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7화. 할머니의 선물 (47/110)


47화. 할머니의 선물
2022.05.13.


16548872719946.jpg

 
하린은 분이 가시지 않은 듯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여전히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히 재생되고 있었다.

16548872719952.jpg

‘혈연, 연좌제. 그런 시대착오적인 거로 저를 협박하려던 거라면 사람 잘못 보셨어요. 저한테는 안 통해요! 그러니까,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또 찾아오면 그땐 경찰 부를 거예요!’

한마디도 끼어들 수 없게 틈을 주지 않고 쏘아붙이던 여자.

16548872719957.png

“날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감히 나를?”

저보다 훨씬 작은 키에,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몸집. 대체 어디서 그런 악다구니가 나오는 건지 알 수 없는 여자.

그런 여자에게 제압당했다는 불쾌감이 자꾸만 하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무엇보다 화가 나는 건, 서지안에게 먼저 접근한 게 세준이라는 사실이었다.

16548872719957.png

“나랑 약혼까지 해 놓고 그 여자는 대체 왜!”

당장이라도 세준을 붙잡고 따지고 싶었지만, 그의 전화기는 몇 시간째 꺼져 있었다.

하린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허공을 쏘아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16548872719957.png

“지세준, 들어오기만 해 봐!”

침실 밖으로 나간 그녀는 세준이 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서지안에게 접근한 건지, 요새 무슨 일을 하고 다니기에 매일 귀가가 늦어지고 있는 건지. 서재에 가보면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16548872719972.png

‘서재엔 함부로 드나들지 마. 특히 내가 없을 땐.’

언젠가 그가 지나치듯 했던 경고가 떠올랐지만, 지금의 하린에게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재 문을 열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도둑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방 안을 살폈다.

그리고 책상 쪽으로 다가가 그 위에 쌓여 있는 책과 어지럽혀진 서류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바쁘게 서류를 넘기던 손길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순간 느려졌다.

16548872719957.png

“이게 뭐야?”

[미국 필라델피아 홈 딜리버리 박람회 국내 참가 업체 현황]

- 국내 1위 딜리버리 기업 CTM 지세준 대표 외 직원 20명
- 케이원 그룹 권도하 대표 외 직원 14명

미국 홈 딜리버리 박람회?

문서 중간에 적힌 일시를 확인하던 그녀의 눈이 커다래졌다.

16548872719957.png

“뭐야, 며칠 안 남았잖아!”

출국일이 임박하도록 그는 미국 출장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다. 연애 초만 해도 세준은 해외 일정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하린을 빠짐없이 대동했었다.

그런 그가 이번 출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건…….

하린은 안면을 일그러뜨리며 마른 입술을 짓씹었다.

다시금 서류를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케이원 그룹 권도하 대표’라는 이름이 보였다.

도하가 박람회에 참가한다면, 아내이자 비서인 서지안이 빠질 리 없었다.

설마 세준이 이번 출장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은 건, 저 모르게 또 그 여자에게 접근하려는 수작은 아니었을지.

한 번 시작된 의심은 점점 더 강한 집착으로 번져갔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겨우 문서로 돌린 하린의 눈에 박람회 장소가 들어왔다.

[미국 필라델피아]

뜻밖에도 행사가 열리는 곳은 미국 유학 시절, 도하와 그녀가 처음 만난 도시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도시 곳곳에 두 사람이 만든 추억이 남아 있는 곳.

생각이 거기에 이르자 하린은 머리를 한 대 강하게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이 안 통하는 서지안을 회유하는 것보다, 언제 배신할지 모를 지세준을 감시하는 것보다, 어쩌면 도하에게 첫사랑의 마음을 기억하게 하는 게 빠를지도 몰랐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던 흥미로운 말이 새삼 그녀의 가슴을 흔들었다.

어쩌면 이번이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절호의 기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이 가득 어렸던 하린의 안면 위로 스산한 빛이 조금씩 스며들고 있었다.

***

화병에 꽃을 꽂는 손길이 섬세하고 정성스러웠다.

지안은 한 송이 한 송이 소중하게 다루며 싱긋 미소 지었다.

도하는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대놓고 감상하다가 말했다.

16548872719987.png

“꽃이 마음에 안 드는 줄 알았는데.”

16548872719952.jpg

“……꽃이 어떻게 마음에 안 들 수가 있어요! 이렇게 예쁘고 향기로운데. 게다가…….”

지안이 말끝을 살짝 흐리자 도하가 바로 물었다.

16548872719987.png

“게다가?”

16548872719952.jpg

“……이게 제 인생 첫 번째 꽃다발이거든요.”

16548872719987.png

“뭐?”

뜻밖의 말에 그의 눈이 순간 커졌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첫 꽃다발을 선물한 남자가 됐다는 것이 마치 굉장한 트로피를 얻은 것처럼 흥분됐다.

하지만 가슴에 차오르는 기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게 왠지 멋쩍어 괜히 딴청을 피웠다.

16548872719987.png

“크흠, 첫 번째 꽃다발은 아니겠지. 초, 중, 고, 대학까지. 졸업식이 몇 번인데.”

그의 말에 대답 대신 잠시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이상함을 느낀 도하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꽃을 보는 지안의 눈망울이 왠지 모르게 깊어져 있고, 분주하던 손길도 사뭇 차분해졌다.

16548872719952.jpg

“…….”

도하는 나직이 그녀를 불렀다.

16548872719987.png

“서지안?”

제 이름을 듣고 놀란 지안이 눈을 크게 깜빡이며 말했다.

16548872719952.jpg

“……어, 미안해요. 잠깐 할머니 생각이 나서.”

16548872719987.png

“……할머니?”

지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16548872719952.jpg

“너무 조숙한 손녀가 할머니로서는 별로였을 거 같아요. 축하할 기회조차 모두 빼앗아 버렸으니.”

16548872719987.png

“…….”

도하는 말없이 그녀가 이야기할 수 있게 기다려 주었다.

16548872719952.jpg

“할머니가 졸업식 때마다 꽃다발을 사주고 싶어 하셨거든요. 근데 제가 꽃다발 같은 거 절대 사 오지 말라고 그랬어요. 비싼 돈 주고 곧 시들 쓰레기를 사는 건 낭비라면서.”

16548872719987.png

“…….”

16548872719952.jpg

“할머니가 힘들게 번 돈인데, 그런 데 쓰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런 건데. 나중에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러시더라고요. 졸업식 날 꽃 한번 사주지 못한 게 미안하다고. 그게 할머니 가슴에 한이 될 줄 알았으면, 그냥 받는 건데. 꼭 사와 달라고 부탁하는 건데.”

지안의 마음도, 그녀 할머니의 마음도 이해가 되어 도하는 한동안 가슴이 먹먹했다.

분위기가 무거워지려 하자, 그가 애써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16548872719987.png

“할머니 몫까지 내가 더 많이 사줄게.”

16548872719952.jpg

“……네?”

16548872719987.png

“그때마다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고 받아. 내가 아니라 할머니가 주신 거다, 하고.”

16548872719952.jpg

“……!”

어느새 그렁그렁해졌던 눈가가 바보처럼 둥글게 휘었다.

할머니가 주신 거다.

그 말이 지안의 가슴에 깊이 박혀 들어왔다.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이 모든 게 정말 할머니가 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정순과 인연을 맺게 되었고, 외로울 틈 없는 시간을 보냈다.

어떤 대화도 나눌 수 없는 남자였지만 곁에 있다는 것으로, 여전히 숨 쉬고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는 것에.

그리고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바위처럼 미동 없이 잠들어 있던 남자가 내미는 꽃다발을 받게 될 거라고는, 그가 손을 내밀어 제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고, 뜨거운 가슴 안에 저를 가둘 거라곤 상상도 못 했었다.

어쩌면 이 말도 안 되는 모든 것들을, 할머니가 주신 건 아닐지.

태어날 때부터 외로웠던 손녀가 안쓰러워서, 떠나는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더는 혼자이지 말라고.

이렇게…… 이렇게…….

깊어진 생각에, 저릿한 가슴에 지안의 고개가 천천히 무너지던 그때.

뒤에서 뜨겁고 강한 몸이 저를 폭 감아 안았다.

16548872719952.jpg

“어!”

16548872719987.png

“잠깐, 잠깐만 이렇게 있어.”

등 뒤에서 들려온 뜨거운 목소리.

평소였다면 몸부림을 쳐서라도 밀어냈을 테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 생각을 하면 저도 모르게 추워지는 가슴이, 뜨거운 온기를 만나 금세 포근해졌다.

춥지 않고 따듯했다. 외롭지 않고 포근했다.

지안은 천천히 입술을 떼 나직이 속삭였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간 마음 깊은 곳의 진심.

16548872719952.jpg

“……고마워요.”

그녀의 등 뒤에 있던 도하의 얼굴이 순간 창백할 정도로 상기되었다. 잠시 넋이 나간 듯 멍해져 있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16548872719987.png

“……뭐가?”

16548872719952.jpg

“그냥요. 그냥…….”

저도 모르게 뱉은 진심에 당황한 지안도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 무언가를 보곤 안심하며 말했다.

16548872719952.jpg

“꽃이요. 꽃 선물해 주셔서 고맙다고요.”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평소보다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고마워요.’라고 말을 걸어온 순간, 도하는 세상을 다 얻은 듯 두려울 게 없어졌다.

이렇게 작은 어깨, 이렇게 야윈 몸. 이렇게 작은 여자의 말 한마디에 세상을 다 얻게 된 것 같은 기쁨을 느끼다니.

도하는 스스로가 바보처럼 우스우면서도, 한 사람 때문에 먹통이 된 제 모습이, 이 상태가 싫지 않았다.

지안은 여전히 화병에 든 꽃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꽃이 그렇게도 예쁠까.

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을 눈앞에 둔 도하는 단 한 번도 화병에 눈길을 주지 않았다. 미소 짓는 지안을, 그녀를 전부 눈에 담기에도 모자란 시간이었으니까.

꽃향기가 방안 가득, 두 사람의 가슴 가득 진동하는 밤이었다.

16548872791103.png

 

***

며칠 후.

지안은 커다란 여행용 가방을 바닥에 펼쳐 놓고 차곡차곡 짐을 싸고 있었다.

옷가지보다 각종 약품과 구급 용품이 캐리어 안을 가득 채웠다.

그때 옆으로 다가온 정순이 무언가를 아래에 내려두며 말했다.

16548872791107.png

“지안아, 이것들도 같이 챙기렴.”

정순이 가져온 것을 보던 지안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16548872719952.jpg

“하, 할머님……!”

16548872791107.png

“이건 묵은지고 이건 고추장, 이건 김이랑…….”

커다란 김치통 크기에 놀란 지안이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데, 때마침 2층으로 올라온 도하가 그 광경을 목격하고는 다가왔다.

그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는 듯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16548872719987.png

“할머니, 저희 겨우 열흘간 출장 가는 거라고요. 누가 보면 이민 가는 줄 알겠어요.”

도하의 말에 정순이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말했다.

16548872791107.png

“녀석! 너는 미국 생활이 익숙할지 몰라도 우리 지안이는 이번이 처음이라 매콤하고 칼칼한 것들이 많이 생각날 거야. 10일간 느끼하고 기름진 것만 먹으면 우리 지안이 같은 토종 한국인은 절대 못 버틴다!”

지안은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다는 말을 아껴두고, 정순의 고마운 마음을 그대로 받았다.

16548872719952.jpg

“고맙습니다, 할머님. 맞아요. 저 고추장 힘으로 사는 신토불이라서 걱정됐었는데, 챙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안이 캐리어 안에 정순이 가져온 것들을 모두 넣으려 하자, 도하가 손을 덥석 뻗어 막으며 말했다.

16548872719987.png

“이걸 정말 다 가져가겠다고? 미국에도 한식당은 얼마든지 있어.”

16548872719952.jpg

“……한식당이랑 할머니가 직접 담그신 고추장이랑 어떻게 비교해요.”

지안의 한마디에 정순은 흐뭇하게 웃으며 1층으로 내려갔다.

도하는 못 말린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직이 말했다.

16548872719987.png

“대충 정리 다 끝났으면 잠깐 내려와.”

16548872719952.jpg

“……네?”

16548872719987.png

“떠나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으니까.”

16548872719952.jpg

“가야 할 곳이요?”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