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숨바꼭질
(49/110)
49화. 숨바꼭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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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숨바꼭질
2022.05.20.
“우와.”
지안은 비행기 창 밖으로 보이는 솜사탕 같은 구름에 눈을 떼지 못했다.
태어나 처음 보는 아름다운 광경에 그녀의 가슴은 경이로움으로 물들었다.
도하는 그런 그녀의 순수한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오랜 유학 생활과 잦은 출장으로 지겹게 오른 비행기가 그에겐 새로울 리 없지만, 그녀와 함께하는 이번 일정만은 조금 달랐다.
마치 처음 비행기에 올랐던 그 날처럼 알 수 없는 떨림이 가슴에 일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낯선 세계에 들어선 초심자의 순수한 눈빛.
그 눈빛이 두려움으로 물들지 않게 지켜줘야 한다는 책임감.
그 모든 걸 다 떠나서 지금 여기 이렇게 함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
지안을 바라보는 도하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스몄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행기가 소용돌이치듯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놀란 지안이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웅크리자 도하가 나직이 속삭였다.
“잠깐 난기류를 만나서 그래. 금방 지나갈 거야.”
흔들리는 비행기와 달리 작은 흔들림조차 없는 그의 목소리에 지안은 묘한 위안을 받았다.
어떤 상황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 그의 까맣고 단단한 눈동자를 보면 저도 모르게 기대고 싶어진다는 걸 그는 알까.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모든 순간 제 손길이 필요했던 남자였는데, 이제는 기대고 싶을 만큼 든든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지안은 제 옆에 나무처럼, 바위처럼 듬직하게 버티고 있는 도하를 보며 조금씩 긴장감을 내려놓았다.
정말 그의 말대로 잠시 지나가는 난기류에 불과했다.
다시 비행기 안으로 평온함이 깃들자 스르르 졸음이 몰려왔다.
신선처럼 구름 위에서 자는 기분 좋은 잠.
이 모든 게 지난 3년간 간병인 침대에서 쪽잠을 잤던 것에 대한 보상처럼 느껴졌다.
단잠에 들었던 그녀가 스르르 눈을 떴을 때, 마침 기내식이 나오고 있었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잠만 잤을 뿐인데, 기내식을 보자 허기를 느끼는 스스로가 신기했다.
“꼭꼭 씹어 먹어.”
그가 옆자리에서 마치 아이에게 하듯 다정한 잔소리를 보냈다. 그 잔소리조차 하늘 위에선 왠지 모르게 낭만적으로 들렸다.
지안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맛있게 드세요.”
먹고 다시 잠들고, 또다시 깨어나 식사하고. 마치 먹고 자는 것이 주요한 임무인 아기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비몽사몽 하는 사이 한 번의 환승을 거쳐, 총 17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필라델피아 국제공항.
장시간 비행에 두 어깨 위로 내려앉은 피로가 공항 밖으로 나가는 순간, 모두 씻긴 듯 날아갔다.
“와!”
건조해진 입술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었다.
한국과 다른 빛깔의 밤하늘과 은은한 조명 사이로 보이는 이국적인 건물들.
살결을 스치는 낯선 공기와 귓가를 울리는 낯선 언어가 그녀의 심장을 흔들었다.
두근두근.
생애 첫 이국땅을 밟은 지안의 얼굴 위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설렘이 가득 번졌다.
공항 앞으로 함께 출장길에 오른 케이원 직원들이 하나둘 집합했다.
“대표님.”
승훈의 목소리에 도하는 그녀에게 잠시 기다리라는 눈빛을 보내고는 잠시 자리를 옮겼다.
승훈은 직원들과 거리를 둔 곳에서 도하에게 무언가를 보고하고 있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도하가 한 번씩 고개를 끄덕여 승훈의 말에 호응하는 게 보였다.
주변을 지나가는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그의 얼굴은 솜씨 좋은 조각가의 작품처럼 빛이 났다.
멍하니 그의 얼굴을 눈에 담던 지안의 시선이, 무심코 그가 던진 시선과 허공에서 정통으로 맞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지안이 눈길을 얼른 다른 곳으로 돌리자, 도하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위로 올라갔다.
승훈과 이야기를 마친 그는 직원들이 모인 곳으로 가 말했다.
“모두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은 숙소로 돌아가 푹 쉬시고, 내일 박람회장에서 보도록 합시다.”
승훈의 지휘로 직원들은 미리 대절해 둔 버스에 올랐다.
지안이 그들을 따라 버스 쪽으로 가려 하자, 도하가 그녀의 캐리어를 빼앗듯 붙잡아 제 손으로 옮기며 말했다.
“서 비서는 나랑 잠시 박람회장에 들렀다 숙소로 갈 예정입니다.”
"박람회장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그녀가 눈썹을 높이 들어 올리던 그때, 고급 세단 한 대가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
공항을 나온 하린은 무언가를 발견하곤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지안의 캐리어를 사수한 도하가 그녀를 에스코트해 세단에 오르고 있었다.
“누가 보면 신혼여행이라도 온 줄 알겠어!”
한쪽으로 비딱하게 올라간 그녀의 입매가 파르르 떨렸다.
그때 세준이 하린이 있는 곳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곧 차 올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객실을 좀 더 큰 거로 잡는 건데.”
말의 요지는 숙소가 둘이 쓰기엔 좁다는 뜻이었지만, 그 속내에는 저를 불청객 취급하는 마음이 녹아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린은 경련이 난 듯 떨리는 안면 근육을 애써 다스리며 말했다.
“아니야. 세준 씨. 나 호텔 다른 곳으로 잡았어.”
“……뭐?”
세준이 놀란 듯 눈썹을 높이 치켜올렸다.
“저번에 자기, 런던 출장 때 말이야. 내가 시차 적응을 못 해서 매일 새벽에 깼었잖아. 그때 나 때문에 당신까지 잠도 못 자고, 바이어들 만나느라 애먹은 것 같아서. 이번에는 편하게 일 보라고.”
“뭐?”
조금 놀란 듯 되물었지만, 세준의 얼굴에는 이미 감출 수 없는 화색이 돌고 있었다.
“당신 일하는데 내가 방해되어선 안 되니까.”
하린이 그를 생각하듯 말하자, 세준은 저도 모르게 뱉을 뻔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애초에 따라오지 말았어야지.’
하지만 그 말을 했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불 보듯 뻔했다.
세준은 애써 표정을 숨기며 차분히 말했다.
“그렇다고 호텔을 다른 곳으로 잡을 필요까진 없잖아. 객실을 두 개로 쓰면 되는데.”
“……아니야. 같은 호텔에 있으면 객실이 달라도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일 거야. 대신 짬 날 때마다 우리 데이트해야 하는 거 알지?”
“……정말 그래도 괜찮겠어?”
“그럼. 걱정하지 마. 여기에 내 친구들 많은 거 세준 씨도 알잖아. 걔들 만나는 일정만으로도 꽉 찰 것 같아.”
“……그래. 그럼. 차 오면 먼저 타고 가.”
세준의 말에 하린은 격하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야. 난 택시 타고 갈게. 중간에 들러야 할 곳도 있고.”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세준의 미간이 좁아 들었다.
“아, 피곤하다. 나 그럼 먼저 가볼게. 세준 씨도 얼른 숙소 가서 쉬어.”
그러곤 하린은 급하게 택시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세준은 멀어지는 그녀를 눈에 담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체 무슨 꿍꿍이로 저러는 거지, 민하린.’
생각에 잠긴 세준의 귓가로 노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노 실장님.”
“내일 9시 이전에 박람회장으로 나오셔야 조직회 측 인사들과 미팅을 할 수 있다는 점 잊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세준이 말을 흐리자 노 실장의 눈이 커졌다.
“말씀하십시오.”
“나 모르게 내 약혼녀와 연락을 주고받으신다고요, 노 실장님.”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번 출장 건 말입니다. 노 실장님이 하린이가 여기 오는 걸 도와줬다면서요?”
그의 말에 노 실장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말했다.
“대표님께서 지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가씨께서 저와 직접 상의해 준비하라고 대표님이 그러셨다고.”
“……하.”
하린의 장난에 세준의 입꼬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약혼녀가 거짓말을 했군요. 도대체 무슨 속인지.”
“…….”
“방금 다른 호텔을 잡았다고 혼자 갔습니다. 어디로 간 건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노 실장님이 좀 알아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세준은 하린이 택시를 타고 사라진 곳을 멀거니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
세단이 으리으리한 외관의 한 호텔 앞에 멈춰 서자, 지안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안은 고개를 돌려 옆자리에 있는 도하에게 물었다.
“아까 박람회장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17시간을 비행하고, 바로 일하러 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아까 분명…….”
“무리하지 말라던 강 박사님 얘기 다 잊었어?”
“……네?”
지안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 연신 눈을 깜빡였다.
그때 도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우리 관계, 비밀로 하고 싶다며. 직원들과 같은 호텔을 쓰면 당신과 내가 한방을 쓴다는 게 금방 소문날 텐데. 감당할 수 있겠어?”
“……!”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잠시 말을 잃었던 지안이 뒤늦게 말했다.
“그럼, 같은 방을 안 쓰면 되는 거잖아요.”
“……뭐?”
이번에는 도하가 당황한 듯 굳어 있다가 한 박자 늦게 답했다.
“당신, 여기가 한국인 줄 아나 본데, 여기 미국이야. 무서운 동네라고. 할리우드 영화 보면 알지. 총기도 막 소지하고 다니고.”
“초, 총기요?”
“그래. 이런 곳에서 여자 혼자 방을 썼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려고.”
도하가 으름장을 놓듯 말하자 지안의 말갛던 얼굴 위로 금세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
누구보다 야무지고 똑 부러진 여자이지만, 이럴 때 보면 소녀처럼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라는 걸 도하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입가에 스미는 웃음을 애써 삼키며 말했다.
“그리고 어제 당신 할머님께 약속했잖아. 당신, 지켜주겠다고.”
“……!”
더는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만드는 한마디였다.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는 그녀였지만, 이상하게 한 남자 앞에서만 이렇게 속수무책이 되곤 했다.
“후유.”
지안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차 문을 열었다.
***
하린은 미리 얻은 정보대로 케이원 직원들이 묵는 호텔 로비로 들어섰다.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도하와 지안은 각자 다른 객실을 예약했다고 했다.
사내에 아직 둘의 관계가 밝혀지지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정이었다.
하린의 계획은 단순하고 명료했다.
서지안이라는 여자가 도하의 곁에 없을 때,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 그리고 추억이 가득한 이 도시에서 다시 시작되는 재회 로맨스를 쓰고 싶었다.
어렵게 알아낸 도하의 객실 번호.
하린은 바로 그 옆 객실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샤워부터 했다. 긴 비행에 지친 피로를 씻어내고, 말끔해진 모습으로 도하를 만나고 싶었다.
도하가 좋아하던 향수를 뿌리고, 오늘을 위해 준비한 특별한 속옷도 입었다.
쇄골 아래로 깊이 파인 브이넥에 허리와 골반이 완전히 핏 되는 아슬아슬한 원피스.
살짝 덜 말린 긴 머리카락에 맺힌 은근한 물방울과 추억에 젖은 뇌쇄적인 눈동자.
객실을 나서기 전, 전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하던 하린의 얼굴 위로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마지막으로 도수가 높은 포트 와인 한 병을 손에 들고 객실을 나왔다.
그리고 바로 옆 객실 앞으로 다가가 벨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을 눌러도 안에서 기척이 없자, 하린은 낮게 소리 내 불렀다.
“도하 씨, 나야.”
그 소리를 들은 건지, 문 쪽으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도하가 오고 있다는 생각에, 하린은 달뜬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천천히 객실 문이 열리고 샤워 가운 차림을 한 남자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누군가를 발견한 하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에 들고 있던 와인병을 그대로 놓쳤다.
쨍그랑.