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지켜줄게
(48/110)
48화. 지켜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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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지켜줄게
2022.05.16.
서울을 벗어나 외곽으로 진입했는지 화려하게 수놓아졌던 도시의 불빛이 점차 희미해졌다.
“어디 가는 건데요?”
“……가보면 알아.”
운전대를 잡은 도하가 한쪽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며 말했다.
캄캄한 밤이라 창밖은 짙은 어둠뿐이었다.
지안은 조그마한 힌트라도 찾으려는 듯, 연신 창밖을 살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눈에 익은 풍경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지안은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낮게 뱉었다.
“여, 여긴…….”
3년 전. 빛바랜 어느 날의 기억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갔다.
할머니를 저 먼 곳으로 떠나보내던 마지막 날.
장례가 끝나는 순간까지 지안의 곁을 지켜준 정순은 그녀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원래 할머니는 저렴한 시립 봉안당에서 영면할 예정이었지만, 정순은 그보다 나은 곳이 있다고 했다.
지안이 가진 돈으로는 엄두조차 낼 수 없는 프라이빗하고 고급스러운 봉안당.
건물의 용도를 밝히지 않는다면, 갤러리나 카페라고 해도 믿을 만큼 안락한 곳이었다.
하지만 지안은 정순의 호의를 쉽게 받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3일 동안 함께 있어 주신 것만도 감사한데, 이런 도움까지 받을 순 없어요.’
지안의 정중한 사양에도 정순은 물러서지 않았다.
‘3일간 같이 있어 준 건, 이 할미가 우리 손주 구해준 은인분께 하는 사례고. 이 봉안당은 우리 도하 엄마 아빠가 지안 양께 드리는 마음입니다.’
‘……네?’
‘지안 양이 구해준 내 손주 도하, 그 애 엄마 아빠가 여기 잠들어 있거든.’
‘……!’
‘하늘나라에서 그 아이 엄마 아빠도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고작 이것밖에 도움을 못 줘서 미안하니까 사양하지 말고 받아줘요.’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할머니를 모시게 된 곳.
차가 봉안당 앞에서 멈춰 서자 지안은 천천히 도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도하도 그녀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며 나직이 속삭였다.
“이역만리 먼 곳으로 떠나는데, 어른들께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
“당신도 나도, 3년간 얼굴도 제대로 비추지, 못했잖아.”
어떻게 알았을까. 요즘 부쩍 할머니 생각이 났다는 걸.
하린에게 아버지라는 사람의 근황을 듣고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할머니의 얼굴이었다.
아들이 죄를 짓고 수감 중이라는 사실을 할머니가 알면 얼마나 속상해하고 아파할지. 저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아무 감흥이 없지만, 할머니는 그게 아닐 테니까.
도하에게 꽃을 받은 순간에도, 지안은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선연했다. 졸업식 날 꽃다발을 못 준 게 한이라며 일그러지던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
지안은 금세 먹먹해진 감정을 애써 감추며 차에서 내렸다.
봉안당 입구로 들어서던 그녀의 눈에 평소와 달리 처연해 보이는 도하의 얼굴이 보였다. 늘 단단하기만 하던 까만 눈동자가 왠지 모르게 서글퍼 보였다.
그러고 보면, 그야말로 3년 만에 부모님을 만나러 온 길이었다. 그녀는 몇 차례 시간을 내 할머니를 보러 왔지만, 도하는 아니었다. 저보다 더 많이 이곳을 그리워했을지 모를 남자.
그 생각이 들자 가슴이 아렸다.
지안은 도하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서며 말했다.
“도하 씨 부모님 먼저 뵈어요.”
“……뭐?”
“저는 할머니 보러 몇 번 왔었거든요. 도하 씨는 3년이나 못 왔잖아요.”
“…….”
도하가 깊어진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자, 지안은 멋쩍은 듯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도하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네?”
“그럼.”
***
하늘나라로 떠나기엔 너무도 젊은 남녀의 영정 사진이 놓인 추모 공간 앞에서 도하의 걸음이 멈춰 섰다.
도하는 영정 사진 속 두 사람의 얼굴을 말없이 눈에 담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사진을 바라보는 눈동자에 슬픔이 가득 고이려는 순간, 도하는 고개를 돌려 지안에게 말했다.
“뭐 해, 당신.”
“……!”
“며느리도 인사드려야지. 시어머니, 시아버지께.’
그 순간 지안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괜찮겠냐던 그의 물음이 무슨 뜻이었는지, 그제야 살갗에 와 닿았다.
저를 아내이자, 며느리로 부모님께 소개하려고 그랬다는 걸.
도하는 놀란 지안의 얼굴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어서 앞으로 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지안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영정 사진 앞으로 가까이 다가섰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셨죠. 너무 오랜만에 찾아뵈어서 죄송해요.”
지안의 인사에 도하는 놀라 눈을 키우며 물었다.
“우리 부모님, 오늘 처음 뵙는 거 아니었나?”
지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하 씨 의식 없는 동안, 할머님이 회사 일로 많이 바쁘셨어요. 그래서 제가 할머니 뵈러 올 때 잠깐씩 도하 씨 부모님께도 들렸었거든요. 도하 씨 소식을 누구보다 궁금해하실 분들이니까.”
“…….”
도하의 눈앞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풍경들이 멋대로 그려졌다.
‘어젯밤엔 잠깐 위험한 쇼크가 왔었어요. 너무 무서웠는데…… 그래도 도하 씨가 제법 잘 버텨줬어요. 조금만 더, 좀 더 힘내라고 도하 씨에게 힘을 주세요. 그곳에서 꼭 도하 씨를 지켜주세요.’
‘도하 씨는 점점 더 건강해지고 있어요. 강 박사님 말씀이 곧 의식을 되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거든요.’
낯선 영정 사진 앞을 오래도록 떠나지 못했을 작은 실루엣.
그 실루엣이 눈앞의 지안과 겹치자, 도하의 가슴이 뜨겁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도하 씨?”
지안이 눈썹 사이를 좁히며 유심히 보자, 도하가 정신을 차리며 대꾸했다.
“응.”
다시 부모님의 영정 앞에 선 도하가 나직이 말했다.
“내일 이 사람과 미국으로 떠나요. 떠나기 전에 두 분께 인사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 사람, 제 아내도 보여드리고 싶었고요.”
“……!”
“아들이 3년 동안이나 잠수 탔다고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대신 이렇게 예쁜 와이프를 데려왔으니까.”
그 말을 하며 도하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왜 마음대로 저를 아내라고 소개하냐며, 투정조차 뱉을 수 없을 만큼 안쓰러운 미소였다.
도하 부모님의 추모 공간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지안의 할머니의 유골함이 있었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노파의 영정 앞에 다가선 지안이 아이처럼 외쳤다.
“할머니!”
할머니 앞에만 서면 영원한 아이가 되는지 지안은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표정이었다.
“할머니, 잘 지냈어요?”
지안은 영정 사진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녀가 너무 오랜만에 왔다고 삐졌구나. 우리 할머니! 내 손도 안 잡아주고.”
영정 사진 속 주름진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리며 잠시 입술을 굳게 문 모습이 안쓰럽기 그지없었다.
도하는 지안의 얼굴을 가만히 눈에 담다가, 그녀의 눈가가 촉촉해지려는 순간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할머님, 처음 인사드리겠습니다.”
도하가 옆자리를 비집고 다가오자 지안은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나며 벙찐 표정을 지었다.
“지안이 남편, 권도하라고 합니다.”
“도하 씨!”
지안이 목소리를 낮춰 부르며 그만하라는 눈빛을 보냈지만, 도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두 달 후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이에 동네방네 부부라고 소문을 내고 다니는 남자를 어떡하면 좋을까.
“할머님이 얼마나 이 사람을 아꼈는지 압니다. 할머니만큼은 못 할지 모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이 사람을 지키겠습니다.”
쓸데없이 진지한 눈빛과 무게감 있는 묵직한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을 울렸다.
한동안 그곳에 머물다가 돌아 나오는 길.
지안은 도하를 꾸짖듯 말했다.
“돌아가신 분 앞에서 그렇게 진지하게 거짓말하면 나중에 벌 받아요. 그러니까…….”
도하가 그녀의 말허리를 단호히 끊으며 말했다.
“거짓말 아니야.”
“…….”
“지켜보라고.”
“……!”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서라도 한 사람만은 꼭 지켜낼 거니까.”
쿵쾅쿵쾅.
미친 듯 두방망이질 쳐대는 심장.
사그라지지 않는 남자의 저돌적인 눈빛에 그녀의 두 눈이 초점을 잃고 하염없이 흔들렸다.
***
세준은 공항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서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단아한 차림의 승무원이 다가와 말했다.
“고객님, 비행기 탑승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준은 비즈니스용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탑승 게이트로 가는 짧은 시간 동안 세준은 승무원에게 시시한 농담을 던지며 작업을 걸었다.
승무원은 한시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건치를 드러낸 채 웃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세준은 만족스러운 듯 미소 지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어디선가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승무원의 에스코트를 받아 기내에 오른 그는 잠시 안경을 벗어두고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옆자리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익숙한 향기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세준이 천천히 눈을 뜬 순간, 선글라스를 쓴 옆자리 여자가 보였다.
그의 고개가 여자를 향해 멈춰 선 순간, 여자가 쓱 선글라스를 벗었다.
“미, 민하린!”
놀난 세준이 기함하듯 외치자 하린이 차게 식은 얼굴로 대꾸했다.
“뭘 그렇게 놀라?”
“……네가 어떻게 여길!”
“왜, 내가 오면 안 될 곳에 오기라도 한 거야?”
“……그, 그게 아니고. 네가 어떻게 알고.”
“세준 씨, 해외 출장 땐 내가 늘 동행했었잖아. 요새 세준 씨가 많이 바빠서 나까지 챙길 여력이 없는 것 같길래. 내가 노 실장님께 부탁해서 준비했어.”
“……뭐?”
“왜, 내가 잘못한 거야? 당신 표정이…….”
하린의 입매가 뒤틀리자, 세준은 하는 수 없이 대답했다.
“아냐, 놀라서 그런 거야. 집에선 아무 말도 없었잖아.”
“서프라이즈 해 주려고 그랬지! 세준 씨 이벤트 좋아하잖아.”
“……서, 서프라이즈. 그, 그래.”
세준의 입꼬리가 가파르게 추락하자, 하린은 고개를 돌려 입술을 짓씹었다.
그때 저만치 앞에서 승무원의 안내를 받아 탑승하는 남녀가 보였다.
하린의 눈가 근육이 거칠게 씰룩거렸다.
***
인생 첫 비행을 앞둔 지안의 얼굴은 짙은 긴장감으로 얼룩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등학생 때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갔어야 했다.
학생들과 학부모 투표로 선정된 수학여행지는 차로 갈 수 있는 곳보다 비싼 비행깃값이 포함된 제주도였다.
할머니는 수학 여행비를 마련해 뒀다고 안심시켰지만, 지안은 한사코 마다했었다. 수학여행 후 얼마 남지 않은 중간고사를 준비하겠다는 핑계였다.
친구들이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나, 기념품을 자랑했을 때도 지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17시간이 넘는 비행을 앞둔 지금, 그때 비행기를 타보지 않았던 게 조금 후회됐다.
그녀의 상기된 낯빛을 읽은 도하가 나직이 말했다.
“긴장하지 마.”
“…….”
“내가 말했을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한 사람만은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아직 이륙 전임에도, 공중으로 붕 뜬 심장이 미친 듯 튀어 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