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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흔들리지 마 (46/110)

46화. 흔들리지 마 2022.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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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간 전. 늦은 시각이라 가는 곳마다 불이 꺼지고, 영업 종료 팻말이 걸려 있었다. 도하는 서울 시내에 있는 꽃집이란 꽃집은 모두 헤집을 요량으로 집요하게 뛰어다녔다. 꽃을 선물하라고 알려준 승훈은 왜 꽃집이 몇 시에 문 닫는지와 같은 중요한 얘긴 해 주지 않은 걸까. 한참을 떠돌다 마침내 발견한 한 플라워 숍. 다행히 아직 가게 안에 환한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도하는 무작정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뛰어갔다. 놀란 주인이 급히 조명 스위치를 켜며 말했다.

1654887247184.jpg “어, 손님. 오늘은 영업이 끝났는데요.”

16548872471845.png “…….”

도하는 눈으로 빠르게 꽃 쇼케이스를 훑었다.

16548872471845.png “아직 여기, 꽃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의 막무가내식 화법에 주인은 잠시 당황한 듯 보고 있다가 말했다.

1654887247184.jpg “손님, 죄송합니다만. 다음에 오시면…….”

16548872471845.png “다음은 너무 늦습니다. 오늘 아니면 안 되거든요.”

1654887247184.jpg “네?”

16548872471845.png “허락된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사연은 잘 알 수 없지만 절박해 보이는 그의 눈동자에 주인은 난처한 듯 시선을 굴렸다. 그리고 얼마 후 테이블 위로 가방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1654887247184.jpg “찾으시는 종류가 있으실까요?”

16548872471845.png “……우리 아내. 그 사람 마음에 들만한 거면 뭐든 좋습니다.”

1654887247184.jpg “그럼 평소에 아내분께서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라도 있을까요?”

도하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16548872471845.png “제가 그리 섬세한 남편은 아니라.”

1654887247184.jpg “……그럼, 손님께서 한번 직접 골라보시겠어요?”

16548872471845.png “제가 말입니까?”

1654887247184.jpg “네. 제가 추천해드릴 수도 있지만, 첫 꽃 선물이신 것 같은데, 남편분이 직접 골라 선물하시면 아내분이 더 좋아하실 거예요.”

도하는 주인의 말을 잠시 곱씹다가 꽃 쇼케이스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고심하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집기 시작했다. 지안의 둥글고 발그레한 두 뺨을 닮은 연분홍 거베라.

16548872471845.png “이거.”

희고 고운 피부를 닮은 화이트 리시안셔스.

16548872471845.png “그리고 이거.”

그녀처럼 우아한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하젤 장미.

16548872471845.png “이것도 함께요.”

그의 선택에 주인이 조금 놀란 듯 말했다.

1654887247184.jpg “꽃 선물, 이번이 처음은 아니신 것 같은데? 어떻게 딱 어울리는 것들로만 잘 고르시는데요!”

도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16548872471845.png “……그렇습니까?”

1654887247184.jpg “네. 전문 플로리스트의 선택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조화로워요.”

16548872471845.png “그저, 아내랑 닮은 걸 골랐을 뿐인데.”

그의 말에 주인의 입꼬리가 꾸물꾸물 위로 올라갔다.

1654887247184.jpg “와, 아내분이 굉장히 미인이신가 봐요.”

도하는 지안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16548872471845.png “……네. 그렇습니다만.”

주인은 꽃다발을 만들며 힐끗힐끗 도하를 살폈다. 꽃집을 운영하며 많고 많은 팔불출을 상대했지만,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이토록 담담하고 고상한 팔불출이라니. 게다가 엄청나게 잘생기기까지 한. 꽃다발을 만드는 손길에 누군지 모를 여자를 향한 부러움이 한가득 담겼다. 완성된 꽃다발을 받아든 도하는 마음이 급해졌다. 꽃다발을 품에 안을 지안의 얼굴이 궁금해서였다. 승훈의 조언대로라면 천상의 미소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쉽게 잘 웃지 않는 그녀가 지나치듯 한번 웃어주면 가슴이 주체 못 할 만큼 요동치는데, 천상의 미소라면 대체 어떻게 버텨야 할지. 도하는 벌써부터 그게 걱정이었다. 기다려, 서지안. 당신만큼 예쁜 건 아니지만, 당신을 아주 많이 닮은 걸 가져다줄 테니. 도하의 얼굴의 꽃보다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에 도착한 도하는 금세 또 다른 난관에 봉착했다. 바깥은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서, 차가 있는 곳까지 꽃다발을 들고 들어가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저택 안은 저를 아는 눈들이 수두룩했다. 그는 저택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저를 어려워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꽃다발을 들고 오면 무슨 생각을 할지도. 아마도 사고로 다친 뇌가 아직 다 회복되지 않아, 이상행동을 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꽃의 싱그러움이 사그라들기 전에 그녀의 품에 한 아름 안겨주는 일. 도하가 현관으로 들어서자, 메이드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했다.

1654887247184.jpg “오셨습니까, 도련님.”

16548872471845.png “네.”

메이드가 천천히 고개를 들다가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을 발견하고는 얼른 눈을 돌렸다. 그 찰나의 순간 도하는 똑똑히 보았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감으며, 시선을 피하는 메이드의 눈동자에 가득 고여 있는 웃음기를. 괜스레 걸음이 바빠졌다. 터벅터벅. 2층으로 가는 계단이 평소보다 두 배, 아니 스무 배는 멀게만 느껴졌다. 겨우 방 앞에 다다라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또 하나의 난관이 보였다. 그녀가 잠들어 있을 거라곤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곤히 잠든 얼굴을 보니 마음대로 깨울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꽃이 시들게 그냥 둘 수도 없었다. 도하는 잠든 그녀의 머리맡으로 다가가 한쪽 다리를 굽히고 앉았다. 그러곤 꽃을 그녀의 얼굴 쪽으로 향하게 내밀었다. 싱그러운 모습을 지금 당장 보여주진 못해도 기분 좋은 향기라도 그녀의 꿈결에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 닿은 건지, 오래 지나지 않아 지안이 스르르 눈을 떴다. 감겨 있던 눈꺼풀이 천천히 열리고, 그 속에 구슬보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깨어났다. 지안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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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872471845.png “……그냥, 지나가다…… .”

16548872534561.jpg “…….”

16548872471845.png “당신 닮은 게 보여서.”

말없이 꽃을 바라보던 그녀가 슬며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내심 천상의 미소를 기대했던 도하의 눈동자가 점점 흐릿해졌다. 자신이 직접 고른 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그때 지안이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앉으며 표정 없이 말했다.

16548872534561.jpg “저, 할 말이 있어요.”

  *** 꽃은 몹시 예뻤다. 향긋한 내음도, 당신을 닮았다는 달콤한 고백도.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모두 아름다웠다. 하지만……. 테라스로 나간 두 사람은 캐모마일 두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16548872471845.png “할 이야기라는 게 뭐지?”

도하의 목소리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갈급함이 느껴졌다. 지안은 입가로 기울였던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입술을 뗐다.

16548872534561.jpg “아까 집 앞에 민하린 씨가 찾아왔었어요.”

16548872471845.png “……뭐?”

16548872534561.jpg “비록 2개월짜리 시한부 부부이지만, 그래도 그 기간만큼은 서로 비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차분하면서도 논리적인 그녀의 말에 도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은 다시금 말을 이어갔다.

16548872534561.jpg “찾아온 목적은 두 가지 같았어요.”

16548872471845.png “두 가지?”

도하가 눈썹 사이를 좁히며 되물었다.

16548872534561.jpg “네. 하나는 지세준 대표와 레스토랑에 갔던 일에 대해 추궁하려는 거였고.”

16548872471845.png “…….”

하린이 찾아왔다는 이야기에 그도 충분히 예상한 시나리오였다.

16548872534561.jpg “다른 하나는…….”

지안이 잠시 뜸을 들이자, 도하는 나직이 말했다.

16548872471845.png “괜찮아. 말해 봐.”

16548872534561.jpg “제 뒷조사를 한 것 같더라고요. 저도 잘 모르는 제 아버지라는 사람의 근황을 얘기해 주더군요.”

16548872471845.png “……뭐?”

도하의 눈이 순간 날카로운 빛을 띠고 커졌다.

16548872534561.jpg “지금은 죄를 짓고 수감 중인데, 죄목도 다양하다고…….”

지안은 그 말을 하고는 잠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도하는 그녀의 작은 표정 변화만으로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린이 그녀를 찾아와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저급한 목적도 너무도 쉽게 읽혔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도하가 나직이 말했다.

16548872471845.png “미안해, 서지안.”

16548872534561.jpg “……!”

갑작스러운 사과에 지안의 눈동자가 커졌다.

16548872534561.jpg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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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872534561.jpg “……이건 도하 씨 잘못이 아니잖아요. 도하 씨가 시킨 것도 아니고. 그냥 민하린이라는 여자 혼자 미련이 남아서 그러는 거라는 거. 그 정도는 저도 알아요.”

16548872471845.png “정말 그렇게 생각해?”

16548872534561.jpg “……네.”

16548872471845.png “알아줘서 고마워. 당신이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럼 더는 미안해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당신도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눈곱만큼도.”

16548872534561.jpg “……!”

지안은 순간 목구멍이 막혔다. 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제 아버지라는 사람의 일로, 혹시 당신과 당신 회사가 곤란한 일을 겪게 되진 않을까 고민이 된다고. 이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해 미안하다고. 아직 말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먼저 사과를 사양했다.

16548872534561.jpg “도하 씨. 하지만.”

16548872471845.png “당신 잘못이 아니잖아. 당신에겐 할머니가 엄마였고 아빠였지, 다른 부모는 없었다고 하지 않았나.”

16548872534561.jpg “……!”

16548872471845.png “당신이 인정하지 않은 부모는 내게도 남이야. 그 사람들이 누구든, 무슨 죄를 지었든 나랑도, 우리 케이원과도, 그리고 당신과도 아무 상관없어.”

16548872534561.jpg “……!”

16548872471845.png “그러니까 조금도 흔들리지 마.”

16548872534561.jpg “…….”

도하가 그 말을 하며 가늘게 떨리던 지안의 손을 굳게 붙잡았다. 얼마간의 침묵을 깨고 그가 나직이 물었다.

16548872471845.png “민하린한테는 뭐라고 했지? 천하의 서지안이 휘둘리진 않았을 텐데.”

지안은 숙였던 고개를 들어 또박또박 말했다.

16548872534561.jpg “……혈연, 연좌제 같은 거로 협박하려 하지 말라고. 나한테는 안 통한다고. 그렇게 쏘아붙였어요.”

굳었던 도하의 얼굴이 펴지며 그 위로 생기가 피어올랐다.

16548872471845.png “그래. 그 말이 내가 당신한테 해 주고 싶은 말이야. 그 마음을 절대 잊지 마. 어떤 상황이 와도.”

중저음의 낮은 목소리가 묵직하게 지안의 가슴을 울렸다. 가슴 한 곳에 납처럼 무거운 것이 쿵 가라앉는 느낌과 함께 코끝이 금세 붉어졌다. 어쩌면 이 말이 듣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제아무리 당당하게 말했다지만, 피해를 보는 건 자신이 아니라 도하와 정순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의 중압감을 느꼈다. 한데 이렇게 따듯하게, 차분하게, 섬세하게 어루만져주니 차갑게 언 마음이 녹아 흐를 수밖에. 지안의 눈에서 가슴 졸였던 한줄기 흔적이 떨어지자, 도하의 눈이 순간 커졌다.

16548872471845.png “……서지안, 우는 거야?”

16548872534561.jpg “…….”

지안은 고개를 돌리며 애써 눈물을 감추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투명한 두 눈이 유리알처럼 위태롭게 부서지며 남긴 뜨거운 눈물 자국. 도하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일어나 그녀의 옆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16548872471845.png “천천히 오라고,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16548872534561.jpg “…….”

16548872471845.png “자꾸 이러면 그럴 수가 없잖아."

16548872534561.jpg “……!”

16548872471845.png “안아주고 싶게 만든 건, 너야.”

단단한 팔이 그녀의 작은 어깨와 등을 금세 보듬어 커다란 품 안으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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