 교도소에 있다던데. 도박, 사기, 절도, 안 지은 죄 찾기가 더 힘들다고. 후유. 피 하나는 제대로 물려받으셨어요. 서지안 씨.’
‘기억’이라는 게 자리 잡은 순간부터 스물여덟이 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작은 기억조차 공유한 적 없는 존재.
곁에 있다가 사라진 존재라면, 미워하거나 원망하기라도 할 텐데. 그런 감정조차 허락되지 않은 사이었다.
한데 조금 전 하린의 이야기를 듣고선 조금씩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아무 소속감 없이 제 몸 하나라면 두려울 것이 없겠지만, 법적으로 도하와 부부가 되고, 정순과 가족이 된 이상 그들에게 어떤 이유로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지안은 도하가 오면 이 일에 관해 이야기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고민해봐야 소용없는 문제였다.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위험을 감추기보다, 미리 알려주면 함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버지라는 이름에 자격조차 없는 존재가, 케이원 그룹에 혹시 끼칠지 모르는 피해와 위험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을지도.
그는 현명한 남자이니, 대비책을 함께 고민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무거운 어깨에 짐을 하나 더 얹어 주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더 미안할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다.
지안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봤다.
밤 10시.
어느새 훌쩍 지난 시간을 보자, 밥은 먹고 일하는 건지 도하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직 야근을 하면 안 된다던 강 박사의 말로 설득해보려 했지만, 일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그를 말릴 재간이 없었다.
저녁 먹고 약도 꼭 챙겨 먹으라고 말해줬어야 했는데. 아님, 지금이라도 전화해볼까.
지안은 이내 휴대폰을 들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려놓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있을까.
지난 수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의식 없이 살아야 했던 그를 생각하자, 조금도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
회사에서 마주한 그의 얼굴에선 전에 볼 수 없던 활력이 보였다.
어쩌면 그 활력이 건강에 더 좋은 영향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 정도로만 하면 좋겠는데.
권도하라는 남자는 생각하면 할수록 참 이상한 남자였다.
그 많은 직원을 이끌어 회의를 주관하는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강인하고 든든해 보였었다.
게다가 아까 퇴근할 땐, 저를 어린아이 대하듯 차에 태워 보내고, 보호자처럼 한참 뒤에야 돌아서던 그였다.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버팀목 같은 남자인데, 그런 사람을 왜 이렇게 걱정하게 되는 것인지.
든든한데, 걱정되는 이 마음은 대체 어떤 마음인 건지.
지안은 낯선 감정을 애써 추스르고 천천히 침대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까지 아무 연락이 없는 거로 봐서 그는 아마 많이 늦을 예정인 것 같았다.
언제까지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내일 출근을 위해서라도 먼저 눈을 붙여야 했다.
매트리스에 등을 붙이고 눕자, 하루의 노곤함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눈 감기 무섭게 지안의 숨소리는 금세 쌔근쌔근 고르고 일정하게 변해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이 든 건, 약간의 인기척과 후각을 자극해오는 은은한 향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스르르 눈을 뜬 순간.
생각지도 못한 것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분홍색 거베라와 하얀 리시안셔스, 하젤 장미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파스텔톤의 꽃다발.
고작 꽃을 들기엔 필요 이상으로 두터운 팔과 멋쩍은 듯 먼 산을 보고 있는 남자의 시선이 차례차례 눈에 들어왔다.
지안은 커다래진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나직이 물었다.
“이…… 이게, 뭐예요?”
“……그냥, 지나가다…… .”
“…….”
“당신 닮은 게 보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